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네의 입학을 축하하며

  오늘도 어제처럼 하루를 마친, 인간들의 가장 순수한 만남들을 맛 본 하루였네. 제각기 쌓아온 정의 척도에 따라 적당한 격식- 때로는 진심으로 때로는 형식으로-으로 안부를 묻고 지난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네.
  내 서울에의 상경은 그제밤 송정리 발 야간 보통 열차, 십여일 전에 상경시엔 좌석권이 없어 화물칸을 들랑거리며 피곤한 몸을 가누어야 했던터라 이번엔 좌석권을 예매했었네.
  광주의 친척집에서 시간에 꼭 맞춰 나섰을때는 나의 여유를 비웃으며 마지막 시내버스가 떠나버리는 참이었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다음차를 몇 십분 기다리다 결국 포장마차 주인으로부터 막차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 택시를 탔는데, 미칠일이지, 서울까지 열차 요금은 2천5백원도 못되는데 송정리까지의 택시비가 4천원, 배보다 배꼽이 더 커버린 일이었지만 나는 하릴없이 부잣집 막내아들 티를 내어버렸네.
  설상가상, 좌석표의 번호를 보고 찾아간 내 자리엔 40대 후반의 아저씨들이 버티고 앉았는데 한 마디로 개기더군. 나는 나와 동행하게 될 법대나 이과생쯤으로 보이는 청년과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종용했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술에 취해 누가 먼저 탔냐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몸이 아프다, 동행이 있다, 하며 딴전만 피우더니 주윗 사람들의 젊은 놈이 너무한다 싶은 눈초리를 거북스러워하면서도 끈질기게 맞섰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은터라 결국 중간에 바꿔 앉으면 되겠지, 하고 후퇴해 버렸네, 그땐 내 야간열차에 대한 어떤 정이 후다닥 뺑소니를 쳐버리는 기분이었지.
  사실 내 목적이 열차 속에서 대화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인 향내를 맡으려는 것이었는데다 더욱이 자네에게 얘기하기엔 뭐하지만 앞자리에는 예쁜 아가씨가 앉아있었거든.
  그때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의미 있게 웃어주더군, 나도 따라 웃어주었지.
  그와의 대화는 열차 간에서의 누구나처럼 어느 곳에 살며, 어디를 뭣 하러 가며, 가족 중의 몇째며 하는 어찌 보면 심문 같은 얘기가 끝난 뒤부터 본격적이었네. 그는 왕복 차비를 아껴 책을 사기 위해, 그리고 병원을 일찍 가기 위해 열차를 타고 3일간의 병 치료차 ㅎ대 병원을 가는 중인 패션모델쯤으로 보이는 대단한 미남이었고 웅변을 했던 달변가였네. 해서 처음부터 나는 듣고 그는 술술술 얘기를 풀어나갔네.
  그는 소주 큰 병으로 한 병을 마시고 두 번째로 취했다는 애주가(폭주가?)인 죄로 몇 년 전에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 위경염(그는 쉽게 말해 위암이라고 하더군)에 걸렸는데 그때만 해도 감마선이 나오지 않아 단방약으로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설상가상으로 집 안에 변 받아줄 사람이 없던 날 마루까지 기어 나와 변을 누다가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에 박혀버렸다는 것이네, 처음엔 부모에게 숨겼지만 나중엔 소변에서 농이 나와 다시 병원에 갔는데 의사들은 슬슬 고갤 내돌렸다는 거야. 그가 죽음에 초연해져버린 것은 그때부터라고 그러더군.
  “국내외의 투병기를 읽으며 공감한 것인데요. 병을 이기고 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라는 걸 느꼈고만요. 의사들은 지금 나보고 초인간적이라고 말하죠. 지금은 이렇게 서 있잖아요… 24시간 꼼작 못하고 누워 있는데”
  나는 조금 아픈 관절염을 가지고 자리에 앉으려고 그보다 더 설친 일이 몹시 부끄러웠네.
  “난 살아야 할 의무를 다 한다고 생각했죠. 그 뒤부턴 일단 죽음 같은 건 안전에 두지 않으니까 의사들이 고갤 흔들며 어렵겠다고 말한 것도 전부 장난 같드만요… 나는 꼭 산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죠. 내가 왜 죽어…” (그는 하루에 세 번의 교통사고를 본 뒤 절대 고속버스를 타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의 이력은 정말 화려하더군.
  초등학교 2학년 때, 역에서 달리는 기차에 뛰어오르는 장난을 하다가 발목이 덜렁거리도록 잘려버렸고 (그가 보여준 흉터는…) 4학년 때는 골목대장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튜브를 타고 저수지로 들어가서는 수영을 할 줄 안다며 튜브를 밀어버리고 물속으로 빠져버렸는데 저수지 밑바닥을 기어 밖으로 나와 죽음을 면하고 위신을 세웠고 (이것은 증거는 없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다곤 생각지 않네) 또한 6학년 때는 관절염이 터져 수술을 하고도 어머니를 못 따라오게 하고 두 손에 신발을 묶어 앉음 걸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자기보다 싸움을 잘하는 애가 있으면 날마다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그 애의 집으로 달려가 돌로 대문을 처대어 끝내 질리고 지친 부모가 자식을 데려다 무릎을 꿇게 만드는 개구쟁이였다더군.
  이리 못미처 드디어 술 취한 사내가 화장실엘 가는지 자리를 떴는데 그와 난 서로 앉기를 양보하다가 끝내 내가 져서 자리에 앉았네, 그리고 강경쯤에 가서는 몸이 아프다는 뚱보 사내를 몰아내고(?)도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네.
  자넨 우리가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야비한 행위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사람인지라 바꿔 앉을 생각도 않는 뻔뻔스러움에 울화가 치밀었네. 하여,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준다면 피로만 잠깐 푼다는 당초의 생각을 팽개치고 그들이 주위를 서성거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우리들의 얘기에 몰두했네.
  “친구들은 나를 피해버리지…”
  우린 어느새 존칭이 어색한 사이가 돼 있었네.
  “내가 무섭다는 것야. ㅎㅎ 친구 녀석들은 내가 명랑하게 떠들고 웃으며 태연히 얘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거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데 그 놈들은 만났다하면 몸이 어떠냐. 요즘 건강이 어떠냐… 다 떠나버렸지. 그 많은 여자들까지도 … 혼자야”
  “…제일 못 참겠는 건 먹는 것과 동물적 욕망이야. 먹지 마라면 왜 그리 먹고 싶은지, 고기를 먹지마라면 쥬스가 먹고 싶고 …그리 안 아플 땐 그렇지 않았는데 누워서 공상만 하니까 간호원만 봐도 그냥 미치고 밤만 되면 베개를 끼고 들고 환장할 일이드만…지금 여자와 잤다간 1년이 도레미 타불이 돼 버리고…”
  그 큰 키에 그는 몸무게가 46kg이라 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시집 못 간 아가씨가 깜짝 놀라며 자기와 똑같다며 끼어들더군. 그의 바지 속에서 드러난 다리뼈가 꼭 팔뚝만 했고 마치 허수아비의 형상 같았네. 저런 몸으로 서서 몇 시간을 버티다니 나는 마냥 고개만 절절 내둘렀네.
  그 뒤부터 우리는 그 끼어든 아가씨, 차비가 아까워서 탄 아주머니들, 생일파티에 가는, 집에 운전사를 둔 아주머니, 제법 언변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대화에 고개를 디밀던 삼십 초반의 사내, 그리고 앞에 앉은 예쁜 아가씨와 함께 그가 주동이 되어 잡담을 했네.
  아주머니들은 나이를 젊게 봐주는 데 즐거워하고 우리들은 두 아가씨들과 입씨름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모두들 지루한 여행의 여독을 풀며 얘기를 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열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느낀 법대나 이과생 같은 분위기는 던져버리고 어느새 농담 잘하고 장난 좋아하는 재담꾼이 되어있었네.
  나는 그가 의사로부터 고개가 갸웃거려진 위암 환자이고 폐에 구멍이 뚫려 농이 나오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중환자였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낸 것은 그와 영등포역에서 헤어진 뒤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와 편지라도 주고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 생각자체를 까맣게 잊어 버렸다는 것은 캠퍼스에서 악수를 주고받으며 알 수 있었던 것이네.
  봄이 꿈틀거리는 계절, 못 먹는 술이지만 자네 입학주 한잔 마셔야겠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