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고자 합니다. 꿈속의 그 아름답던 살인(殺人)에 쫓겨, 그 환상(幻想)을 이루려…. 태양이 눈부셨다는 바닷가의 살인에 쫓겨, 하이얀 육체의 선홍색 피를 그리려…. 그리고 찬 별 아래 언 물길을 따라 계속 달아납니다.
  우리를 달아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스스로 한 발을 내딛기 전에 서둘러 나를 미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달아나지 않기 위해서 달아납니다. 우린 더 이상 말하지 않기 위해 많은 말들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웃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시 우린 계속 가야 합니다.
  ×  ×  ×
  음침한 잿빛날씨에 반쯤 가리운 태양…. 그 태양을 향해 한 무리의 새떼가 비상(飛翔)한다.
  해가 넘어가버린 뒤, 밤이 되기 직전에, 태양이 주위를 불태울 것 같은 강렬함으로 여리고 흐린 장밋빛 빛깔만을 남기면 모든 것은 한순간 투명하게 보이고, 그것들을 뒤로 하고 검고 가는 가지를 뻗고 있는 겨울나무, 새… 이 모든 것의 슬픔에 전율하지만, 그속에 섞인 삶의 욕망은 가장 강하다. 이런 버리기 싫은 겨울 풍경 속에서 꿈같이 노닐다가, 봄이 한 나무에 연둣빛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난 봄을 본다.
  강렬한 태양 속에 뭔가 오만함을 풍기는 여름, 異國(이국)의 오렌지빛, 여름밤 바다, 그리고 가을의 낙엽 밟는 소리, 타는 냄새, 고독함, 겨울, 싸늘함과 차거움 속의 이지(理智), 흰 눈, 굴복하진 않을지언정, 저항하기 힘들게 하는 밤의 기운(氣運)과 색채, 겨울바다, 별… 그러나 봄은? 다른 계절에 비해 뚜렷한 매력을 못 느끼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가로수의 연두 빛을 보고 느지막이 탄성한다. 쬐그만 이파리에 연둣빛 물이 오른 것이 그렇게 이뻐보일 수가 없다.
  귀여운 봄. 그러나 타락한 봄, 시골의 봄이 분홍과 노랑으로 수채화를 그릴 때 우리 도시의 상점가 진열장은 화려해지고 봄바람이 새침해지면서 봄나물이 상큼한 냄새를 풍길 때, 내가 서 있는 곳에선 화장분의 역한 냄새가 풍긴다. 나물 캐는 처녀의 나긋나긋한 치마저고리가 거리를 활보하는 아가씨들의 흐르는 듯한 실크 브라우스로 변해 버렸을 때 우리의 다른 아버지 어머니들이 밭에서 흙을 만지며 벌레를 희롱할 때 백화점 계단을 용감하게 딛고선 빳빳한 지폐를 스스럼없이 세고 있는 손끝들을 보면 난 도망가고 싶어진다.
  우리의 도시가 점점 산업화되면서 기계의 냄새를 풍기면, 우리의 봄은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타락해버린 귀엽고 순진한 여자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나 봄이란 계절의 매력이 어떻건 도시가 산업화가 되건 기계화가 되건, 우린 역시 분홍빛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에 취해 굴복하고 만다. 나중에 가서야 시내에 발을 담그고 , 진달래를 띄우며 막걸리 잔들을 기울이느라 수업을 빠질지언정 지금은 없는 책을 구하느라 청계천 책방을 뒤지는, 오기에 찬 힘 있는 발걸음이 있고, 무르익어 버린 봄에 그 생명의 위안감에 눌려 절망하게 될지언정, 아직은 겨울에 배운 부대끼고자 하는 삶의 욕망이 모두에게  가득 차 있으니, 이렇게 해서 봄은 그 나름으로 하나의 매력을 가지게 되었고, 우린 또한 여린 생명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하나로 모아진 웃음을 보내며 끝없이 가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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