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연구 법제·사회경제사로 전환

유럽近代史(근대사) 早期導入(조기도입)으로 近代化(근대화)促進(촉진)
質的(질적) 量的(양적)으로 西歐水準(서구수준)에 未達(미달)


  지난 11月(월) 11, 12日(일) 兩日(양일)에 걸쳐 東京大學(동경대학) 史學會(사학회) 主管下(주관하)에 제 66차 全國(전국) 歷史學(역사학) 大會(대회)가 東京大學(동경대학)에서 열렸었다. 東京大學(동경대학) 西洋史敎授(서양사교수) 林健太郎氏(임건태낭씨)의 招請(초청)으로 筆者(필자)는 同大會(동대회)에 參席(참석)했다. 1천여 명의 歷史家(역사가)들이 참석한 同大會(동대회)는 外國(외국)學者(학자) 십여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日本人(일본인)들이였으며 同大會(동대회)의 同西洋史(동서양사) 및 日本史(일본사)의 세 分野別(분야별)로 참석한 外國學者(외국학자)를 보면 日本史部(일본사부)에 3, 4名(명) 東洋史部(동양사부)에 6, 7名(명) 西洋史部(서양사부)에 4名(명)이었든 大盛況(대성황)은 아닌 同大會(동대회)였다. 원래 同(동)歷史學大會(역사학대회)는 하나의 國際的(국제적)인 大歷史學會(대역사학회)의 年例行事(연례행사)이기에 대단한 規模(규모)의 學術大會(학술대회)가 아닌 것은 豫見(예견)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유럽의 近代史學(근대사학)을 우리보다는 일찍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民族史(민족사)를 整理(정리)했고 또한 그들의 近代化(근대화) 促進(촉진)에 寄與(기여)했다는 日本(일본)歷史學(역사학)의 活動(활동)이 同大會(동대회)를 통해서 볼 때 規模(규모)와 進行(진행), 熱意(열의)와 水準(수준)에서 역시 유럽 여러 나라의 歷史學(역사학) 活動(활동)처럼 活潑(활발)하지는 못하며 그럼으로써 높이 評(평)할 수 있는 大會狀況(대회상황)은 아니라는 印家(인가)를 받았다.
  먼저 同大會(동대회)에서 發表(발표)된 論文(논문)들을 보면 日本(일본)사부에서 ①法華義疏(법화의소)와 勝髮經義疏(승발경의소)와의 關係(관계)에 대해서, ②奈良時代(나량시대)의 皇親(황친)과 貴族(귀족), ③保(보)의 成立(성립), ④‘文治守護地頭(문치수호지두)’ 試論(시론) ⑤永印德改令(영인덕개령)과 越訴(월소) ⑥佐賀籍(좌하적)의 人口(인구)動態(동태) ⑦明治(명치)三十八年(삼십팔년) 靑和反對(청화반대)世論(세론) ⑧米穀(미곡) 檢査(검사)와 小作米(소작미) 등 都合(도합) 8편이었고 東洋史部(동양사부)에서는 ①先秦貨幣(선진화폐)의 普及率(보급률), ②周公卽位考(주공즉위고), ③四世紀(사세기)에 있어서 嘉陵江(가릉강)上流地域(상류지역)의 地域構造(지역구조)에 關(관)한 考察(고찰), ④現存(현존)代(당대)燉煌(돈황)戶籍(호적)의 年代的(연대적) 特徵(특징), ⑤遼(요)의 著帳官(저장관)에 關(관)하여, ⑥北宋時代(북송시대)의 東南官賣下末鹽鈔(동남관매하말염초)에 關(관)하여⑦마무르크期(기)에 있어서 나-스일 檢地(검지)의 歷史的(역사적) 性格(성격) ⑧張居正(장거정) 張量策(장량책)의 歷史的(역사적) 意義(의의), ⑨靑代(청대) 徽州商人(휘주상인)의 一面(일면), ⑩세뽀이의 亂(난), 黎朝(여조)의 敎化條例(교화조례) 등 都合(도합) 11편이었으며, 西洋史部(서양사부)는 ①아데네에 있어서의 殺人訴訟(살인소송) ②10~12世紀(세기)에 있어서 Herzogtum의 發達(발달) ③伊太利(이태리) 中世都市(중세도시)의 領域支配政策(영역지배정책)의 一(일)段階(단계) ④쭈리히에 있어서 再洗禮派運動(재새례파운동)에 關(관)하여 ⑤부르고뉴 慣習法(관습법)에 나타난 프랑스 絶對王制成立期(절대왕제성립기) ⑥루이 14世(세) 治下(치하)의 思想統制(사상통제) ⑦챠-티스트 ‘土地計劃(토지계획)’과 그의 史的位置(사적위치)에 關(관)하여 ⑧맑쓰·엥겔쓰와 포랜드 問題(문제) 등 都合(도합) 8편의 論文(논문)이였다.
  筆者(필자)가 시종 지켜본 西洋史部(서양사부)의 硏究發表(연구발표)를 보면 그 Positive한 面(면)과 Negative한 面(면)을 各各(각각) 다음과 같이 指摘(지적)할 수 있다.
  첫째 리버럴한 日本學界(일본학계)의 風土(풍토)이기에 思想統制(사상통제)의 拘害品(구해품)없이 硏究(연구) 테마를 自由(자유)로이 選定(선정)할 수 있다는 點(점)과 둘째, 자유로이 擇(택)한 ‘테마’의 誇功(과공)을 위해서 原史料(원사료) 引用(인용)은 不可能(불가능)하지만 新刊(신간)專門書籍(전문서적)을 풍부히 이용한다는 點(점), 그리고 셋째는 硏究發表(연구발표)의 進行(진행)을 社會者(사회자)가 되어 發表者(발표자)와 同分野(동분야)의 專門史家(전문사가)가 發表後(발표후)의 圓滑(원활)한 討論(토론)을 ‘아란쥐’한다는 點(점) 등 세 가지가 우리나라의 경우보다는 나은 點(점)이라고 할 수 있고 그 Negative한 面(면)이라면 첫째, 發表者(발표자)들이 적어도 大會(대회) 直前(직전)에 그 發表論文(발표논문)을 印刷(인쇄)해서 배부하지 않았다는 點(점)과 둘째, 30分(분)限定(한정)의 發表時間(발표시간)을 어기고 때로는 50餘分(여분)의 論文(논문) 朗讀(낭독)을 하는 點(점).
  그리고 셋째는 장황한 論文朗讀(논문낭독)은 聽衆(청중)으로 하여금 發表(발표)자의 立論(입론)을 간결하게 把握(파악)키 어렵게 했을 뿐더러 그로 因(인)하여서 때로는 단 한가지의 質疑(질의)도 없이 名色(명색)이 論文發表會(논문발표회)라는 形式(형식)만을 취하고 있다는 감을 준 점 등을 들 수 있다. Negative한 面(면)의 세 가지를 좀더 仔細(자세)히 說明(설명)하라면 어느 學術大會(학술대회)이든 간에 發表者(발표자)의 論文(논문)이 全會員(전회원)들에게 大會日字(대회일자) 以前(이전)에 印刷(인쇄) 配付(배부)되지 않는 한 그 論文(논문)이 提示(제시)하는 局部的(국부적)인 問題點(문제점)에 대하여 卽興的(즉흥적)으로 進擊(진격)한 討論(토론)을 벌리기란 極(극)히 어려운 것이다.
  무릇, 硏究發表會(연구발표회)의 意義(의의)가 어느 한 硏究問題(연구문제)를 獨自的(독자적)으로 硏究(연구), 體系化(체계화)하여 同學人(동학인) 相互間(상호간)의 認定(인정)을 구하는데 있느니만큼 發表論文(발표논문)을 사전에 公開(공개)하고 發表(발표) 當日(당일)은 當該論文(당해논문)의 要旨(요지)만을 說明(설명)하고 異論(이론)에 反駁(반박) 또는 변명하는데에 學術(학술) ‘세미나’의 意義(의의)가 있는 것이다. 섭섭하게도 東京(동경)의 歷史學(역사학)大會(역사학대회)도 筆者(필자)가 설명한 위와 같은 절차와 信行(신행)이 아니어서 높이 評價(평가)할 歷史學大會(역사학대회)는 못되었다.
  그러나 日本(일본)의 歷史學活動(역사학활동)이 우리나라의 歷史學(역사학)회 活動(활동)에 비해 質的(질적)으로나 量的(양적)으로나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다.
  1990年(년) 이래 史學雜誌(사학잡지)를 發刊(발간)하고 있는 60餘年(여년)의 소위 歷史學(역사학) 硏究(연구)의 傳統(전통)을 가졌고 그들의 學問硏究(학문연구)를 뒷받침하는 社會的(사회적), 經濟的(경제적)與件(여건)이 우리나라의 現實(현실)보다는 天壤之差(천양지차)에 가깝기 때문이다. 19世紀(세기) 末葉(말엽)이래 日本(일본)이 행하고 있는 史學硏究(사학연구)를 간단히 推離(추리)해보면 近代(근대)史學(사학)의 始祖(시조)라고 불리는 獨逸(독일)의 歷史家(역사가) 랑케(N·B·Ranke ·1866) 弟子(제자)인 리-스(L·Riees)敎授(교수)가 東京大學(동경대학)에 敎職(교직)할 때부터 日本(일본)은 獨逸(독일)의 近代史風(근대풍)을 받아드렸었다. 西歐諸國中(서구제국중)의 後通國(후통국)이였든 獨逸(독일)이 國民國家統一(국민국가통일)을 完遂(완수)한 후 곧장 軍國主義(군국주의)에 立脚(입각)한 富國策(부국책)으로써 유럽列强(열강)의 大悅(대열)에 낀 것을 示範(시범)삼아 明治時代(명치시대) 이래 日本(일본)은 國策的(국책적)으로도 역시 獨逸(독일)정책을 模倣(모방)한 바 있다. 그래서 2次大戰(차대전) 中(중)에 대부분의 日本(일본) 史學家(사학가)들은 마치 往昔(왕석)의 프로이센 學派(학파)들이 政事(정사)에 參與(참여)하고 國策(국책)을 支援(지원)했 美것처럼 나치獨逸(독일)을 讚(찬)든했으며 그를 日本國間(일본국간)에 紹介(소개)하는데 급급했고 나아가선 日帝(일제)政治(정치)의 바탕에 흐르든 유럽主義(주의)(Europaismus)의 批判(비판)을 問題視(문제시)하는 등 모두가 窮極(궁극)에는 日帝(일제)의 國策(국책)을 首肯(수긍)하는 傾向(경향)을 보였었다. 그러나 終戰(종전)후에는 獨逸(독일)에 있어 마이네케(Meinecke)같은 歷史家(역사가)가 나치獨逸(독일)을 贖罪(속죄)하고 나치적 獨裁(독재)에 따라갔든 獨逸國民(독일국민)의 自省(자성)을 促求(촉구)했듯이 日本(일본)에 있어서도 많은 史家(사가)들이 日帝(일제)의 獨裁主義(독재주의)에 대해서 反省(반성)을 促求(촉구)하는 傾向(경향)을 보이면서 歷史硏究(역사연구)에 있어서도 平和(평화)論(론)의 테마를 들고 나왔든 것이다. 方法論的(방법론적)으로도 종래 랑케사학의 政治(정치)史(사) 中心(중심)에서 맑쓰주의와 맑쓰웨버 등의 方法論(방법론)을 참작하여 社會經濟史學(사회경제사학)을 主流(주류)로 하는 新傾向(신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 두드러진 예로써 작년도의 西洋史學硏究(서양사학연구) 결과를 보면 2百餘編(백여편)의 發表(발표)된 論文(논문)중 40餘編(여편)이 獨逸史(독일사)와 政治法制史(정치법제사)의 關係論文(관계논문)이었음은 純粹(순수)한 政治史(정치사) 中心(중심)의 硏究(연구)傾向(경향)이 法制(법제) 社會經濟史(사회경제사) 쪽으로 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日本(일본)의 史家(사가)들이 西洋史學(서양사학)을 硏究(연구)하는데 있어서도 自國(자국)의 입장에 슨 問題(문제)의 提起(제기)를 잃지않고 있다는 점은 올바른 歷史認識(역사인식) 위에서 산 歷史學(역사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稱讚(칭찬)해주지 않을 수 없으며 西洋(서양)의 原史料的(원사료적) 制弱(제약)이라는 어려운 與件下(여건하)에서도 우리나라에 비해 質的(질적)으로 특히 量的(양적)으로 몇 곱절의 硏究結實(연구결실)을 내고 있는 것은 부지런한 日人史家(일인사가)들의 勤勉(근면)에서 얻어진 所産(소산)이라 하겠다.
  끝으로 同大會(동대회)에서 우리 歷史學界(역사학계)에 提言(제언)하고픈 것은 이 나라의 史家(사가)들도 學究上(학구상)의 與件(여건)만을 탓하는 나머지 대부분이 大學生(대학생)에게 過去(과거)의 事實(사실)만을 傳達(전달)하는 敎授(교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團合(단합)과 꾸준한 努力(노력)으로 좀 더 ‘리버랄’한 學風(학풍)을 造成(조성)하고 歷史(역사)의 縱的(종적) 橫的(횡적) 硏究(연구)로써 正確(정확)한 歷史解釋(역사해석)의 正當性(정당성)을 堅持(견지)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선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기 위한 近代化(근대화) 作業(작업)에 寄與(기여)하고 우리 民族文化(민족문화)의 特異性(특이성)을 살리면서도 平和(평화)를 堅持(견지)하고 ‘인터내이쇼날리즘’에 指向(지향)하도록 이 땅의 精神風潮(정신풍조)를 開化(개화)하는 데에 크게 一役(일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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