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검사 기준에 의하면 난 조금 병신

  물론 지금이라고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가슴이 더 아팠다. 다른 계절보다 봄에 더 아픈 이유는 없고, 단지 나를 군대 가지 않게 한 병균이 봄이면 더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징병검사 기준에 의하면 손가락 한두 개 없는 사람들보다 조금 더 병신이라는 얘기다.
  군대 안 가게 되었다고 좋아라하던 계집아이도 이젠 시간 있을 때 마다 약을 먹으라 쨍알거린다. 사실이지 군대 안 가게 돼서 나도 좋다. 그런데 막상 약을 먹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나아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은 원기소 먹듯 약 먹는 시늉도 하긴 한다. 그리고는 용케도 오르락내리락 학교 다닌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만수녀석이 좀 섭섭할 꺼다. 술 한잔 같이 안하고 녀석은 군대로 자기 말마냥 3년간의 외박을 시작해버렸다.
  나는 만수녀석의 애인 되시는 분이 종종 면회도 가고, 편지도 하며 제대하는 날까지 예쁘게 기다려주길 바란다. 그렇지만 만수녀석 애인을 뵈면 말을 못한다. 만수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녀가 예쁘게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믿으며 만수도 씩씩하게 낮고 높은 포복으로 땅바닥 비비고 있음을 짐작한다.
  기다리며 살고 있다. 우리 모두 그러나 때론 성급하다. 그리고 일찍 포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포기하고도 또 우린 기다린다. 포기했다는 것만큼 더 절실한 기다림은 없다.
  참으로 기다릴 줄 모르는 아니 꽤 성급한 계집애를 알고 있다. 내가 군대 안 갈수 있어 좋아라는 계집아이다. 나는 그 계집아이를 사랑하는데 그 아이는 가끔씩 주책이 없기도 하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어머니 몸에서 한달반을 먼저 나와 인큐베이터 속에서 자람으로부터 따라다니는 꼬리표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자기는 바보가 아니면 천재일 텐데 바보라는 사람이 드문 걸 보면 천재임이 확실하단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바보야’하며 혀를 낼름해 보이지만 이내 취소하고 만다. 그 계집아이가 바보인 만큼 나도 바보이고 천재인 만큼 나도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을 천재라고 믿기로 작정했었다. IQ가 같기 때문에.
  그런데 내 천재는 차분히 기다리는 법을 모른다. 성미가 좀 급하다. 그리고 기다리길 참 지루해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천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무인도를 갖고 싶어 한다. 그 계집아이는 그리고 또 나를 가지고 싶어 하기도 한다. 나도 그 계집아이를 가졌으며 나는 둥둥 떠다니는 나를 가졌다.
  수유리 가는 버스 안에서 계집아이는 항상 손가락질되는 2층 기와집을 갖고 싶어 했다. 나는 내겐 좀 사치스럽다고 핑계대기도 하며 사양하지만 결국은 같이 갖고 싶어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방구석에 마련된 몇백원짜리 공간, 때론 특별히 사오천원짜리, 혹은 시장바닥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시끄러운 도서관 구석의 쬐그만 공간뿐이었다. 지금도 계집아이와 내가 지닐 수 있는 것은 둥둥 떠다니는 무인도와 우리, 그리곤 대개 이런 것들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한해선 열심히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참 많은 것들을 게으르게 기다리기만 하다가 공연히 신경질을 내곤 퉤퉤 침이나 뱉을 줄 알았다. 지금은 그전처럼 술을 마구 퍼마시진 않는다. 악독해진 술주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술을 견디질 못하고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젠 조용히 술 마시고 덜컹거리며 집에도 잘 들어간다. 그리고는 꼭 책을 읽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귀여운 버릇도 생겼다. 이젠 술 마시며 퉤퉤 거리지 않을 줄 알면 나는 조금 더 예쁘고 의젓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많은 것들을 성급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줄 알게 될 것이며 때론 씩씩하게 바람을 향해 곧 바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굳이 천재일 필요도 없고, 만수녀석에게도 조금은 덜 미안하며 봄이라고 더 아프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계집아이의 쨍알거림도 더 고맙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내 계집아이와 나랑은 아파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파했으며, 버스정류장 옆의 2층 기와집이 너무 멀다고만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이 너무 적다고 상당히 터무니없는 불평을 해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사람이 나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봄을 맞을 수도 있고, 나는 천재가 아니며 더욱 분명한 것은 그리 바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젠 하얀 홑잠바를 입고 학교에 왔었다. 학교옆 작은 단층집 담장의 철조망 사이로 활짝 핀 개나리가 넘쳐흐르고 있음을 잠바 속으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으로 느꼈다. 세 번째 대학교 2학년을 다니며 어느 2학년 봄보다 예쁜 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음과 넘친 개나리꽃을 볼 수 있게 해준 학교옆 단층집 철조망에 고마움을 느낀다.

겨울엔 왜 나비가 없을까.
그렇게 떨어지지 않고
보이잖는 줄기 끝에 피어
나풀거리던 예쁜 잎사귀
바람이 없이도 나풀거리던 푸른 뫼, 꽃 들판, 아름다운 봄.
나비야, 나비야 내 젊은 목숨아
머리위에 나부끼는 하얀 눈송이.
<유승우의 시>

  이 세상이 지금 내게 얼마나 고마움으로 존재하는지 가끔씩 몰래 하늘 훔쳐보곤 히죽 웃으면 눈물을 찍어내야 하고, 이토록 예쁜 하늘과 아름다운 친구들을 더듬어 더듬어 내가 만질 수 있는 것들 기다림, 바램, 그리고 다가설 수 있는 착함들.
  이제 급하지 않고 슬프지 않게 낯모르는 친구들과도 함께 봄을 가질 수 있으며, 잠바속에 스며드는 봄과 내 계집아이, 공부,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짧은 머리하고 있을 만수녀석과 그의 예쁜 애인, 친구들. 우리 모든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나비 날개짓 같은 예쁜 생각들.
  거짓말처럼 봄은 오고.
  이제 나는 가슴이 더 아플 필요도 없고, 아픈 만큼만 아프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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