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우 철학과2
 “대학은 교양인을 길러내는 학문의 전당의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교양’이라는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본래의 의미대로 긍정적인 측면과 반대로 고지식하고 현실 감각 없는 사람을 조롱할 때의 그것이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현실에 맞지 않는 허울 좋은 소리라고 느꼈다면 후자의 의미에 가깝게 읽은 것이다.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20대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나타낸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교양’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진다. 내 밥그릇 하나 챙기기 힘든 상황에서는 “교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기도 한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순간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회구조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교양은 위의 말대로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성질의 것인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잘못 굴러가는 것 같이 보여도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고 살아야 바람직한 상태로 돌아 올 수 있다. 그 누군가에 대학생이 포함되어야 한다. 곧 사회인이 될 대학생이 교양을 갖추고 원칙을 지켜나가야 인간적인 가치가 붕괴되고 있는 사회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역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양은 무엇이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을 노력해야 할 것인지 알아보자. 교양은 “학문·지식·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학생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학문을 공부하며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인문학자 강유원의 책 ‘몸으로 하는 공부’의 “학문의 세 가지 태도”를 인용하겠다. 그는 학문에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고 말한다.
‘인문학적 태도’, ‘사회과학적 태도’, ‘공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인문학적 태도’는 현존의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확고하고도 불변하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태도이다. 진정한 지식 추구의 출발점이며 사태의 고정성을 깨트리는 힘이 될 수 있다. 의심하는 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완결에 이를 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어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한 의심 후에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바로 ‘사회과학적 태도’이다. ‘사회과학적 태도’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인 것이다.
다음으로 ‘공학적 태도’가 있다.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 하는 이 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실용적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탁상공론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의심 없이 객관적 사실의 확인 없이 ‘무조건’ 실용성만을 따라간다면 이는 ‘유사 공학적’ 태도이다. 저자는 “결국 우리는 의심하는 인문학적 태도,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 태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를 얻고자 하는 공학적 태도 모두가 잘 어우러진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며 글을 마무리한다.
지식은 많지만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먹물’ 혹은 ‘꼰대’라고 한다. 이들은 교양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뉘앙스만을 강화할 뿐이다. 대학을 나왔다고 , 학문을 한다고 모두가 교양인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태도를 겸비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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