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전과 유토피아를 중심으로

제19回(회) 人文科學(인문과학) 分野(분야) 當選作(당선작)

理想(이상)을 통해 社會(사회)에 대한 理解(이해)시도
燕巖(연암)의 이상향, 철저한 비판과 社會性(사회성) 갖춰
‘유토피아’는 人間(인간) 中心(중심)의 理想鄕(이상향)을 표현해
新秩序(신질서) 摸索(모색)으로 一生(일생)보내
實學(실학)은 인간의 尊嚴性(존엄성) 중시


理想(이상)없는 사회는 不幸(불행)하다. 그 理想(이상)의 性格(성격)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이상이라는 新鮮(신선)한 피를 공급받지 못하는 社會(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렇게 新鮮(신선)한 피를 공급받지 못하던 사회가 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통을 겪는 때가 있다. 그것은 外部輸血(외부수혈)일 수도 있고 內的(내적) 補血(보혈) 일수도 있다. 그러한 時代(시대)를 우리는 흔히 전환기라 부르고 있으며 東西洋(동서양)을 莫論(막론)하고 시대 구분의 한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歷史的(역사적) 轉換期(전환기)에 知識人(지식인)이 취하는 態度(태도)는 무엇인가. K•만하임은 그것을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유토피아적 태도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데올로기적 태도가 旣存體制(기존체제)의 利權(이권)을 保護(보호)•擁護(옹호)•强化(강화)하기 위한 태도이라면 유토피아적 태도는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유토피아적 태도는 그 모험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轉換期(전환기)와 유토피아의 출현은 等式關係(등식관계)가 설립하긴 하지만 그러나 유토피아가 전환기에 充分條件(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必要條件(필요조건)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시대에나 유토피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를 전환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誇大妄想症(과대망상증)이라는 함정이기도 하다. 史學(사학)은 未來學(미래학)과 분리되어 그 영역이 분명하게 되어질 필요가 있다. 역사가 미래학을 대신하여 ‘歷史的(역사적) 轉換期(전환기)’를 판가름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T•모어와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은 기존체제의 모순의 노출과 新秩序(신질서)의 모색으로 진통을 겪던 역사적 전환기에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과 신질서의 모색으로 일생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물론 두사람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方向(방향)은 각각 달랐지만 거대한 역사적 압력 밑에서 남다른 고민을 해야했고 그러한 끝에 개인적으로는 毒說家(독설가), 불우한 생애로 끝났고 對社會的(대사회적)인 면에서는 자기의 이상을 멀리 섬으로 옮겨 전개시켰다. 文學(문학)을 상상력의 結集(결집)이라한다면 T•모어와 연암의 문학은 斬新(참신)한 상상을 통해, 그러나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論理(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창조적 정신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두 사람 모두 歷史的(역사적) 전환기에 作品(작품) 속에서나마 自我(자아)를 일깨우고 시대를 헤쳐나가는 유토피아를 건설했음은 이 論考(논고)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며, 相異(상이)한 역사적 배경, 展開(전개)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같이할 수 있는 패턴이 마련된다.

政治觀(정치관)

燕巖(연암)이 대부분의 生(생)을 살았던 18世紀(세기)의 李朝(이조)와 T•모어가 살았던 1500年(년)을 前後(전후)한 시기는 두 시대 모두 기존질서가 어떤 의미에서든 각각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어떤 意味(의미)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그 이후의 歷史展開(역사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論述(논술)의 모티브를 체제의 고민으로 잡는다면 李朝後期(이조후기)에 있어서는 儒學十制度(유학십제도)의 고민으로 초점이 맞추어 질 수 있겠다. 왜냐하면 李朝五百年(이조오백년)을 통하여 儒學(유학)은 政治(정치)뿐만 아니라 經濟(경제)•文化(문화)에 이르는 모든 部分(부분)을 支配(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麗末(여말), 朱子學(주자학)이 輸入(수입)된 것은 점점 그 威信(위신)을 잃어가고 있던 佛敎(불교)를 대신하여 담당할 新指導思想(신지도사상)을 採用(채용)할 필요가 있었고 前代儒學(전대유학)의 通經明史(통경명사)•詞章的(사장적) 性格(성격)을 부정하고 窮經行修(궁경행수)의 學(학)을 세우려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自然(자연)히 敎道的(교도적)이고 修養學的(수양학적)인 성격을 띄게 마련이었다. 韓沰劤(한탁근)교수는 이것을 實學(실학)이라 칭하고 있는데 李朝(이조) 後期(후기)에 盛(성)하게 된 實學(실학)도 결국 그러한 朱子學(주자학)의 本域(본역)에로의 回歸(회귀)라는 것이다.

이러한 朱子學(주자학)의 학풍은 性理學(성리학)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性理學(성리학)이 이야말로 李朝史(이조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도 그럴것이 性理學(성리학)이 융성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士禍(사화)형식으로 나타나나 지배층의 분열이었으니 그로부터 출발했던 朋黨(붕당)이라는 정치행태는 성리학과 同(동)궤도를 그리고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士禍(사화)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은 山野(산야)에 파묻혀 心性(심성)의 심층까지 파고들어갔으니 이조 초기의 실천적•도덕적이던 儒學(유학)은 점점 이론적•형이상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得勢(득세)한 御用學派(어용학파)의 學問(학문)은 典儀(전의)와 詞章(사장)에 치우치고 學問(학문)은 官職登龍(관직등용)을 위한 방편이라는 사고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黨爭(당쟁)은 어쩌면 必然的(필연적)이었다. 이론을 좋아하고 賢(현)을 숭상하여 君子小人(군자소인)만을 분별하는 道學(도학)의 政治化(정치화)는 그의 末流(말류)에는 필연적으로 黨(당)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朋黨(붕당)의 惡弊(악폐)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星湖(성호)의 말처럼 官職(관직)은 적은데 任用(임용)할 사람은 많으니 李朝(이조)라는 體制(체제) 자체에 이미 모순이 품어져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士大夫(사대부) 社會(사회)에 朱子學的(주자학적) 權威主義(권위주의)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名分(명분)만이 남아 있음을 燕巖(연암)은 痛感(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燕巖(연암)이 構想(구상)한 것은 德治國家(덕치국가)였다. 도적들을 善導(선도)하여 無人島(무인도)에 도착한 許生(허생)은 비옥한 땅을 경작하면서 財物(재물)에 의해 紛亂(분란)되지 않고 知識(지식)이란 것이 人間(인간)을 구속하지 않는 社會(사회)를 구상했을 것이 四色黨爭(사색당쟁)의 作態(작태)와 現實(현실)을 外面(외면)하고 空理空談(공리공담)만을 일삼던 知識人(지식인)들의 理論(이론) 좋아하는 習性(습성)을 증오했던 燕巖(연암)으로서는 德治社會(덕치사회)에 대한 素朴(소박)한 構想(구상)이었으리라 그리고 도적이란 것이 社會(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빈곤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燕巖(연암)이 社會惡(사회악)에 대한 적극적이고 根本的(근본적)인 關心(관심)을 (비록 理想論(이상론)이긴 했지만) 기울인 것은 그의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과 彌縫策(미봉책)이 아닌 철저한 探究精神(탐구정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士大夫(사대부)’들과 달리 北學派(북학파)는 서울 또는 京畿地方(경기지방)에 살면서 仕宦(사환)을 떠나서는 별다른 생활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뒷전에 소외되어 있던 그들로서는 서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下層民(하층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어떤 同類意識(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처지이면서도 그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加(가)할 수 있는 세련된 智識(지식)과 ‘士(사)’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許生(허생)은 庶民(서민)과 완전히 同化(동화)될 수는 없었다. 그는 역시 ‘士(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庶民(서민)에게로 가장 가까이 接近(접근) 하였으면서도 ‘士(사)’로 되돌아온다는 사실, 여기에 연암의 限界(한계)가 있다. 그는 兩班(양반) 士大夫(사대부)들에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農民(농민)이나 商人(상인)에 대해서도 자기의 염원을 실현시켜 줄 세력으로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는 역시 許生(허생)과 같이 奇才(기재)를 가지고 良心的(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고독하게 숨어 살면서 세상을 개탄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實學者(실학자)도 마찬가지였지만 燕巖(연암)이 改革家(개혁가)가 되기에는 당시의 여건이 너무 폐쇄적이었고 政治的(정치적) 實權(실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李朝(이조)의 고민에 비하면 16世紀(세기) 英國(영국)의 고민은 制度的(제도적) 고민이라기 보다는 어떤 潮流(조류)의 變化(변화)에서 오는 충격이라 할 수 있다. 그 조류변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國民國家(국민국가)의 형성이었다. T•모어는 이 충격을 흡수하려 한 사람이었다.

國民國家(국민국가)의 형성은 바로 봉건적 分權主義(분권주의)와 가톨릭적 보편주의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런데 封建的(봉건적) 分權主義(분권주의)는 그 폐쇄적 경제체제와 함께 가톨릭적 보편주의 배경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世俗國家(세속국가)의 세력이 봉건적인 分權化(분권화)로 약화되어 있는 한 교회세력은 그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高位聖職者(고위성직자)들은 막대한 領地(영지)를 소유하고 治外法權(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봉건적 농촌사회의 경제적 폐쇄성에 잘 적응된 형태였다. 성직자들은 소위 社會機能說(사회기능설)이란 것으로 封建的(봉건적) 보수성을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사회의 여러 계급은 神(신)의 의사이며 神聖(신성)한 계획이므로 각 개인은 그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만족스럽게 일하는 것만이 가장 경건한 의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직적이고 强力(강력)한 국민국가의 출현으로 그 체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百年戰爭(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인하여 封建領主(봉건영주)의 위치는 약화되었고 相對的(상대적)으로 君主(군주)의 위치는 강화되었다. 뿐만아니라 백년전쟁을 통하여 과거 기독교적 統一社會(통일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국민적 愛國心(애국심)이 이제는 君主(군주)를 중심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毛織功業(모직공업)을 통해 致富(치부)한 新興(신흥) 부르조아지(Bourgeoisie)와 君主(군주)와의 결탁이었다. 中央(중앙) 政府(정부)는 國家統一(국가통일)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課稅財源(과세재원)의 案出(안출)과 재정적 지원을 그들에게 의뢰하였고 반면에 大商人(대상인)과 産業家(산업가)들은 도시의 特權(특권)과 規約(규약)에 對抗(대항)하여 싸우며 노동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고 봉건地代(지대)를 철폐하고 외지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배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르조아지 성장으로 새로운 세속적 문화가 발달하게 되어 학문과 사상에 대한 성직자들의 옛 지배권을 위협하였다. 사실 T•모어의 人文主義(인문주의)는 이러한 시민계층의 성장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T•모어의 정치에 대한 견해는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전환기와 흐름을 같이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사회가 神(신)중심에서 인간중심의 사회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T•모어는 그당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절대군주체제를 신봉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代議民主主義者(대의민주주의자자)였다.

그가 헨리 8세에게 죽음을 당한 것은 신앙의 固守(고수)라는 뜻도 있겠으나 專橫(전횡)에 대한 반항, 즉 신념의 고수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유토피아는 도시계획•노동제도•인구문제•여행•기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서 모두 인위적인 體系(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그는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사회를 구성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人間(인간) 中心(중심)의 世俗主義的(세속주의적)인 정치관은 마키아벨리와도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국가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생각하고 그 人民(인민)을 거대한 모자이크의 작은조각 쯤으로 여기는 태도와 ‘자기 몸을 돌보는 것보다 양떼를 더 잘 돌보아 주는 君主(군주)’가 틀릴 뿐이다.

그러므로 T•모어의 관심은 단지 神(신)과 분리된 존재로서의 人間(인간)의 차원을 넘어 正義(정의)와 人道性(인도성)의 문제로 쏠리고 있다. 그러한 점은 형벌제도•노예제도•전재방식•外交觀(외교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같이 燕巖(연암)과 T•모어는 理想(이상)을 통해 社會(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였다. 燕巖(연암)은 종래의 四民(사민)이란 굴레에 묶인 무기력한 인간상이 아닌 현실문제에 좀 더 과감한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예를들면 外交問題(외교문제)에 있어서, 단지 名分(명분)에 사로잡힌 明(명)에 대한 事大(사대)를 배제한 淸(청)과의 적극적인 交流(교류)에 의한 富國策(부국책)을 전개하면서 종래의 虛構的(허구적)인 北伐策(북벌책)을 철저히 통박한다.

그것은 오fot동안 李朝(이조)를 침체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 敎條的(교조적)인 權威主義(권위주의)에 대한 反抗(반항)이기도 하다. T•모어는 인간은 神(신), 運命(운명), 또는 原罪(원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社會構造(사회구조) 속에서 결정되어 진다고 믿었다. 그는 社會惡(사회악)은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대책 즉, 빈민구제, 합리적인 형벌제도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사회교화적인 面(면)에의 참여를 강조한다. 그의 휴머니즘적 宗敎觀(종교관)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來世觀(내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교는 사회의 한 부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經濟觀(경제관)

燕巖(연암)과 T•모어에게 있어서 경제문제는 그들의 政治觀(정치관)까지 지배하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燕巖(연암)은 政府(정부)의 對農民政策(대농민정책)의 무력함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重農主義(중농주의)•重商主義(중상주의)로 富(부)의 증대를 꾀하였고 T•모어는 封建制度體制(봉건제도체제)가 해체되고 資本主義(자본주의)가 싹을 보이던 경제적 奔放期(분방기)에 점점 심화되어가는 빈부의 격차문제를 公同分配論(공동분배론)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두 사람에게 압력을 가한 역사적 배경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고민도 달랐지만 두사람 모두 ‘日態依然(일태의연)한 양반’ 이나 ‘게으른 貴族(귀족)’이 아닌 民衆(민중)과 아픔을 같이 나누었던 근대적 知識人象(지식인상)을 보여준다.

한편 買占賣惜(매점매석) 行爲(행위)나 海外貿易(해외무역), 重農主義(중농주의) 등 富(부)의 創出(창출)에 적극적인 경제관 못지않게 許生(허생)의 도적들에게로의 還元(환원) 즉 一種(일종)의 分配論(분배론)과 富(부)의 分配(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T•모어의 經濟觀(경제관)은 相異(상이)한 歷史的(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많은 示唆(시사)를 남겨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歷史(역사)속에서 파악 되어질 필요가 있다.

麗末(여말)에 實施(실시)되었던 科田法(과전법)은 私田(사전)의 확대를 방지함으로써 旧勢力(구세력)의 物質的(물질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新進士大夫層(신진사대부층)의 지지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政權(정권)이 바뀌어도 농민들의 權益(권익)은 항상 제외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科田法(과전법)은 사실상 세습이 묵인됨으로써 한정된 토지를 둘러싼 분쟁의 씨앗은 이미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해결방법으로 실시된 職田制(직전제)도 農民收奪(농민수탈)이 격심하여지는 결과만을 낳게 되어 결국 壬辰亂(임진란) 以後(이후)에는 폐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제도적 모순 속에서 私田(사전) 확대는 근절될 수가 없었다. 壬辰亂(임진란) 以後(이후)에는 이앙법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貧農層(빈농층)의 발생, 농민층의 自體分解(자체분해), 그리고 官僚的(관료적) 地主(지주)의 成長(성장) 등으로 토지점유의 振幅(진폭)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을 星湖(성호) 李瀷(이익)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富者田連阡陌而貧無立錐之土故富益富貧益貧益矣(부자전연천맥이빈무립추지토고부익부빈익빈익의)’ 致富(치부)한 自作農(자작농)의 高利貸(고리대)가 농민들을 더욱 몰락시켰다. 한편 大同法(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成長(성장)한 貢人(공인) 資本家(자본가)들의 가격조작, 독점횡포 등은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들의 生計(생계)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침체된 現實(현실) 속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하는 士大夫(사대부)들은 이미 生活力(생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星湖(성호)가 육낭중에 科業(과업)과 閥閱(벌열)을 포함시킨것과 소위 四民(사민)이란 굴레에 묶여있던 양반들을 兩班商人論(양반상인론)으로 끌어내려 했던 朴齊家(박제가)의 주장은 그에 대한 반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燕巖(연암)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富(부)를 增大(증대)시킬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農業改良(농업개량)은 물론 종래에 農業(농업)만이 價値創造機能(가치창조기능)을 갖는다는 견해에서 탈피하여 상공업도 단순한 價値移轉(가치이전)이 아니라 새로이 附加價値(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행위라는 것과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家學者(가학자)들이 농업정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상업에 대해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朴齊家(박제가)는 ‘財物(재물)은 샘에 비유된다. 사용하면 가득하고 폐하면 고갈된다. 그런고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치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여 벌써 구매력 창출이란 先進的(선진적)인 경제이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폐전론을 주장하여 반자본주의적•시대역행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星湖(성호)도 상업이 물질을 유통시키는 유익함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문제는 공정하지 못한 富(부)의 분배문제였다. 壬辰亂(임진란) 이후 그런대로 교환경제가 발달하면서 여기에 맞추어 화폐경제도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錢荒(전황)속에서 高利貸資本(고리대자본)은 농민을 더욱 영세화시켰고 탐욕스런 관리들의 황금욕을 자극시켜 농민수탈을 가중시켰다.

星湖(성호)가 均田制(균전제)를, 燕巖(연암)이 限田制(한전제)를, 茶山(다산)이 閭田制(여전제)를 구상한 것은 그에 대한 대책이었다. 또한 화폐는 가치관을 변화시켜 사치와 물질주의를 조장하여 폐전론까지 중하기에 이른다.

許生(허생)이 買占賣惜(매점매석)과 海外貿易(해외무역)을 통해 막대한 致富(치부)를 했으면서도 다시 分配(분배) 문제를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燕巖(연암)의 分身(분신)인 許生(허생)은 전문적인 상인이나 조직적인 행정가가 아니었고 變則的(변칙적)인 方法(방법)을 통해 자기의뜻을 實現(실현)해 보려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士(사)’ 意識(의식)에서 출발하였지만 李朝後期(이조후기) 經濟(경제) 있어서 공정한 분배는 生活力(생활력)의 增大(증대)만큼이나 중대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分配(분배)문제는 봉건경제체제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소위 初期獨占時代(초기독점시대)에 살던 T•모어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T•모어가 資本主義(자본주의)의 융성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던 르네상스의 一員(일원)이면서도 다시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T•모어의 고민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체제로부터 비롯된 빈부의 格差(격차)문제였다. 봉건경제체제는 土地(토지)를 中心(중심)으로한 封建領主(봉건영주)와 領民(영민)과의 폐쇄적 結束(결속)관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애초부터 그 경제적 모순은 잠재되어 있었다.

즉, 봉건제는 미약하나마 게르만的再生産構造(적재생산구조)를 물려받았으므로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商工業(상공업)이 復活(복활)하고 都市(도시)가 발달하면서 農業生活力(농업생활력) 내지 市場(시장) 상대의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農村(농촌) 外部(외부)에서 촉직하게 되었다. 英國(영국)은 1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플랜더지지방으로 羊毛(양모)를 수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14世紀末(세기말)부터 부가가치가 높은 모직물을 수출하면서 급속히 신흥 부르조아지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暴力(폭력)=經濟的(경제적) 能力(능력)’이라는 等式(등식) 下(하)에 농촌에서는 鄕紳層(향신층)(gentry)이, 도시에서는 길드의 잠재적 特權組合員層(특권조합원층)(livery)이 횡포를 부렸다.

이제 農土(농토)는 牧場(목장)으로 바뀌고 농민은 賃金勞動者(임금노동자)로 변했다. 거기에서도 탈락된 사람들은 걸인이나 도적으로 轉落(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中央政府(중앙정부)의 강력한 후원을 업고 있던 鄕紳層(향신층), 그리고 요우맨(Yeoman)들은 國內獨占(국내독점), 國外獨占(국외독점)을 할 수 있었고 소위 자본의 원시적 蓄積(축적)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이미 百年戰爭(백년전쟁)과 黑死病(흑사병)으로 막대한 勞動人口(노동인구)가 감소하자 領主(영주)측은 自救策(자구책)으로 노동력이 적게 드는 羊牧場(양목장)으로 전환시켰다. 엘클로우져(Enclosure)운동은 共同體的(공동체적) 規律(규율)과 慣習(관습)에 의존하고 있던 中世(중세)의 봉건적 農業構造(농업구조)대신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한 이른바 자본주의적 農業構造(농업구조)로의 출발점이었으면서도 下層民(하층민)의 被奪(피탈)이라는 과도기적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李朝後期(이조후기)의 각종 형태의 資本(자본)의 성장과 16세기 영국자본주의의 主役(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요우맨과의 對比(대비)를 생각하게 된다. 資本主義(자본주의)의 기점을 상업자본의 성장기로 잡던, 産業資本(산업자본)의 출현기로 잡던, 그 展開目標地點(전개목표지점)은 産業資本(산업자본)이 형성이었다고 한다면 당시 화폐경제의 발달과 아울러 나타난 농민지주층의 高利貸資本(고리대자본), 官營手工業(관영수공업)이 非正規化(비정규화)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수공업자들, 官力(관력)을 배경으로 독점권을 행사하던 도매상인 자본 등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李朝後期(이조후기)에 본격적인 産業資本(산업자본)이 형성되기에는 지도층의 경제관념이 너무 희박했다.

英國(영국)이 경우에 貴族(귀족)이나, 鄕紳層(향신층)•요우맨등이 경영자층으로 많이 轉身(전신)한것에 비한다면 李朝後期(이조후기)에는 四民(사민)의 구별이 너무 뚜fut했다. 영국이 苛酷(가혹)한 原始的(원시적) 資本(자본)의 蓄積(축적) 時代(시대)를 겪으면서도 産業的(산업적) 中産階級(중산계급)의 발달이 뒤따라 주었기 때문에 앞으로 올 산업 자본주의시대의 莫大(막대)한 생산력을 예상 할 수 있었으나 李朝(이조)에는 그러한 세력이 너무 미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개발 등 산업발전에 대해 근대적인 意識(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北學派(북학파)의 ‘利用厚生(이용후생)’이란 명제는 어떤 指標(지표)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T•모어가 土地資本(토지자본)이 羊牧(양목)이란 형태를 통하여 점점 산업자본화해 가는 가운데 깨어진 균형에 대해 고민하였다면 燕巖(연암)의 고민은 土地資本(토지자본)의 농민 목탈, 都賣商人(도매상인)의 횡포속에서 富(부)의 蓄積(축적)과 분배라는 合一的(합일적)인 문제였다. 연암에게 있어서 富(부)란 계층적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國民的(국민적)인 것이었다. 그는 돈 일만냥의 횡포에 全國(전국)의 경제활동이 정지되는 脆弱(취약)한 경제구조를 벗어나 튼튼한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함을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T•모어의 고민이 一向的(일향적)인 고민이었다면 燕巖(연암)의 고민은 兩向的(양향적)인 고민이었다.

生活觀(생활관)

北學派(북학파)의 학문적 성격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利用厚生(이용후생)’이란 명제는 국민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끔 해야 한다는 점에서 儒學(유학)의 기본정신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사실 그것은 書經(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즉, 水利火力(수리화력)•鑛産(광산)•木材(목재)•土地(토지)•穀物(곡물) 등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민생을 도모하는 것이 善政(선정)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儒學(유학)의 경제이념은 그 목적이 국민을 保養(보양)함에 있다.

의식주 생활을 과히 부족함이 없이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만을 容許(용허)할뿐이요, 그 이외의 ‘致富(치부)’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극적 가치만을 인정하고 적극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燕巖(연암)은 이러한 論理(논리)가 李朝後期(이조후기)의 흐트러진 民生(민생)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自然經濟體制下(자연경제체제하)에서는 적합하였을지 몰라도 이미 時代的(시대적) 요구에 副應(부응)하기에는 부적합했던 것이다. 사실 ‘不患寡而患不均(불환과이환불균)’을 이조후기에 적용한다면 富(부) 대신 貧困(빈곤)을 나누어 갖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에 대한 燕巖(연암)의 비판은 ‘밤낮 책만 읽으며’ 아내 糊口(호구)도 마련하지 못하는 許生(허생)의 패러독스에서도 나타난다. 許生(허생)은 분명히 致富(치부)만을 생각하는 猝富(졸부)는 아니었지만 ‘士(사)’ 意識(의식) 못지않게 理財(이재)에도 밝았고 한 나라에 있어서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許生(허생)이 계속 ‘士(사)’로 남긴했지만 商人(상인)으로의 변모는 ‘士(사)’의 財物觀(재물관)에 획기적인 轉機(전기)가 아닐 수 없다.

T•모어의 경우에는 그것이 역사성만큼이나 哲學性(철학성)을 갖는다. 燕巖(연암)이 豪倣(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T•모어는 禁慾主義者(금욕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상당한 地位(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말털로 짠 修道聖職者(수도성직자)의 內衣(내의)를 입고 베개 대신 통나무를 베고 나무관자 위에서 자는 것과 같은 中世風(중세풍)을 동경했다는 것은 그의 정신세계의 一面(일면)을 마래준다. 그는 유토피아에서 ‘金(금)과 銀(은)에 대해 自然的(자연적)인 가치 이상의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고집스런 禁慾主義者(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쾌락주의자였다. 유토피아人(인)의 삶의 目標(목표)는 쾌락이다. 다만 쾌락중에 가장 우위에 있는 정신적 쾌락은 自然(자연)에 따라 살며 ‘德(덕)의 實踐(실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요, 한편 행복의 가장 기본이 되는 육체적 쾌락은 ‘육체적 均衡(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T• 모어의 행복관은 禁慾主義(금욕주의)와 快樂主義(쾌락주의)의 조화라 할 수 있다. 그는 修道院(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俗世(속세)를 修道院(수도원)으로 여겼다. T•모어는 비록 재산의 공유만큼이나 철학의 공유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 哲學(철학)은 자발적인 개성이 합쳐진 개념이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관용에서 나타나며 快樂觀(쾌락관)에서도 나타난다. 즉 ‘자연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울 것을 요구하고’ 있고 ‘어느 누구도 자연의 사랑을 독점할 만큼 월등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快樂(쾌락)의 자료’를 분배받아 자신의 쾌락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T•모어의 自我(자아)에 대한 개념은 意志(의지)의 자유를 되찾은 小宇宙(소우주)라고 표현할 수 있는 르네상스적 自我(자아)개념을 넘어서 경제적인 次元(차원)에서의 自由(자유)까지 포함하고 있다. 조금 더 발전을 시킨다면 그것은 같은 ‘公有(공유)’의 개념을 물려받은 集産主義(집산주의)의 ‘個人(개인)’과는 대조를 이루면서 근대적 자유개념과 脈(맥)을 잇고 있다.

結語(결어)

본래 儒學(유학)의 理想鄕(이상향)은 人間本位(인간본위)에서 출발하고 기독교에서의 이상향은 神本位(신본위)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하자면 正統儒學(전통유학)은 性善說(성선설)로서 ‘人皆以以爲差舜(인개이이이차순)’이라하여 그 자신의 自覺(자각)과 努力(노력) 여하에 따라서 이 세상에 至善(지선)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에서는 現世(현세)는 神門(신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단계에 불과하며 미래 이상사회란 天口(천구)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儒學精神(유학정신)을 이어 받은 李朝候騎(이조후기)의 實學(실학)은 새삼스레 휴니즘적 自覺(자각)이라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본래 孔孟子(공맹자)의 유학은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에 亂世(난세)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저마다 富國强兵勢力擴張(부국강병세력확장)을 도모하던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인만큼 覇道政治(패도정치)에 대한 비관정신, 人間(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것이 그 사상적 줄기였다. 그러던 것이 後代(후대) 사람들에 의해서 敎條化(교조화)되고 人間(인간)을 구속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燕巖(연암)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敎條化(교조화)와 權威主義化(권위주의화) 속에 갇힌 自我(자아)의 회복이라 할 수 있겠다.

T•모어의 유토피아는 來世中心(내세중심)에서 인간을 되찾고 人間中心(인간중심)으로 만들어진 理想鄕(이상향)이다. 그 속에서 T•모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로 사회를 재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未來(미래)의 展開(전개) 보다는 理想國(이상국)이라는 비판적 機能(기능)을 가진 거울이라고도 하겠다. 燕巖(연암)의 理想鄕(이상향)도 종래에 武陵桃源(무릉도원)을 憧憬(동경)하고 悠悠自適(유유자적)하던 선비들의 夢想的(몽상적) 理想鄕(이상향)이 아니라 철저한 비판성과 社會性(사회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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