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사실이 아닌 관계를 통해 이해하는 역사에서의 객관성

‘역사란 무엇일까’라는 어쩌면 진부하고 상투적이기까지 한 명제에 대해 가장 흔히 듣는 위의 답변은 영국의 역사가 E. H. Carr의 것이다. 1892년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Carr는 오랫동안 영국 외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관료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1953년 이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봉직해 온 그는 영국의 BBC방송에서 해 온 강연과 대학에서의 특강 등의 내용을 추려 1960년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출간하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역사의 본질을 묻는 역사철학의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흔히들 역사철학 하면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용어와 사변적인 내용들을 떠올리는 데 비해, 그는 기존의 그것들과는 아주 다른 평이한 내용들을 통해 역사이론을 전개한다.
Carr는 과거 중심적 역사관과 현재 중심적 역사관의 대립 속에서 스스로를 중간 입장에 두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고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입각해 사실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신이 만들어낸 사실에 기초하여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한다. “역사가가 역사를 정확히 썼다고 칭찬함은, 건축가가 잘 말린 목재나 잘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해 건물을 잘 지었다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위의 내용들을 잘 설명해 준다.
이 점에서 역사가의 역할과 역사 사실과의 상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이다. 또 그렇기에 역사 사실에 기초하지 못한 역사가는 무의미한 존재이며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 없는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그의 입장은 타당성을 지닌다. 결국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간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자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그의 이론은 이론과 실제, 이상과 현실의 양 극단들이 가지는 과격성들을 교묘히 피해가는 동시에 절묘하고도 탁월한 균형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 책에서 우리는 Carr의 역사적 객관성에 대한 명확하고도 분명한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바, 소위 절대적인 ‘객관적 역사성’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부정이다. 그는 역사란, 인과론에 못지않게 우연에 의해서도 지배되는 것이라고 단언하며, 나아가 역사가 스스로를 불편부당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체를 조소한다. 그가 바라보는 역사가는 늘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산물임과 동시에, 의식적 · 무의식적 대변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에 대한 해석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결국, Carr에게 있어서 역사란 불가피하게 주관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주관주의적 역사 연구에서 확보되는 객관성’이란 교묘한 언어를 통해 반전을 꾀하고 있다. 사실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인식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는 한, 역사의 상대성에 대한 회의주의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역사에서의 객관성을 사실의 객관성이 아닌 관계의 객관성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주장이 소위 ‘불변하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는 명백히 다름을 의미하며, 역사 속에서의 객관성은 역사에서의 간 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바탕으로 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Carr의 역사관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주장은 역사가에 의한 일방적 도덕 기준과 가치 판단에 대한 경고이다. 그는 역사가가 초 역사적, 도덕적 기준을 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Carr에 의하면, 역사가의 역할은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통해서 사회 진보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재판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강 택 구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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