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시를 쓰는 기본조건

  빛깔로 무한인 너.
  아무리 높은 파도도
  아무리 깊은 골짝도
  네 안에 아늑히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된다.
  너의 장단에 침묵이 춤을 춘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너.
  뭣이고 마다하지 않는 너.
  너를 보다가 내 무슨 유혹에서인지
  너를 짝 찢는 상상을 해본다.
  파열음과 균열.
  뚝뚝 떨어지는 성혈.
  열리는 역사.
  그러나 현실의 눈앞엔 여전히 無垢(무구)의 結晶(결정)
  그 선지빛 울음을 삼키고도 백지.
  백지는 자유의 極地(극지)이다.
  無心(무심)과 無我(무아)의 끝이다.
  나의 마지막 스승이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완벽한 뽄의 萬年雪(만년설)이다.
  백지엔 무수한 원과 원심이 숨어 있다.
  백지엔 영원한 두려움의
  안개가 서려 있다.
  <현대문학 4월호>


  우리의 삶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상식이 그것을 그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두꺼운 상식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도 그 책상 맞은쪽에 있는 벽과 그 벽에 걸려있는 달력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이 책상이고 벽이고 또 달력인 까닭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그날부터 내려쌓은 상식의 먼지가 그것들을 그렇게 규정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총화는 세계를 이룬다. 그러니까 우리들 각자가 머릿속에 그려 갖는 세계 또한 그것을 세계로 있게 하는 두꺼운 상식의 먼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먼지를 털어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의 세계, 즉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새롭게 창조되면 그 세계와 교섭을 통해 형성되게 마련인 우리의 삶도 함께 새로워지는 것이다.
  시인은 세계와 사물이 쓰고 있는 사람이다. 시인이 창조자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가 그렇게 먼지를 털어냄으로써 여태까지는 그것이 그 곳에 묻혀있던 세계와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해주는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와 시인을 바라볼 때 4월의 시단에선 成贊慶(성찬경)의 ‘백지’(現代文學(현대문학))가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알다시피 백지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또 아무 빛깔도 칠해져 있지 않은 말 그대로의 흰 종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첫줄부터 그 백지를 ‘빛깔로 무한인 너./아무리 높은 파도도/아무리 깊은 골짝도/네 일에 아늑히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된다’고 노래한다. 여기서 우리가 쉽게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시인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속에서 무한한 빛깔과 높은 파도와 깊은 골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 눈이 새로 발견해낸 백지의 그 여러 내표적 모습은 여태까지 그 위에 두껍게 내려앉은 상식의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눈을 가진 시인은 또 이 시의 말미를 ‘백지엔 무수한 원과 원심이 숨어있다./백지엔 영원한 두려움의/안개가 서려 있다’고 맺는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온갖 소망과 그 소망 저쪽에 있는 절대의 세계의 그 신비까지도 한 장의 백지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백지를 이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백지의 자리에만 붙박여 있을 리 없다. 그 백지는 그야말로 오묘하고 신비한 그 무엇으로 변신하여 우리 앞에 그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 결과를 언어화하고 있다.
  어디 백지만 그렇다 할 것인가. 아무리 하찮게 생각되는 사물도 그럴 수 있고 사물의 총화인 세계 또한 그럴 수 있다. 변신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 사물, 그 세계 위에 두껍게 쌓여 있는 상식의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각하는 것은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이 함께 갖추어야할 기본 조건이다. 성찬경의 이 시 ‘백지’는 그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란 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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