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켤까요?’
  나는 촛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잠시 얼굴에 생기를 띠었으나 이내 침울한 어조로 ‘촛불은 어둠 속에서!’라고 무슨 선전 문귀를 외우듯 말하였다.
  ‘그보다도...’
  그는 호주머니에서 절반쯤 태우다만 담배꽁초를 끄집어들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촛대 옆에 놓아둔 곽성냥을 꺼내왔다. 그에게 불을 붙여주자 그는 뭐라고 혼잣말을 웅얼거렸으나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담배는 땀기라도 배었는지 잘 빨리지 않았다. 그는 목발을 한쪽 벽에 비스듬히 세워 놓으면서
  ‘제길! 선생도 혼자 사시오?’ 하고 물었다. 시커멓게 땟국이 낀 목발은 손으로 움켜잡는 부분만 유난히 반질거렸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하얀 천을 몇 겹 칭칭 감았다가 풀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나의 침묵을 자기의 물음에 대한 시인(是認)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담, 내 얘기를 이해할 수 있겠군요. 난 이 다리를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잃었소. 그것이 한 여자의 환영(幻影)때문이었다면 비웃겠죠? 그로 인해 몇몇 전우들의 목숨도 잃게 되었지만 말이요.’
  그는 담배를 현관 바닥에 부벼 껐다. 하필 그 순간 나에게는 칡넝쿨로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은 산골 소녀의 쑥 내민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전선에서 나는 고국의 친구로부터 온 편지를 한 장 받아보았소. 편지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지만, 나는 나의 생명처럼 귀중히 여겨오던 한 여자의 변심(變心)을 추측해낼 수 있었소. 빌어먹을! 그날 밤 내가 속한 분대(分隊)는 매복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소.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을 타고 적진(敵陣)아래 이르러 사방경계에 임하게 되었소. 아시겠지만 매복의 첫째 유의사항은 노출금지요. 적에게 이쪽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소.’
  그는 목젖을 추슬러서 침을 꼴깍 삼키고는 얘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숨을 죽였고, 시간은 영원히 멎어 있었소. 가끔 바람결에 수목(樹木)의 잎새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스쳐갔소. 바위틈으로 사라지는 배암의 비늘은 달빛을 받아 희끗희끗하게 빛났소. 울창한 삼림(森林)사이에 깔린 침묵과 번뜩이는 비수(匕首)같은 적막함. 나는 점차 미주알이 들락거릴 정도로 초조하였고 가슴은 격한 감정으로 두방망이질 쳤소. 그때 잔뜩 방아쇠를 그러쥔 내 시야에 한 타겟트처럼 불쑥 솟아오른 얼굴이 있었소. 그 여자. 내가 이국(異國)의 싸움터에서 생사(生死)의 문턱을 넘나들 때 쿠션 좋은 침대에서 정사(情事)를 나누고 있었을 그 여자, 그 여자의 눈동자가 나를 마구 비웃고 있었소. 순간 나도 모르게 <탕!>하는 총성이 밤하늘을 갈랐소. 그와 동시에 산 위에서 퍼부어대는 기총소사(機銃掃射)와 쓰러지는 전우의 단발마적인 비명, 잔돌 위를 떼굴떼굴 굴러가는 알철모의 둔탁한 음향, 이어 터진 수류탄의 파편과 밤하늘을 훤히 밝힌 조명탄의 아름다운 불꽃....’
  ... 우리는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다. 식량보급이 끊어진지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너무 굶주려 있었다. 능선 위를 바삐 통과할 때 대부분의 병사들은 다리에 힘이 빠져 거의 기다시피 하였다. 우리는 산곡(山谷)사이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우리의 임무는 일주일 동안 본대(本隊)와의 연락을 끊고 식량보급도 받지 않은 채 정한 시일까지 정한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극한 상황을 극복해가는 강인한 의지의 함양이 우리가 떠맡은 훈련의 목적이었다.
  정찰을 나간 김상병이 한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녀석은 방금 흙에서 캐낸 생고구마를 몇 개 손에 들고 왔다. 녀석의 눈빛은 이상스레 동물적인 숫기로 번뜩였다. 녀석이 분대장에게 ‘능선 너머에 고구마밭이 있습니다. 필시 민가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보고했다. 병사들은 ‘와!’환성을 지르며 개머리판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키 작은 침엽수림의 잎사귀가 사정없이 볼때기를 찔렀다. 우리는 바위를 타고 가시넝쿨 숲을 헤치며 능선을 넘어갔다.
  얼굴을 후려치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정신없이 전진해 나갈 무렵, 나는 김상병이 옆의 박일병에게 뭐라고 속삭이면서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박일병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살그머니 샛길로 빠져 나갔다. 잠시 더 전진해 나가자 이번에는 또 다른 병사가 살며시 샛길로 빠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서너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앞서가던 분대장을 향해 냅다 고함쳤다.
  ‘분대장님!’
  ‘뭐야?’
  ‘후미(後尾)가 너무 쳐졌습니다. 잠깐 쉬어 갑시다,’
  ‘굼벵이같은 자식들! 10분간 휴식!’
  우리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김상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였다. 그는 씨근벌떡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오랜만에 굶주림을 채워볼까 하고 먹이를 찾아 나선 것도 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란 걸 몰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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