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 그것도 어느 때가 지나면 손톱 밑 때처럼 까맣게 되어 버릴 것이고…

  한가윗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으레이 송편을 빚는다. 집안의 아녀자들이 반죽한 덩어리와 고물 주위에 둘러앉아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송편을 빚는데, 이야기마저 넣고 송편을 빚으려는 것이었을까, 집안에 내 또래의 아이가 없어 어쩌다 끼어 앉아 송편을 빚으려 들면 핀잔을 맞기가 일쑤였다. 어디 사내 녀석이 할 일이 없어 그러느냐고.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송편의 이미지는 동대문 시장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곱게 쑥물 빛으로 물들이거나, 혹은 T․V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서구풍 여자의 콧날과 같이 날렵하게 빚은 송편이 아니라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그리고 속에 든 고물이 보이기도 하는 못생긴 송편이었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크고 작음이 조화(?)있게 배열된, 그러한 것이 우리 집안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들어온 대다수의 다른 집안 음식도 그러했으니 아마도 내가 자란 지방이 외부에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면이 강해서였을까.
  아무튼 나는 좋았다. 집안의 들뜬 분위기가, 종갓집 맏며느리인 어머님의 분주한 손놀림이 오랜만에 돌아온 叔父(숙부)나 堂叔(당숙)들의 도회지 풍물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고 시골의 모든 것에 신기해하는, 햇빛과 물때가 묻은 갈색살결의 농촌 아이들과는 다른, 도회의 수돗물에 표백된 내 사촌과 조카들이 좋았다.
  그러한 분위기가 절정을 이루는 것은 한가윗날 아침이다. 진솔은 아니더라도 그해 중에 그래도 가장 아껴두었던 고운 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몇 푼씩 받은 돈을 들고 동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한다. 객지에 나가 출세한 어른들의 자랑이며, 하다못해 오랜만에 들린 친척아이가 귀엽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하며, 그렇게 함께 자랐던 댕기머리 계집아이들은 지금은 시집을 가서 아기 엄마가 되어 버렸고…
  무엇보다도 기억의 場(장)을 수놓고 있는 것은 성묘이다. 원래는 시사라고 해서 따로 吉日(길일)을 잡아 성묘를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관습이었지만, 언제부터였는지 공무원인 숙부들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서인지 한가윗날에 함께 성묘를 하는 새로움이 우리 집안에 생겼다.
  참 아슴푸레하게도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감색 두루마기의 행렬이 눈에 다가온다.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의 옷깃에 스치는 알 수 없는 신선함과 그렇게 커갈 것 같았던 내 幻想(환상).
  그러한 성묘행렬에 으레히 내 차지는 돗자리나 화롯불이 되었다. 한 번은 향을 피우기 위한 화롯불을 엎지르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고 있을 때 멀리서 그냥 빙긋 웃으시기만 하던 등이 구부정한 할아버지. 그 구부정한 할아버지의 등 너머 보이던 노송나무 가지새 보이던 하늘이 그날은 왜 그리 푸르던지, 아직도 그 웃음 노송나무 가지에 묻어 있을까.
  성묘를 한자리씩하고 나면 제주(祭酒)를 돌리는데 나이가 듦에 따라 그러한 제주가 나에게도 돌아오게 되었다. 미성년으로 어른들 앞에서 한두 잔씩 할 수 있는 게 아마 그날뿐이리라. 그리고 약간씩 홍조를 띠게 되더라도 묵인을 해 주고 어느 때던가 過(과)한 제주에 어른들 뵙기가 송구스러워 골방에 들어가 잠을 잔적이 있어 지금도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면 혼자 미소를 짓곤 한다. 이러한 기억도 어느 때가 지나면 손톱 밑의 때처럼 까맣게 될 것이고….
  歸巢(귀소)의 본능이랄까,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간다. 차표를 사기위해 조그만 전쟁을 치루고, 또 돌아올 때도 그러하겠지만–한껏 풍요로운 시골의 인정과, 대 바람 소리 부유하는 들판모습을 맞기란 글쎄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제 철이 들려는 것일까. 아직 귀때기 새파란 나이에 기억에서처럼 그런 풋풋함은 없더라도 한 대여섯 시간 열차를 타고, 이웃 가까이에 살면서도 서로를 모르는 그러한 공기를 벗어나 예스런 풍경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한다.
  짜장 서러워 오는 것은 고향을 두고도 그것이 고향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실향민이 되어가는 우리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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