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어떤 생활들의 허상에 미쳐, 수업 빼먹는 것이 하나의 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도시락을 들고 극장의 한 구석에 깊숙이 앉아 있던 때가 있었다.
  까마득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시절. 이제 겨우 둘레의 사물에, 그 움직임들에 눈뜨기 시작했던 상태에서 <벤허>의 한 장면이 꼭 우리 골목친구들의 전쟁놀이 마냥 생각 되어 신나했던 일…이젠 <무도회의 수첩>에서의 여주인공의 수첩에 적힌 과거의 인물들의 모습처럼 아련하다.
  무엇 때문에 허구속의 인물과 사건들로만 채워진 것을 보느냐는 질문의 대답을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어느 산악인의 우문현답(?)을 빌려 자만스럽게 얘기했던 모습이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백경>에서의 어느 인텔리 배우의 기막힌 연기처럼 상상되기도 한다. <빠삐용>의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외치는 모습에서 생활의 경직성과 일상성에 대한 반항인양 아니면 어느 그릇된 사회상의 고발인양 느껴져 나의 도시락 하나가 극장의 한구석을 진동시키기도 했다. <희랍인 조르바>의 순박한 한 인간의 우직성과, <제3의 사나이>에서 단지 영사막 속의 성격에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리들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인물들.
  <금지된 장난>에서 어린이들의 천진성이 마치 <소나기>라는 작품의 어린이들과 동시 투영되어 버릴 때, 이제는 옛 얘기가 되어 버린 무성영화시대의 한 희극배우의 연기들이 문학에서의 고전들처럼 받아들여질 때, 그때 어쩌면 예술의 겹치는 부분을 느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면 장면에서의 시각적 효과와 함께 청각으로 들려오는 선율은 영화음악이라는 음악의 한 종류를 이룬다.
  마치 정물화를 보는 듯한 초기 프랑스 흑백영화에서의 사실적 표현은 하나의 미술작품이다.
  예술의 모든 부분을 체득할 수 없고 더욱이 체득할 능력조차 없음을 恨(한)하여 종합예술이라 일컬어지는 한 예술에서 그래도 작으나마 양념정도는 될 수 있는 예술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다면 한 영화광의 변명이 될는지.
  <안나·카테리나>라는 작품을 읽어보았냐는 어느 교수의 질문에 영화로는 보았다고 대답했던 우매성이 이렇듯 한사람의 취미를 외골수로 빠지게 했는지 모른다. <제3의 사나이>에서 끝없이 멀어만 보이던 마지막 장면의 길처럼 그 시작과 종말을 알 수 없는 인생의 한 단면과 연관되어진다면 독단이 될까?
  <길>에서의 한 사나이의 꾐에 빠져 어릿광대로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한 소녀의 입장이나 한 소녀를 그러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야 했던 인간의 좁은 시야가 저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악이 될는지.
  인간의 한계 상황에 대한 절망감과 절망을 탈피하려 하는 실종의 실존주의적 기치 아래 집중 제작되어 극단적 상황하에서의 인간의지의 승리로 나타났던, 70년대 중반의 영화에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여기에는 일종의 르네상스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에 궤도 환원에 대한 자위책으로 강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대중 전달에 의한 상식성에 의존한 상업주의 적인 면이나 교양만을 앞세워 식상감도 또한 나타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사물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다.
  고등교육에 의한 지적인 발달의 능력이 그 선택력과 포용성의 확대에 있다면 현대화를 앞세워 기술의 습득만을 주목표로 간주한듯한 현 실정에서 취미를 통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자세로서 긍정적인 사물의 한 측면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제작의 한 목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예술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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