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넓은 경험은 이해와 소통의 밑거름”

현재 인천 부평(을) 18대 국회의원이면서 민주당 원내대변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홍영표 동문. 전국노동위원장 및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야당 간사까지 맡아 노동과 환경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살려 불철주야 힘쓰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인자하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 속에 강인함과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옳지 못한 것에 대해 항거하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투쟁해오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국회의원 홍영표 동문

“국회라는 곳이 각종 이해관계자들이 이합집산하는 곳이다 보니 충돌과 갈등이 많이 일어나죠. 계속해서 토론하고 소통하여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365일 중에서 휴일이란 개념이 없다. 하루의 일정은 분마다 정해져 있고, 이를 소화해 내야 한다. 바쁜 와중에도 홍 동문은 현재 우리대학 행정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행정부의 업무 시스템과 행정 지식을 습득하면서 국정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식의 폭을 넓혀놓아야 보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업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릴 적 과수원 집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가세가 기울어 빚더미에 시달리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1년 재수 끝에 1977년 우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홍 동문은 클래식 음악에 빠져 음악감상실을 드나들곤 했는데, 그 곳에서 시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당시 유신체제 하에서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여의도 광장에서 집총을 하고 거리행진을 했었다. 체제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즉각 형무소행이던 이른바 ‘겨울공화국’시절이었다. 홍 동문은  철학과, 불교학과 학생 몇 명을 주축으로 ‘송학사’라는 학생운동조직을 만들었다. 또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들어갔던 탈춤반에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탈춤을 통해 분출해내기도 했다.

단칸방에서 칼잠 자던 노동자 시절
광주민주화 항쟁은 민중이 중심이 되지 않은 채 학생들만의 시위로는 군사독재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홍 동문은 일체의 기득권을 버리고 직접 노동자·농민이 되어 그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분을 감추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건설현장에서 일용잡부로 일하며 노동자의 몸을 만들면서 공장 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노동운동은 생존을 위한 운동이었고, 스스로도 노동자로서 평생을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어요. 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달동네 방 한 칸에 8명이 모여 칼잠을 자면서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시험 때면 공구를 깨끗이 닦아주며 어깨를 두드려주던 동료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며 홍 동문은 회상에 잠겼다.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을 수료한 후, 차체부에 용접공으로 정식 입사했다. 이후 차체부 대의원에 당선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임금교섭이 지체돼 전면파업에 돌입하게 되는데 김우중 회장과의 담판을 통해 타협을 이끌었고 노조의 요구조건을 상당부분 관철시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그 후 홍 동문은 체포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고, 2년 만기 출소 뒤에 노동 운동과 관련하여 두 차례 더 구속되기에 이른다. 출소후 95년 대우자동차에 사무직으로 복직되었다. 영국 런던의 판매 법인에서 6년을 지내며 협상의 기술과 경영의 원리,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그러나 대우사태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퇴사를 해야 했다.

소통을 추구하는 시대의 용접공
노동운동의 한계를 느끼며 보다 실질적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이젠 금속 부품의 용접이 아니라 우리 정치와 국민을 연결하여 교류와 소통의 장을 만드는 시대의 용접공이 되어 보자는 다짐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며 알게 된 유시민, 강영추 등과 함께 개혁당을 만들어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 재정경제부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본부장 등의 요직을 거쳐 2009년 4·29 재보선에서 당선되어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사회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때우고 수리하고 발로 뛰어다녔다. 지난 2011년에는 총 10건의 법안을 대표발의했고, 107건의 법안을 공동발의했다. 대표 법안으로는 정리해고에서 고용불안을 해소하고자 해고에 대한 행정통제 강화, 해고자에 대한 전직지원계획 및 고용유지계획, 정리해고에 관한 단체협약의 활성화 등의 조항을 담은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얼마 전의 한진중공업 문제는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봐요. 수시로 부산에 내려가 노조와 회사 측을 만나 설득했어요. 결국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한 것이 가장 뜻깊고 기억에 남네요.”

각자가 품고 있는 잠재력을 믿어라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으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대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고 했다. “학생들 각자가 품고 있는 잠재력을 믿으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나’의 밖을 바라보던 눈을 잠시 돌려, 내 안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젊을 때에는 따지고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어요. 제 삶을 봐도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웃음) 무엇이든지 경험하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잠시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마련해 꿈의 씨앗을 심고, 자신의 잠재력이 그 씨앗을 싹틔워 어느 순간 꽃을 활짝 피운다는 것이다.
“자신을 관찰했다면, 그 다음에는 세상을, 시대의 흐름을 한번 잘 관찰해보세요. 엄청난 변화가 보일 것입니다. 집단지성이 사회에 흘러넘치게 되었죠.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창의성과 통찰력을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 좌우명이라는 홍영표 동문.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편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고,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그를 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김유경 수습기자 audrey@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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