지난 3월25일 국사교육심의회는 24개항으로 된 중·고교 국사교과서의 개편 시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시안 중 고대사 부분에서 앞으로 개편되는 국사교과서는 단군신화를 실제로 있었던 역사사실의 반영으로 파악하고, 고조선이 정치적·문화적으로 상당히 발전하였음을 명기한다고 밝혔다.
  이는 ‘올바른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찾자’는 일반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데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지난 84년 標準東洋三國興亡圖表(표준동양삼국흥망도표)라는 책을 펴냈던 李相時(이상시)변호사가 식민지사관을 불식시키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사실로 정립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올해 2월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서론, 4장에 달하는 본론 및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백여 페이지에 걸쳐 각 종 문헌과 사진 등의 참고자료를 비롯 각 장마다 풍부한 註(주)를 게재하고 있다.
  저자는 제2장 ‘일제의 우리 上古史(상고사) 말살의 실태’에서 일제가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월부터 조선사편수사업이 완료되기 1년 전인 1937년 말까지 무려 27년에 걸쳐 실시한 소위 ‘史料蒐集(사료수집)’에 의해 수십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료가 탈취되거나 소각 또는 인멸되어 버렸음을 밝히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역사에 관한 사료, 특히 上古史(상고사)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어졌으며, 日帝(일제)의 조선사편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등 약 20여종이 남아있을 뿐이다.
  필자는 일제가 우리 上古史(상고사)를 말살하는데 절호의 근거사료로 삼기 위하여 남겨두었던 ‘三國遺事(삼국유사)’만을 단군조선사 연구에 있어서 유일한 문헌고증의 근거로 삼는 연구태도를 비판하면서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하여 합리적이며 객관적 타당성이 있는 사실을 기초로 해 실사로 저술한 道家史書(도가사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撥園史話(발원사화)’를 들었는데, 이 책은 조선 숙종 원년 (1675) 北崖子(북애자)가 국내외 총 43여종의 古史籍(고사적), 문헌, 기록을 고증 인용하여 저술한 것으로 후인의 加筆(가필)이 안 되고 원본의 내용 그대로 전해지는 最古(최고)의 사서이다.
  ‘撥園史話(발원사화)’는 5개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본론인 ‘檀君紀(단군기)’는 桓雄(환웅)의 아들 桓儉(환검), 즉 始祖檀君(시조단군)이 태백산 檀木下(단목하)에서 임검 (君長(군장))으로 추대되어 즉위한 날부터 마지막 왕인 49世(세) 檀君(단군) (古列加(고열가))이 망할 때까지 1195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으로 상당한 문헌고증의 바탕 위에서 단군조선의 實史(실사)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단군이란 ‘박달임검’ 또는 ‘배달임검’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호칭인데 후세에 한자가 전래되자 述史者(술사자)들이 그 뜻을 의역하여 ‘檀君(단군)’이라고 표기한 것으로서 단군은 박달나라의 임검(檀國(단국)의 君長(군장))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임을 著者(저자)는 여러 사료를 들어 설명하면서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후손들도 모두 단군이라고 불리어왔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단군 한사람이 1천여 년 동안 한나라를 통치한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 책 ‘檀君實史(단군실사)에 관한 文獻考證(문헌고증)’의 결론 부분에서 올바른 史觀(사관)을 가진 사학자와 뜻 있는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뿌리 찾기’라는 성스러운 대과업의 수행에 다 같이 동참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역사를 찾음에 있어 지나치게 民族主義(민족주의) 史觀(사관)에 집착한 나머지 고증을 소홀히 하고 史實(사실)을 과장하여 서술하는 경향도 경계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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