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애국이 ‘쇼비니즘’가져오기도

統獨(통독) 재촉한 ‘부르센 샤프트’
1810年代(년대)... 統一(통일)과 自由(자유)가 투쟁목표

  밝은 未來(미래)를 向(향)한 現想(현상)에서 現實(현실)에 대한 欲求不滿(욕구불만)과 더불어 傳統社會(전통사회)의 惡(악) 要素(요소)를 除去(제거)코자 예리하게 그를 비판하는데서 전개되는 것이 學生運動(학생운동)의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現存(현존)秩序(질서)의 確立(확립)과 유지에 있어 직접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 학생인지라 理想(이상)社會(사회)를 건설하려는 강한 의욕에서 그들의 獨自的(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젊음과 知性(지성)의 長點(장점)을 갖는 그들의 행위에는 과격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의 행동은 純粹(순수)하고 義(의)롭고 進步的(진보적)인 것으로 通用(통용)된다.
  近代(근대)獨逸(독일)의 學生運動(학생운동)을 보면 後進性(후진성)의 脫皮(탈피)와 祖國(조국) 近代化(근대화)를 위하여 ‘統(통)과 自由(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反(반)保守(보수), 半封建(반봉건)의 抗爭(항쟁)을 전개한 것이었는데 分立主義(분립주의)下(하)의 國政刷新(국정쇄신)에 학생들의 과감한 抵抗運動(저항운동)이 전개된 시대적 배경 展開過程(전개과정) 그리고 統獨(통독)과 統獨(통독)이후의 정신사조에 미친 同(동)運動(운동)의 영향을 略述(약술)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宗敎紛爭(종교분쟁)에서 發端(발단)한 30年(년) 戰爭(전쟁)의 피폐와 ‘나폴레옹’의 侵略戰爭(침략전쟁)으로 말미암은 獨逸(독일)의 後進性(후진성)은 英佛(영불)의 國勢(국세)에 比(비)해 宿命的(숙명적)인 사실이었다. 즉 ‘르네상스’를 前後(전후)하여 英佛(영불)의 絶對政(절대정)은 이미 國民國家(국민국가)에로의 길을 이른데 反(반)해서 獨逸(독일)의 分立統治(분립통치)는 佛(불)英(영)과 ‘나폴레옹’ 戰爭(전쟁)이 지나간 1810년대까지도 혼란만을 거듭할 뿐 統一獨逸(통일독일)에로의 길은 遼遠(요원)했었다.
  封建制度(봉건제도)에 뿌리박은 分立主義(분립주의), 信仰(신앙)의 分裂(분열)에서 自招(자초)된 宗敎紛爭(종교분쟁), 文化(문화)愛護(애호)만을 표방한 世界市民主義的(세계시민주의적)인 精神思潮(정신사조), 獨墺(독오)가 대립한 帝國(제국)中(중)의 二重(이중)主義(주의), 나폴레옹의 유럽 席捲(석권)으로 말미암은 外勢(외세)의 國政(국정)關與(관여), 등등이 獨逸(독일)이 ‘後進的(후진적)’이 아닐 수 없었던 諸(제)原因(원인)이었다. 帝國(제국)中小(중소)수分立(분립)의 領主(영주)治下(치하)에서 암담한 國政(국정)을 示現(시현)하고 있던 18世紀(세기) 후반의 獨逸(독일)인들은 自由(자유)平等(평등), 博愛(박애)의 口號(구호)를 내건 프랑스 革命(혁명)이 발발하자 이제야 各(각)小(소)部(부)領主(영주)들의 폭정에서 해방되는가 하여 프랑스革命(혁명)의 理念(이념)인 自立主義(자립주의) 및 民主主義(민주주의) 思想(사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佛(불)革(혁) 이후에인 나폴레옹이 유럽諸國(제국)의 專制的(전제적)인 絶對王政(절대왕정)을 止揚(지양)한다는 나폴레옹이 해방戰爭(전쟁)에서 프랑스 위주의 침략戰爭(전쟁)으로 그 戰爭(전쟁)의 성격을 바꾸자 被(피)侵略國(침략국)들은 對(대)佛(불)同盟(동맹)에 제휴하여 나폴레옹 打倒(타도)에 질주하게 되었다. 同(동) 對(대)佛(불)同盟(동맹)戰爭(전쟁)에 참여한 獨逸(독일)의 靑年學生(청년학생)들은 용감하게 奮戰(분전)했었는데 勝戰(승전) 後(후) 유럽에 平和(평화)가 오면 獨逸(독일)과 伊太利(이태리)등의 分立國家(분립국가)는 統一(통일)된 國民國家(국민국가)로써 自由(자유)를 享有(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打倒(타도)한 승전열강이 유럽의 平和(평화)를 요리했다는 ‘우인會議(회의)’의 결과는 獨逸(독일)국민을 너무도 실망시킨 것이었다. 期待(기대)하던 統一(통일)된 國民國家(국민국가)의 형성은커녕 불혁으로 인해서 일깨워진 自由(자유), 民主的(민주적) 사상을 무시하고 우인 會議(회의)는 소위 ‘反動體的(반동체적)’로써 유럽 天地(천지)를 또다시 프랑스 革命(혁명)이전의 舊體制(구체제)로 환원시키는 억압적인 保守制(보수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오랜 戰壓(전압)이 빚어낸 戰後(전후)의 궁핍은 가혹했던 데다가 그들 獨逸(독일)인에게는 憲法(헌법)制定(제정)과 自由(자유)의 享有(향유)도 없이 오직 分立(분립)統治(통치)의 기구가 强化(강화)된 것 뿐이었다.
  이러한 국정의 慘狀(참상)을 寡黙(과묵)할 수 없는데서 시작된 것이 獨逸(독일)學生(학생)들의 領邦(영방)郡主(군주)들에 대한 抵抗運動(저항운동)이었는데 學生(학생)들의 이 自由主義運動(자유주의운동)을 격려해 준 살센 公(공) 아우구우스트의 聲授公(성수공)과 직접적으로 同(동)運動(운동)을 指導(지도)한 몇몇 교수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은 틀림없지만 동운동이 獨逸(독일)인의 國民意識(국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계승적인 示範(시범)役(역)을 과감하게 代行(대행)토록 뒷받침해준 것은 역시 독독의 1810년代(대)가 지니는 다다.
  獨逸(독일)의 學生運動(학생운동)은 ‘예나’ 大學(대학)의 루우텐, 옥켄키이제르 교수 등의 지도하에 귀선학도병 11명이 중심이 되어 ‘부르센샤프트’라는 民族的(민족적) 自由學生聯盟(자유학생연맹)을 結成(결성)하였다.
  同(동)聯盟(연맹)은 그 후 신체의 단련과 祖國愛(조국애)의 民族精神(민족정신)을 鼓吹(고취)한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얀’ 교수指導(지도)하의 體操協會(체조협회)와 提携(제휴)해서 ‘기-센’ ‘할래’ ‘베르린’ ‘부레스라우’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쾨닉스메르크’ ‘마르 부르크’ ‘뤼빙겐’ 등의 新敎(신교)측 大學(대학)에서 同(동)學生組織(학생조직)을 擴大(확대)시켜 나아갔었다.
  그러나 ‘예나 大學(대학)’을 中心(중심)으로 한 同(동)學生結社(학생결사)가 政治性(정치성)을 띄게 된 것은 ‘루터’개혁 3百年(백년)을 追慕(추모)하는 ‘와르트부르크 祝祭(축제)’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獨逸(독일)인 科學者(과학자)로써 로마敎皇(교황)의 權威(권위)에 굴하지 않고 信仰(신앙)의 自由(자유)와 純粹性(순수성)을 주창한 그의 강직한 個性(개성)과 덕성을 흠모, 追悼(추도)한 學生(학생)들은 그들 스스로가 統一祖國(통일조국)을 염원하는 自由兄弟(자유형제)들임을 굳게 다짐하고 反(반)保守(보수), 反(반)自由(자유)에 대한 상징으로써 3百年(백년)전의 ‘루터’가 敎皇(교황)의 破門(파문)장을 燒却(소각)했듯이 그들도 ‘루터’ 式(식)의 反抗(반항)으로 反(반)獨逸(독일)적 非民主的(비민주적)인 ‘책과 물건’(나폴레옹 法典(법전)과 保守主義(보수주의)의 基本書(기본서)였던 ‘할러’의 國家學(국가학)의 復古(복고) 等等(등등)을 비롯하여 封建的(봉건적) 建物(건물)인 프러시아의 槍騎兵(창기병) 朋(붕)衣(의)와 위인들의 軍隊(군대)指揮棒(지휘봉)等等(등등))을 燒却(소각)하고서 統一(통일) 祖國(조국)에로의 氣焰(기염)을 크게 올렸었다.
同(동)祝祭(축제) 이후 ‘부르센샤프트 運動(운동)’은 西南(서남) 獨逸(독일)을 제외한 獨逸(독일)각처에 번져서 政治的(정치적)인 抵抗勢力(저항세력)으로서 露骨化(노골화)하여 過激(과격)한 면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두드러진 예는 1819년 3월 ‘산트’라는 學生(학생)이 ‘와이마르’ 주재 러시아 公館長(공관장)이었던 ‘고체부에’를 殺害(살해)한 事件(사건)이었다. 
  ‘코체부에’는 당시 學生(학생)들로부터 反動(반동)政治(정치)의 窓狗(창구)요, ‘러시아’帝(제)의 密偵(밀정)이라고까지 불리우리 만큼 同(동)學生結社(학생결사)를 誹謗(비방)한 文人(문인)이었다. 그러나 ‘코체부에’ 전건에 대하여 세론은 殺害(살해)범 ‘산트’를 擁護(옹호)하는 傾向(경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바이스바덴’ 지방에서도 反動(반동)政治人(정치인)에 대한 殺害(살해)미수사건이 발생하는 등 過敏派(과민파)學生(학생)들의 現存秩序破壞(현존질서파괴)에 대한 挑戰(도전)이 정면으로 취해지자 反動體制(반동체제)의 首腦(수뇌)들은 黙過(묵과)하지 않았다. 즉 보오의 국왕을 中心(중심)으로 한 獨逸(독일) 각부의 君主(군주)들이 ‘칼스바드’ 에 모여 同(동)學生團體(학생단체)의 解散(해산)과 大學(대학)의 監視(감시)等(등)을 규제했었는데 이를 소위 ‘칼스바드의 結義(결의)’라고 부른다. 換言(환언)하면 ‘펜타르히’에 의한 愛國的(애국적)인 同(동)學生(학생)단의 活動(활동)은 1824년을 期(기)해 완전히 制止(제지)되고 獨逸(독일)의 靑年同盟(청년동맹)은 一段(일단) 해체되었으나 時勢(시세)에 遠背(원배)된 反動體制(반동체제)가 약화됨에 따라 부활하여 1848년의 시민革命(혁명)을 이끄는 先驅的(선구적)인 役割(역할)을 하였다.
  1848년 이래의 ‘프랑크프르트’ 聯邦會議(연방회의)에는 왕년의 ‘부르센샤프트’ 出身(출신)들이 많이 進出(진출)해서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小(소)獨逸國(독일국)의 獨逸(독일)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근대 獨逸(독일)사의 자랑스러운 일면이다.
  즉 상술한 獨逸(독일)의 學生運動(학생운동)은 ‘내셔널리즘’ 이 강하게 작용하여 國民國家(국민국가)의 형성과 祖國(조국)近代化(근대화)를 促進(촉진)한 ‘유럽’의 世紀(세기)와는 合致(합치)되는 하나의 民族的(민족적) 精神運動(정신운동)의 示範(시범)적인 것이었지만, 1870년의 統獨(통독)이후 獨逸(독일)이 곧장 軍國主義的(군국주의적)인 發展(발전)을 거쳐 2차 대전시에는 ‘나치’같은 괴물을 獨逸(독일)역사상에 出現(출현)시켜 ‘國家(국가)至上主義(지상주의)’를 외치게 한 것에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지나친 애국을 부르짖고 나온 ‘부르쉔샤프트’의 과격한 愛國主義(애국주의)가 ‘나치’적 狂亂(광란)을 초래한 위인이었다고 斷定(단정)할 때 統獨(통독) 이후의 ‘부르센샤프트’運動(운동)은 과히 찬양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할 수 있다. 1810年代(년대)에 발족한 동학생단체가 獨逸(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1백50년을 과한 오늘까지도 ‘自由學生聯盟(자유학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엄존하고 있어서 ‘명기와 용맹’을 표방하고 배타적인 경향을 그 특색으로 하는 學生團體(학생단체)로써 통용되고 있는데 지식층이나 一般(일반)의 觀心(관심)을 거의 사지 못하고 있는 現實(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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