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그 자리에 섰다. 나의 미행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안경 끼지 않은 극시였지만 상대의 눈이 확대되는 정도는 충분히 감지되었다. 다음 순간 남자는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남자의 놀라움이 큰 걸보니 괜히 놀려주고 싶은 심술이 생겼다. 뛰어가서 남자 앞에 멈춰섰다.
 ‘따라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이젠 좀 천천히 걸으시겠어요.’
  시치미를 뚝 떼고 미소까지 지어가며 말했다. 남자는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볼일이 있소?’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해서 움츠러들 내가 아니다.
 ‘예, 토정비결을 봤는데 이곳에서 귀인을 만날 거래요. 그래서 부랴부랴 밤차를 타고 내려왔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어찌나 크게 웃던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머쓱해져서 남자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웃음이 그쳤다. 부드러운 눈길이 내게 와닿는 것을 느꼈다. 나를 놀라게 했던 눈동자의 살얼음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서 눈이 마주 치는 것을 피했다.
 ‘이런 맹랑한 아가씨 보게나, 겁도 없이 남자 뒤를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따라오다니…’
 ‘남자를 따라온게 아니라 귀인을 찾와왔다니까요’
 ‘아니, 그럼 내가 귀인이란 말이요?’
  남자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떠서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고 좀더 시간을 두고 재봐야 알겠어요.’
 ‘비슷한 데가 있는걸. 나도 여기서 貴女(귀녀)를 만날거라해서 달려왔는데’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잠바에서 손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들고 있던 배낭을 그 손에 쥐어주었다. 남자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이곳이 초행이 아니었다. 군복무 3년을 이 곳 해안 경비초소에서 지냈다 한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그렇게 지겨울 수 가 없었는데 지금은 가끔 꿈에 나타나는 적도 있단다.
  남자의 제안대로 초소가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절이 있었다. 법당 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기에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취미에 맞지 않는다며 법당에 들어서지 않았다. 누구도 우러러보지 않는다는 오만한 말도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다. 좌우간 재미있는 남자다. 법당 문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울부짖는 파도의 외침이 바로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잊혀지고 있던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빨간 사루비아가 화려하게 피어있던 화단 앞에서 맛보았던 슬픔을, 파르스름한 정맥이 배어나 있는 손을, 눈가에 일어나던 섬세한 경련을 귀가 타는 듯한 그날의 사루비아는 슬픔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잊혀지고 있던 기억이란 말은 참담한 마음이 꾸며낸 거짓이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쓰라린 추억인데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는 어부처럼 나는 추억을 건져올리고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남자는 법당 뒤에 있는 나무 등걸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 남자 역시 심상치 않은 사람이다. 그늘이 너무 짙다. 절을 나와 초소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해를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여자의 침묵을 허용해주는 남자는 극히 드물다. 그것만이 아니고 이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희미하게 눈이 날리고 있었다. 순결한 정령이 어지러운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차츰 눈발이 굵어지면서 모든 것을 뒤엎었다. 눈 속에는 아직도 투명한 꿈이 살아있는 것 같아 손을 내밀어 받아들였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고독했던 유년에서부터 절망적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띄엄 띄엄 내뱉는 말에서 한 남자의 슬픈 여정이 되살아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괴로움을 앓고 있을 때 진실로 만나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소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절망적인 시퍼런 바다 물은 옅어 질 줄 모르고 있다. 머리 위에서 놀고있는 바람은 비탄에 젖어 아우성치고 있었다. 추위는 접어두고 마지막 해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 이제 막 별 한 개가 솟아나고 있었다. 또 하나의 고독한 별이 그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차거운 손을 붙잡고 미끄러운 언덕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동네 어귀에서 뒤돌아본 헐벗은 들판에는 달빛이 출렁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밤을 껴안았다.
  눈을 떴다. 새벽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유리창에는 꽃처럼 성에가 피어 있었다. ‘호’ 하고 하얀 입김을 불어 성에를 지웠다. 눈 덮인 들판에는 가벼운 바람이 불어 은가루를 흩날리고있었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마을은 적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있었다. 남자는 아직 깨지 않았다. 잠든 모습에서 어린애같은 천진스러움을 발견했다.
  미래에 있어 확실한 것은 죽음 뿐이다. 죽음 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은 사람이 바로 저 남자라는 것은 경이로웠다.
  버림받고 자라난 어린시절 남자는 잠이 깨면 언제나 울었단다. 모친 상실이 가져온 허전함 때문에. 유년기에 지워진 불행한 그림자는 일생동안 붙어다닌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남자의 말은 옳다. 새벽의 그 날의 일기를 알려주듯이 인간의 유년은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남자는 사랑받고 자라난 다복한 유년을 보냈다고 나를 점쳤다. 그렇지만 나의 유년도 무지개 빛 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때부터 지상의 생에 대한 방황은 싹트고 있었다.
  빈터에서 몰려오고 있는 바람이 가만히 유리창을 흔들었다.
  조용히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머리맡에 목도리를 남겨두었다. 그것이 겨울의 추위를 막는데 도움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음은 이제 까마득히 멀어졌다.
  돌로 개울의 얼음장을 깨고 머리를 담궜다. 손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 세포 구석구석 끼어있는 먼지를 떨궈낼 듯이 정성을 다하여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물 속에 담구고 참을 수 있는 한도까지 버티었다. 머리 속이 화안해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문득 남자를 생각했다. 지금쯤은 깨었으리라. 다 큰 어른이 된 후에도 잠이 깨면 괴로울까? 울지는 않겠지만 마음은 무겁겠지.
  바람에 묻어오는 신선한 비누 향내가 청결했다. 새로운 힘이 내부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순간 돌 사이에나 떨어뜨린 내 웃음을 이제는 어두움의 저쪽
  보이지 않는 시간에 까지
  모닥불 연기처럼 살리며 살리며, 좋은 시를 잊고 있었다.
  끝없이 뻗어있는 길을 걸으면서 나는 비로소 막막한 해방감과 만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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