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겁을 먹은 듯, 달(月(월)) 뒤로 자꾸 쳐져갔다. 그 쳐진 어둠의 발은 J에게로만 집중가세를 하다가 슬그머니 멈춰 섰다.
  재활원 수풀 속에서 밤이슬이 들고 있었다. 그 형체가 불균형한 용기는 J의 몸속에서도 올망졸망 솟아나고 있었는데, 이윽고 터질 곳을 더듬고 있었다. ‘언어가 멈춰진 곳에서 행위가 거부된 손끝으로 나는...’
  J는 뭔가 조그만, 이 세상에서 제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가 뭔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먹는다는 것, 먹을 수 있는 이빨과 그것을 삭여낼 수 있는 침샘과 정결한 두 손으로 소화기관까지 갈수 있게끔 교육된 육신이 얼마나 그 순간을 다행스럽게 했는지.
  J는 절망과 어둠에서 헤어나기 위해 시장골목에서 구운 옥수수 한 자루를 샀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지 않았지만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떨림과 회한이 옥수수 껍질처럼 들러붙어 목의 울대를 자극했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저의 힘으로 공부할래요. 엄마가 자꾸 쪼들린다고 과외비를 낼 수가 없대요.’
  ‘거짓말...’
  J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의 입속으로 방금 뱉은 말들을 다시 주워 삼키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러고도 남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처음 J에게,
  ‘옥수수 좌판이라도 끼고 앉으면 그까짓 2만원은 장만 못할라구요. 제발 연합고사에만 붙게 해주세요.’
  라고 진정어린 애원을 했다. 시장에서 좌판장사를 맘대로 할 수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말은 그녀들이 J에게 보인 최대의 성의였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의 집이 어머니의 말대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나시스型(형)은 없어도, 송아지만한 불독이 지킬 재산과 겨울을 넘긴 야자수가 마당에서 집 키를 재고 있잖은가.
  J는 아이들의 집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스스로 위축되고 있었나를 뼈속 깊이 느껴왔던 터다.
  그러면서도 J는 날마다 그 위세의 허울에 감싸인 아이들을 벗겨 내기 위해 마대조각 같은 그림자를 뒤집어쓰는 행위를 감수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왜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데이트도 않고 우리하고만 있으려고 해요?’
  이것은 아이들이 J에게 들은 최초의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J에게서 학교선생님에게서 받은 인상-그것은 차갑고 위엄에 찬 깔깔한 음성-을 찾으려 했다.
  J는 그것을 제어했다. 차츰 아이들의 관심은 먼 지식의 테두리에서 J의 웃음소리에 끌려오면서 그녀의 행동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K가 입대한 후 그녀가 마음을 둔 곳은 오직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송편속의 깨소금맛처럼 톡 쏘는 재미는 없지만, 가을 山(산)의 깨금맛을 알고 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씁쓰레한 겉껍질 속에 감춰진 산열매는 가끔 짜증의 끝물을 봄 밀물처럼 가슴 가득 끓어오르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그 원시의 맛 때문에 자꾸만 깨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情(정)이었다. 아이들은 J의 혀 속에서 초가을참새처럼 톡톡 튀어 달아나긴 했어도 이제는 그녀에게 입혀진 허수아비를 믿진 않았다. 아이들은 그녀의 眞心(진심)을 알아맞히는데 명수였다.
  아이들은 차츰 J가 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기들만 위해주는가를 알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왜 똑같은 옷만 입고 똑같은 신만 신고 오세요.’
  이렇게 철없이 묻진 않게 되었다. J는 신이 났다. K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늦여름 매미가 서럽도록 귓가가 껄끄럽던 날 아이들이 모여 있는 창밑을 지날 때였다. 목이 길고 눈이 새우처럼 날씬한 아이의 목소리가 시간에 늦은 그녀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된 옛날의 선생님 있잖아. 그 선생님이 우리를 다시 가르치고 싶대. 정말 끝내 주는 여자였잖아. 영화도 같이 가고 스케이트도 타아러 가고... 머플러를 맨 멋진 어깨!’
  그날 J는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닦달을 쳤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뱀혀보다 못한 그녀의 혀끝에서 벗어나 썩은 어리굴젓처럼 J의 바다를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J는 폐의 속 피 끓는 듯하는 음성으로 떳떳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것은 K가 군대 속으로 달아난 것보다 더 쉽게 그녀에게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몰랐던 자신이 저주하고 싶도록 원망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너희들은 내 분신이란 걸 잊어선 안돼!’
  J는 자꾸 그 말을 집어삼키며 급료로 받은 부고장꾸러미와 같은 하얀 봉투를 도로 내어주었다. 그리곤 아이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다시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내심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혼자가 된 자신을 달에 비유하며 옥수수를 한알 한알 씹어 삼켰다. 옥수수가 한알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자신이 키워온 알맹이에 대한 배신감이 그만큼씩 묻어났다.
  왁자지껄 한 떼의 아이들이 그녀의 옷을 스치며 지나갔다. 옆구리에 낀 보조가방이 어김없이 과외공부하고 온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불에 구운 옥수수냄새가 났다.
  불티는 자꾸 그녀의 냄새처럼 주위로 흩어졌다. 그들에게선 그녀자신의 냄새까지 났다. 달 뒤로 쳐진 어둠이 자꾸 아이들을 가리며 멀리 달아났다.
  ‘엄머, 선생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이들이었다. 방안가득 한 떼의 옥수수 구운 냄새.
  은테를 낀 은주, 목이 긴 재의, 뚱뚱이 현미.
  ‘선생님하고 같이 공부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래!?’
  ‘이봐요 선생님, 선생님 옥수수 좋아하죠?’
  아이들은 입이 검어지도록 구운 옥수수를 뜯으며 하모니카를 불어댔다.
  초저녁과는 달리 달이 저만큼 어둠 뒤로 쳐졌을 때, 아이들은 J의 손에서 잠시 놓여나 집으로 갔다.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이 시장옆 목판에서 옥수수를 사는 것을 지켜본 것을 알았으면서도, 자기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만큼 자란 것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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