象徵(상징)은 하나의 體系統合(체계통합)하는 性格(성격) 지녀

人間은 社會(사회)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고 또 종교를 떠나서도 살 수가 없다. 現代(현대)가 물질 문명화될수록 그에 비례해 人間性(인간성)과 神性(신성)의 상실 또한 커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엘리아데의 주장을 중심으로 現代文明(현대문명) 속에서의 宗敎(종교)의 위치를 살펴보고 현대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각 시대마다의 종교의식변화를 알아본다.
<편집자 註>


一. 現代文明(현대문명)과 宗敎(종교)의 位置(위치)

  人間의 종교에 대한 궁금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는 아득한 때부터 사람들의 삶과 더불어 있어 왔으며, 또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규정함에 있어서 어떤 다른 文化現象(문화현상)보다도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M 엘리아데(Eliade)가 그의 著書(저서) ‘聖(성)과 俗(속)’의 결론에서 인간은 종교적이든 非宗敎的(비종교적)이든 간의 Home Religious일 수밖에 없다고 定義(정의)하고, 하나의 種(종)으로서 ‘종교적 동물’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물음은 역사와 더불어 문화와 더불어 계속되어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왕에 사람들이 세워둔 어떤 前提(전제)―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그것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엘리아데는 역사를 지나오면서 지금까지 존재해 온 종교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 原型(원형)과 起源(기원)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희미하게나마 종의 진상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상, 종교학(History of Religious)이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고, 어쩌면 ‘종교에 대한 학문적인 態度(태도)’마저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관심이 학문으로 보다는 오히려 信仰(신앙)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 온 탓도 있으며, 또 文化現象(문화현상)을 주제로 하여 분석하고 규정하는 인접과학의 발전이 늦은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때에 엘리아데의 주장과 現代文明(현대문명) 속에서 종교는 그 자체가 反理性的(반이성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결국 역사 속에서 成長(성장)해 오면서 종교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고, 더욱이 그 안에 믿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여기’의 삶을 肯定的(긍정적)이게 하고 믿음을 통하여 人間性(인간성)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본질적인 모습은 현대문명의 완벽한 理性主義(이성주의) 앞에서,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非理性的(비이성적)·非人間的(비인간적)인 것으로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미신으로까지 극단적 간주하는 현대문명은 또 다시 그 자체가 하나의 迷信的(미신적) 要素(요소)로 발전 해 가고 있음은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現代文明(현대문명)과 거대한 社會組織(사회조직) 속에서 종교라 일컬어지는 종교가 정말로 종교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가장 중대한 물음이며, 만약 이러한 물음이 긍정적일 수 있다면, 또한 종교는 신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로 남게 된다.
  결국 현대의 종교는 쉽사리 미신으로 둔갑하여 미신은 다시 종교가 아닌 ‘종교적 幻想(환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신비’를 파헤친 현대문명의 裏面(이면)에서 ‘더욱 위대한 신비’를 이룩하려는 행위―미아리고개에 즐비한 점술가들의 예언과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는, 날 받아 장가들고, 찬물 떠놓고 치성 드리는,―가 현대인들에게 편리한 ‘宗敎的(종교적) 幻想(환상)’으로 남아 줄 것인가는 의문이다.
  M·엘리아데의 結論(결론)처럼 인간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종교적 환상을 부인할 수 없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아무리 현대가 非聖化(비성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결국 神聖(신성)함이 있었기에 非聖化(비성화)가 가능하고, 종교적 동물이기에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聖(성) (Sacred)을 경험하던 俗(속) (Profane)을 경험하던 완벽하게 종교적인 사람은 없고 완벽하게 비종교적인 사람 또한 없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古代存在的原理(고대존재적원리)(Archaic ontology Types)을 살펴봄으로써 종교가 궁극성과 초월, 그리고 신성이라고 하는 전통적 개념들을 제도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 현대종교가 지닌 과제라 하겠다.


二. 엘리아데의 方法論(방법론)과 象徵(상징)

  엘리아데의 커다란 전제는 인간이 전혀 질적으로 다른, 이중적인 世界(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개가 實在(실재)를 성(Sacred)과 俗(속)(Profane)라 부르고 이것은 인간의 두 가지 경험의 양태로 설명하는 存在論的(존재론적)범주로 제시하고 있다. 質的(질적)으로 다른 이 두 개의 實在(실재)는 성(聖)과 俗(속)의 변증법적 合一(합일)에 의해 함께 있으며, 이것의 경험론은 聖顯(성현)(Hierophany)이라는 양식에 의해 가능하고, 聖顯(성현)은 존재하는 모든 事物(사물)에 있어서 가능하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聖俗(성속)의 변증법적 구조에 의해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非宗敎的(비종교적)인 것도 없다. 즉 종교적인 요소는 文化(문화) 속에 있는 경험적인 사실로 존재하는 한 비종교적인 요소와 함께 하나의 現象(현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聖(성)과 俗(속)을 함께 사는 사람, 즉 聖顯(성현)의 변증법적 구조를 경험적인 實在(실재)로 지니고 있는 사람을 종교적인 사람(宗敎人)으로 규정한다.
  그가 성과 속의 存在論的(존재론적) 범주를 기습하고 규정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 추론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다만 古代社會(고대사회)의 경험내용을 實證的(실증적)으로 분석하여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사회의 인간에 의해 형성된 우주 안에서 그 자신의 경험하는 성의 상징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신화나 祭儀(제의)를 통하여, 전달되고 보존된 역사는 거룩한 역사이며, 신화나 제의가 시간이 비롯되었던 太初(태초)에 일어난 커다란 성현을 주기적으로 재연함으로써,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아데는 역사를 무한히 반복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神話(신화)나 祭儀(제의) 등의 구체적인 문화현상을 통하여 古代(고대) 存在論(존재론) (archaic ontology)을 발견해내고 거기서 그와 같은 구조적인 인식 가능성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 종교인은 초월을 거절하고 실재의 상대성을 받아들이며 실존에 대한 회의마저도 갖는다. …현재의 종교인은 실존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다만 이 역사의 유일한 주체이며, 수행자라고 생각하고, 초월에 대한 모든 호소를 거절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성을 위한 어떠한 모델도 인간적인 情況(정황)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인간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지어가고 있다. 즉 그가 얼마만큼 이 세상과 자기를 非聖化(비성화)하는 가 하는 그 정도만큼 자기 자신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은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장애물인 것이다.
  그는 그가 완전히 非聖化(비성화)될 때, 비로소 자신이 인간일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인은 그가 마지막 神(신)을 없애게 될 때 까지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神(신)의 자기 파괴로부터 종교는 현실화된다는―神(신)의 죽음으로써 神의 現實(현실)이 可能(가능)하다는―주장이다. 이는 현대인과 현대문명이 은폐하고 망각해버린 것처럼 살고 있지만 사실은 삶의 어떠한 양태 속에서도 時間(시간)을 再生(재생)하고, 원형을 반복하며 몰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엘리아데가 人間을 종교적인 동물(Homo Religious)로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다.
  宗敎學者(종교학자) Eliade는 聖(성)의 변증법적 構造(구조)를 설명함으로써 거룩한 상징, 혹은 聖顯(성현)이 된 사물의 실제적인 現實性(현실성) 혹은 구체성을 지속적으로 認識(인식)하고 있으며 하나의 藝術的(예술적) 形態(형태)로서의 神話(신화)가 지닌 실존적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상징적 현실인 신화나 제의를 통한 종교적 경험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엘리아데 자신은 결코 원시인 또는 古代人(고대인)의 초시간적 原型(원형)(Archetypes)과 그 무한한 반복의 世界觀(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Cosmos and History’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根本的(근본적)으로 우리는 신을 배제하지 않는 自由(자유)의 哲學(철학)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원형과 반복의 地平(지평)을 함부로 초월할 수 없다.…”
  信仰(신앙)은 어떠한 自然法則(자연법칙)으로부터도 解放(해방)된 것이며, 그러므로 人間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드높은 自由(자유)를 意味(의미)한다.
  그것은 宇宙(우주)의 存在論的(존재론적) 구성에까지 간여하는 自由(자유)인 것이다.
  오직 그러한 자유만이 현대인을 역사의 공포로부터 막아줄 수 있다.
  이 자유는 神(신)에게 源泉(원천)을 두고 신에게서 그에 대한 保障(보장)과 밑받침을 찾는 그러한 自由(자유)이다.
  엘리아데는 모든 自然現象(자유현상)을 초시간적 원형에 결부시켜 <반복>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반복’된다는 것은 물론 보편성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임엔 틀림없으나 반복이 영원히 반복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원형과 반복의 地平(지평)’은 역사발전의 필연성 앞에서, 그의 이러한 가치부여는 엘리아데―그의 형이상학적 편견이 아닐까?
  즉 원형의 반복을 통한 가치부여로서 원형의 초역사적 절대성을 상실한 때에, 역사적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성스러운 우주체험을 고집하는 것은 서구의 전통적 역사의식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역사적 인간이 역사창조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그는 무비판적 일반화에 의해 자기의 보편적 구조를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는 이와 같은 槪念(개념)과 그에 대한 믿음이 배제된 현대인의 여하한 상황도 결국은 절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음으로 상징적으로 충만해 있는 엘리아데 종교학의 상징성에 대한 구조와 논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에 의하면 상징은 인간의 직접적 체험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실재의 양태나 세계의 구조를 드러낸다. 즉 상징이 인간의 체험으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실재의 양태를 나타내는 예로서 물의 상징을 들 수가 있다.
  합리적인 인식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전 형태적인 것들, 잠재적인 것들은 물이라는 물질을 통한 상징의 도움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 상징의 본질적인 특성은 직접적인 체험으로는 그 연관성이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는 많은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는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달의 상징은 달의 차고 기울음, 시간적인 생성 물, 식물의 생장, 등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전체적인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달의 상징은 우주적 실재의 여러 지평과 인간 존재의 어떤 양태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적 질서의 조응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상징은 하나의 체계로 통합시키는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상징은 인간에게 통일체의 세계를 발견하도록 하는 동시에 세계 속에 들어있는 인간 자신의 운명을 자각시킨다.
  세계는 異質的(이질적)인 여러 次元(차원)이 서로 교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Image and Symbol’에서 “역사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징으로서의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할 때 宗敎學(종교학)은 精神分折學(정신분절학)을 초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인류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서 아직 살아있는 것이든 혹은 지금 화석이 되어 버린 것이든 原初(원초)의 상징과 原型(원형)을 다시금 소생시키고 다시 意識化(의식화)하는 대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결국, 엘리아데에게서 우리는 상징과 히에로파니(성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히에로파니는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능상의 차이가 없이, 항구적인 연속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상징화 작용은 히에로파니를 우주전체와 一體化(일체화)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三. 批判(비판)

  원시인과 고대인의 非歷史的(비역사적)인 原型(원형)과 반복이 위안과 精神的(정신적)인 安定(안정)을 그들에게 제공했던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초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人間의 역사가 進行(진행)됨에 따라, 그러한 위안과 안정을 포기해 가면서까지도 直視(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經驗(경험)과 事實(사실)이 누적되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찾아낸 돌파구는 바로 “신에게는 모든 것이 可能(가능)하다.”라는 유태교 그리스도敎的(교적)인 신앙이었다고 할 때, 이러한 신앙이 주는 위안과 安定(안정)을 다시 한 번 떨쳐 버리면서 좀 더 현대인의 경험에 充實(충실)하고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되는 合理的(합리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똑같이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진전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이 發展(발전)을 기독교적 신앙의 영역으로 다시 흡수하느니 보다, 신앙이 제공했던 創造的(창조적) 自由(자유)를 또 다른 次元(차원)으로 指向(지향)하는 역사의식·역사행위를 찾는 것이 올바른 求道(구도)의 態度(태도)가 아닐까?
  또 한 가지 내가 보기에는 엘리아데가 古代(고대)의 存在論(존재론)에 대한 방대한 知識(지식)의 所有者(소유자)요 그 理解(이해)의 重要性(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도시에 그는 누구 못지않게 現代(현대) 西歐(서구)의 存在論(존재론)과 事物觀(사물관)에 얽매여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도대체 古代存在論(고대존재론)이라는 槪念(개념)부터가 그가 말하는 現代人(현대인)―소크라테스 以後(이후)의 西洋人(서양인)―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원시인이나 고대인이 존재론적 개념(?)을 구사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西洋哲學(서양철학)의 ‘편협화’를 경계하여 쓴 ‘우주와 역사’의 序文(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으로 복귀하지 않고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천박하고 편협화되어 버린 것 같다.
  어찌 신앙으로서만 절망을 막을 수 있을까? 古代人(고대인)의 原型(원형)이 古代(고대)라는 歷史(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름대로 體驗(체험)한 眞實(진실)의 所産(소산)이요, 그런 의미에서 일정한 歷史的(역사적) 限界(한계)와 지속적인 生命力(생명력)을 아울러 지닌다는 사실을 엘리아데가 오해했기 때문에 현대인의 역사라는 것은 그것대로 고대인의 원형적인 체험으로부터 實在以上(실재이상)으로 단절된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초월적인 신앙을 否定(부정)하는 새로운 역사의식의 진전은 세속의 영역만을 ―M. Eliade는 현대를 非聖化(비성화)의 단계로 보고 있다―무한정 확대시킴으로서 人間을 속된 권위의 노예로 전락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인의 神聖(신성)의 영역을 정해준 그들의 原型(원형)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형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체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多樣(다양)한 批判(비판)과 異論(이론)에도 불구하고 그가 世界的(세계적)인 宗敎學者(종교학자)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과 自然(자연), 歷史(역사)와 宗敎(종교), 그리고 文化間(문화간)의 관계에 대한 知的(지적)인 思唯(사유)와 哲學的(철학적)인 思牽(사견)을 풍요롭게 해주는 현대의 思想家(사상가)로서 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四. 結論(결론)

  엘리아데(M. Eliade)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神(신)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神(신)의 存在(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득한 때부터 믿는 행위가 있어 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記述(기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소박한 감격이 있을 뿐이다.
  唯一神(유일신)이라든가, 單一神(단일신)이라든가 凡神論(범신론) 云云(운운)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는 自身(자신)의 독특한 방법론과 解析學的(해석학적) 원리로서 宗敎學(종교학)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宗敎現象(종교현상)을 하나의 實在(실재)로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人類(인류)의 보편적인 現象(현상)으로 포괄될 수 있는 범주와 그 범주의 論理(논리)를 體系化(체계화)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人間의 삶은 超自然的(초자연적)인 存在(존재)에 의하여 드러난 것을 모방함으로써 비로소 意味(의미)있는 것이 된다.”는 그의 말처럼, 엘리아데는 人間의 보편적인 전체성과 역사의 共時的(공시적)인 全體性(전체성)을 관조하고 새로운 휴머니즘의 탄생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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