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넘쳐나는 시대,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고 전前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한다.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이 비켜난 자리는 세일즈가 차지한다. 스토리텔링 시대의 소비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약속받고 서사를 소비한다. 이른바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다. 서사의 위기란 우리 삶에 촘촘히 들어앉을 가능성으로써 저 멀리서 오는 지식으로의 서사 대신 우리 삶을 점령한 휘발성의 정보와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된 힘없는 서사들에 대한 일갈이다.* 이런 서사의 위기는 예술 전방위에 공유될 위협이기도 한바.
미중 전략경쟁의 본격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이스라엘-하마스전쟁 발발, 가치사슬과 공급망의 교란,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고도화, 인플레이션과 금융 위기 등 지금은 이른바 복합위기의 시대이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2개의 전쟁은 진영충돌, 종교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중전략 경쟁의 본격화와 진행중인 2개의 전쟁 등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군사충돌의 가능성이 높은 곳이 대만해협과 한반도이다.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중 전략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
30대 중반의 A씨는 IT기업에서 개발자로 일한다. 주로 혼자서 업무를 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팀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가끔 고객과의 미팅도 있다. 코딩 실력은 뛰어나지만, 회의에 지각하는 일이 잦고 약속한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팀장은 A씨를 책임감 없고 성실하지 않은 직원으로 평가하지만, A씨는 자신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자주 잊어버려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누구라도 주변에서 A씨와 같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정말로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일 수도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사유 방법을, 어떤 조건에도 변치 않는 실체를 상정하는 초월성과 대비하여 내재성의 사유라 한다. 모든 것이 조건에 내재적이란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옳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판단이 조건을 떠난 분별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불교에는 미학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미학이란 미추를 분별하고 그 이유나 근거를 밝히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불교는 대단히 정교하게 발전된 철학은 있지만 그 긴 역사 속에서 미학은 따로 존재한 적이 없다. 정말 불교미학이란 불가
사역(寺域)에 들어서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에 이르는 길을 떠올려 보자. 경내로 들어서는 도중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과 같은 여러 개의 문을 지나칠 것이다. 그 중 천왕문을 지날때는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는 거대한 조각 네 구를 만나게 되는데, 잔뜩 치켜올린 숯검댕이 눈썹 아래 부릅뜬 눈, 용 비늘 같이 탄탄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발 아래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령(生靈)을 복속시킨 무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불교의 호법신 ‘사천왕’으로, 사천왕은 고대부터 탑이나 건물 등에 부조되거나
번역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근사한 책이 나왔다.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애나 칭의 책이다.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제목만 보면 조금 아리송하기도 하다. 버섯과 ‘자본주의의 폐허’, 그리고 ‘삶의 가능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적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버섯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글쓰기, 심지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저자는 작고 미묘한 사물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버섯을 이해하
지금 우리나라 풍경을 보면 전 연령대에서 식도락을 추구하는 것 같다. TV나 SNS의 맛집탐방프로그램과 먹방의 영향일까. 심지어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기호식품까지 퍼져 고가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탐닉하는 젊은이들이 많아 구매자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고 한다. ‘내 돈 써서 내가 즐긴다는데 뭐가 문제야?’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다 태어난 인생 길어야 100년 사는 동안 사회가 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마음대로 살 권리는 있으니까. 그러나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구촌의 많은 사람이 마음대로 먹고 마시
잦은 이동과 하염없는 변화, 그리고 허물어지는 경계 속에 서 있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혼종성’은 더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혼종이라는 단어를 마주한 우리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하나는 단일성(單一性)의 상실을 열등함과 불결함으로 판단하는 시각일 테고, 다른 하나는 이종(異種)의 결합으로 잉태된 다양성과 새로움을 긍정하는 인식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종을 인식하는 방법은 둘 중 어떤 것에 가까운가. 아마 혼종을 ‘순혈(純血)의 오염’으로 보는 전자가 일반적일 것이다. 논문의 저자는 한국인이 ‘혼혈(혼종)’이라는 단
“불교는 무신론에 가까운 유신론입니다.” 지난 여름 조계종에서 만난 한 스님이 해준 한 마디가 이번 여름의 잔상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스님은 다른 종교인들과의 만남에서 불교의 특성을 설명할 때면 이 문장으로 답한다고 한다. 내가 스님의 의도대로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불심의 상당 부분의 근거도 이 문장에 배어 있다. 불교의 역사에서 다른 종교에서 발생한 논란·논쟁이 없는 주제 중 하나가 우상숭배이다. 사전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신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종교가 성립되기 위한
2023년 여름, 대한민국은 전례 없는 사회현상을 목도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무고한 시민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칼부림과 살인을 예고하는 글들이 게시되고 있다. 그사이 경찰은 ‘흉기난동범죄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했고, 민간에서는 시민의 자발적 제보를 통해 칼부림 테러 예고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테러리스, https://terrorless.01ab.net/).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 행동은 우리 사회를 불안으로 몰
극장으로 가는 길 극장으로 가는 길은극장에 갈 수 있도록극장에만 갈 수 있도록극장에도 갈 수 있도록극장뿐만 아니라극장이 아니어도갈 수 있도록설계되어 있었다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극장으로 가는 길은 부드러워요푹푹 빠져요 육교를 내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들려왔고그 소리가극장에 도착해서 영화를 관람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귀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나는 극장에 누워나는 침대에 누워그 웃음소리는 대체 뭐였을까생각하다가다시극장으로 가는 길에놓여극장으로 가는 길은지루하구나육교를 내려오며 크게
전해지던 코로나 감염자 수 정보가 자취 를 감추고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해제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 문명을 집 어삼킬 것 같았던 시절은 어느새 아득해진 것만 같다. 공원과 체육관, 식당과 회의실에 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돌아온 일상 의 평화가 재난영화의 끝자락처럼 감사한 요즘이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고, 전 세계 의 료 시스템이 시험대에 오를 정도로 들썩 이던 2020년 봄, 그레임 맥케이(Graeme MacKay)라는 만화가의 한 그림이 트윗상 에서 유명세를 탔다. 인류 문명이 코로나의 큰 파도 앞에서 무기력
에두아르 르베는 『자살』의 원고를 출판사에 송고한 직후, 파리에서 자살했다. 그 때문인지 ‘자살’은 소설의 내용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완성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자살이라는 현실에서의 행위가 정확히 어떻게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 짓는다는 것일까.르베의 또 다른 소설 『자화상』이 온통 “나는”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자기 묘사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자살』은 자살한 ‘너’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이들 ‘나’와 ‘너’는 내용상 많은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서로 겹치는 『자화상』의 ‘나’
법당에 들어가 불상(佛像)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자. 떠올려 본 부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연상하는 부처님의 생김새는 일반적으로 번쩍이는 황금빛의 금동불일 것이다. 하지만 불상의 재료는 금동 이외에도 돌, 흙, 나무, 직물류 등으로 다양하다. 불교에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후, 경전에서는 불상의 조성과 공덕을 언급하면서도 불상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7세기 말 당(唐)의 제운반야(提雲般若)가 번역한 『대승 조상공덕경(大乘造像功德經)』도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 때 보는 이로 하여금 불상이
나는 이번 학기 동국대 문창과 대학원에서 라는 수업을 선생으로서 진행하고 있다. 이 수업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이 글쓰기와 여타 예술에 미치는 영향과 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이 기계를 이용해 글을 쓴다는 일의 의미를 탐구하고, 기존의 글쓰기와 다른 미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 목표다. 누구도 현재로서는 생성 인공지능의 쓸모를 특정할 수 없기에 예술가만의 새로운 사용법을 먼저 제안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수업은 무엇인가 가르치기보다는 다 같이 실험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챗GPT는 대표적
한반도 이해관계자들은 대체로 북한을 다면적으로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북한과 평화 관련 문제는 ‘정치적 신념’의 영역에서 다뤄져 양자택일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종용한다. 분단은 우리 삶에 여전히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한반도 문제를 이미 종결된 것 내지는 무관심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분단 상황은 체제로 고착돼 우리의 의사 결정 과정과 긴밀히 작용한다. 분단 상황과 북한의 언행을 이해하고 적절한 대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북한이 형성된 과정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지 않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감소에 직면하고 있다. 2020년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고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비수도권보다 수도권이 적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베이비붐세대의 고령층 진입으로 나타난 상황이라 할 수 있으며, 인구 데드크로스 발생으로 생산연령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이에 2023년 전국 89개 지자체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됐다. 정부는 인구감소지역 지원을 위해 2022년 6월 10일 「인구감소지역 특별법」을 공포한 뒤 2023년 1월 1일부터 이를 시행했다. 「인구감소지역 특별법」 제1장 제1
통일부는 북한이탈주민 지원정책으로 “북한이탈주민이 이웃이 되는 따뜻한 사회 구현”을 목표한다. 크게 세 개의 목표로 ①북한이탈주민을 포용하는 사회적 환경 조성 ②생산적 기여자로서 탈북민의 우리 사회 안정적 정착 ③통일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구성원으로의 안착을 설정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이 남한 사회에서 이웃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는 생산적 기여자로 역할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함께 통일 미래를 지향하는 남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따뜻한 사회 환경이 조성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정책은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
게오르그 루카치의 그 유명한 서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문장이 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소설이 ‘길 찾기’와 모종의 관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다른 틀로 형식화되는 것 같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적 공간의 특징을 “인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초월*”했다는 것으로 정식화했다. 즉 근대의 문제가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나의 관계를 잃었다’라는 것이라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는
“챗GPT 시대에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근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공지능(AI) 챗봇, 챗GPT에게 물었다. “인간은 챗GPT와 차별화되는 창의성과 융합적 사고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챗GPT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사고를 갖추어 기술 사용의 영향과 결과를 고려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놀랍도록 합리적인 답변이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논점들에 대해 인간의 관점에서 보다 깊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창의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챗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