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소묘

  개찰을 끝낸 사람들이 서둘러 지하도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틈에 끼어 계단을 밟고 있을 때였다.
  ‘창피하지 않다면 얘기 좀 나눕시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지극히 초보적인 유치한 방법이 쓴 웃음을 짓게 했다. 이런 식의 엉뚱한 접근은 묵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거기에 밤차 시각을 엄마 남겨두지 않은 지하도에서 이런 여유를 보일 수 있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도 크게 작용했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을 필요는 없다. 잠깐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전기불이 흐린 탓인지 얼굴 윤곽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내 곁에 바싹 붙어 서서 걷고 있는 남자로 인해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쉽사리 반응을 보였던 조금 전의 경솔한 행동을 뉘우치고 있었다. 일부러 느릿느릿 걷다가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오르기도 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구정이 가까워서인지 차 칸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엄청난 사람의 기세에 눌려 도저히 그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가 자리를 구해 보겠다며 차에서 뛰어내려 앞 칸 쪽으로 달려갔다. 이때다 싶어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둥대고 있는 이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하지만 우선은 피곤하게 될 것 같은 인연을 피하는 게 급하니까. 화물차와 연결된 맨 뒷간 출입구 벽에 기대섰다.
  서서 기차가 움직여 주기를 빌면서.
  불빛이 찬란한 그만큼, 허황한 도시의 밤을 뒤로 하고 기차는 달렸다.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굳혔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저 쪽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을 살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를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 저 정도에서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암만해도 이 구석까지 뒤질 모양이다. 아까 남자는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도 사라져버린 여자를 찾아 나섰다니. 뜻밖이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도 한참이여서 단념한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 집요한 추적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아연했다.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 앞 칸으로 갑시다’
  이쪽 의사를 밝힐 틈도 주지 않았다. 성큼 내 배낭을 집어 들고 앞장섰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렇게 당당히 치러내다니, 반발이 일면서도 별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서 열 시간이 넘는 찻길을 서서 간다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빽빽한 통로를 간신히 지나 남자가 잡아놓은 자리로 왔다. 이인용 좌석에 네 명이 앉으려니 무리였다. 다행히 옆에 앉은 중년 부인이 아기를 무릎위에 앉혀 자리를 넓혀주는 친절을 보였다. 남자는 통로에 서 있었다. 구해놓은 자리는 하나뿐이었는데 나를 찾아 헤맨 것이다. 이상한 충격이 가슴을 후려쳤다. 예사로이 넘겨버릴 수 있는 호의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남자에 대한 도사림으로 감사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얼굴을 유리창 가까이 가져갔다.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집에서 새어나온 빛이 간간히 어둠을 밝혔다. 차가 영주에 멈췄을 때 남자는 앉을 수 있었다. 마주앉은 것을 기회로 말을 건네 올까봐 잔뜩 긴장이 되었다. 입을 꼭 다물고 창 밖에 눈을 주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모를 일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궁금해서 슬그머니 남자를 훔쳐보았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담배를 태우는데 골돌하고 있었다. 남자의 초연한 태도가 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전혀 이쪽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되자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차가 정거장에 멈출 적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행여 남자가 내려야 될 역이 아닌가 해서.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심경의 변화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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