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나약하게 하는 관습적인 禁忌(금기) 사항들

  放學(방학)을 맞게 됐다. 새벽 안갯길에 문득 만난 사람에게 야릇한 경외감을 느끼던 것처럼 성큼 방학이 우리 앞에 와 있다. 우리는 이 뜻밖의 방학이 주는 ‘야릇함’ 때문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 한 학기를 운행해온 心身(심신)이 성숙의 포만감이나 그로인한 권태로움도 채 감지하기 전에 찾아 온 이 放學(방학)은 우리에게 ‘原色(원색)의 손짓’이란 낭만적인 말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왔다.
  그러나 그 당혹과 묵언의 틈새로 솟아나는 한마디를 우리 중 누군가가 발언해도 좋은 ‘好時節(호시절)’을 우리는 그리워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지내는 한 학기,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를 보호해 왔던 허다한 禁忌(금기)사항들이 우리를 얼마나 나약하게 길들여왔는지. 그러나 정작 그 금기사항들을 우리는 암기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심증은 갖고 있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전통적으로 어떤 유형을 하고 있는지 정작 우리들은 모르고 있다. 그것은 코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여기저기 허다한 함정을 파놓고 있다.
  너무도 어렵다. 어려운 것뿐이어서 우리는 그 어려움들을 아예 기억하지 않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논리를 터득하였다. 그저 우리는 막막한 大海(대해)에 떠있는 기분으로 이 大學生活(대학생활)을 영위해 왔는지 모른다.
  우리가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획일화된 모방이며, 이 모방이 우리의 리포트에 기재되는 日常(일상)이 우리를 하루하루 연명케 하고 있다. 창의력 없는 젊음은 이미 젊음다움이 근거 없이 되고 만다. 강의실의 벽이나 책상 위에 꺼멓게 낙서된 우리의 소중한 모범답안이 슬픈 自畵像(자화상)처럼 우리의 추한 몰골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타락해 버렸다. 그건 우리의 타락에 편승한 금기사항들로 인해 우리는 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준다.
  어쩔 수없이 放學(방학)은 왔다.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인 표현을 빌어서 많은 것들이 우리들 어쩔 수 없게 만든다. 이방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쇠잔한 우리의 기력을 회복할 마지막 힘을 이 무위의 季節(계절)의 무기력을 통해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겐 한 달 보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이 마련되어있다. 등산이나 캠핑도 좋다. 독서도 좋고 學院(학원)에 다녀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은 덥거나 춥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그것들을 더움과 추움과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분명히 받아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학기초가 어제 같은데 벌써 방학이다. 왜 이렇게 빨리 대학의 방학은 다가오는가.
  여름밤 벌레울음으로 우리의 손과 발과 피부를 싱그러운 젊음만이 남아있도록 세척해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분다. 세찬 폭우를 몰고 오는 바람이 분다. 너무도 거세기 때문에, 그 바람소리에 우리의 눈과 귀를 잃어버렸다. 아무 소리도 감지 할 수없는 바람과 빗소리다.
  하기 좋은 말만이 남은 시절이다. 책임감의 귀추가 묘연해지고, 어느 누구도 행방을 알 수 없게 잠적하였다. 깊은 비 안개가 끼었다.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귀기울여보면, 그건 아무런 음성도 될 수 없음을 곧 알게 되고 만다.
  우리는 잠시 이 大學社會(대학사회)를 떠나있게 된다. 밖에서 보는 이 大學(대학)의 모습, 우리는 냉정히 자기 내부에 눈을 보내자. 그리고 결국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인식을 마침내 깨닫고 발돋움하자. 한 달 보름은 자기스스로 발돋움하기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기간 동안 무위의 생활을 해왔고, 그 죄과는 마땅히 이 기간 동안 보상되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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