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 部體制 硏究―成立과 變遷, 運營樣相을 중심으로―

【目 次】


Ⅰ. 緖 論 1


Ⅱ. 部 관련 사료의 이해 방향 5


Ⅲ. 4部體制의 성립 9


Ⅳ. 방위명 5部의 성립 과정 16


Ⅴ. 정국 운영의 추이와 部의 성격 변화 23
1. 정국 운영의 추이 23
2. 部의 성격 변화 30


Ⅵ. 結 論 34



參 考 文 獻 36
Ⅰ. 緖 論

일반적으로 百濟가 近肖古王代에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 성립과정에 있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한 부분이 많다. 물론 古尒王代를 획기로 삼아 이 시기부터를 고대국가 성립의 단계로 보는 것이 통설화 되어있지만, 백제의 국가적 성장과정과 정치구조의 변화에 대한 계기적 이해는 부족한 형편이다. 그것은 물론 이 분야의 기초사료가 되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이하 제기로 약칭함)의 초기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에 제1의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古尒王이나 近肖古王 등 특정한 王代에 집중하여 연구를 행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기 초기기록에 대한 연구자들 간의 좁혀지지 않는 상이한 시각도 구체적 문제에 있어 합리적 이해를 도모하는데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百濟에서의 部의 성립과 변화 과정을 통해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계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적절한 사료비판 과정만 거친다면 몇 안 되는 백제의 部 관련 기사를 통해서도 백제 초기의 국가구조와 정치구조의 변화상을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高句麗와 新羅에서는 소위 部體制라는 것이 고대국가체제 완성기 이전의 국가구조와 정치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百濟史에서도 역시 部體制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지만, 백제의 경우는 지방통치제도라는 차원에서 논하는 경우도 많아 용어의 개념에 혼란이 따르고 있다. 사실 백제의 部는 처음부터 方位名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백제 전역을 대상으로 구획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고유명 部가 존재한 고구려나 신라와는 차이가 있다. 제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백제의 부는 고구려나 신라에서와 같은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보다는 행정구획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될 소지가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관련 사료가 극히 부족할 뿐만 아니라, 部의 설치 기사가 나타나는 溫祚王代의 기록에 후대 사실의 소급․부회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결국 제기 초기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부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점은 그동안의 연구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백제의 部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今西龍은 제기 초기기록의 부 관련 기록을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계기적 성장 과정에 대한 파악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제기 近肖古王 이전의 기록을 불신하려는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의 경향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 이와 같은 극단적 불신론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今西龍 이후 백제 초기의 부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에서 언급한 첫 연구자는 金哲埈이었다. 그는 溫祚王代의 4部 설치 기사를 수도 지역까지를 합쳐 5部制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그것이 近肖古王代 일대 팽창을 본 뒤에도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백제 초기의 전국 행정구역으로서의 이 4部制가 泗沘時代의 5方制에 연결된다고 보았다. 온조왕대의 4부 설치 기사를 5부의 성립으로 파악한 그의 견해는 현재에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漢城時代 5부가 泗沘時代의 5方制로 연결되었다고 본 것도 특색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견해는 5부의 성립과정이라든가 구체적 성격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部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盧泰敦에 의해서였다. 이른바 ‘部體制論’을 주창한 그는 단위정치체적인 성격을 갖는 部가 고이왕대에 성립되었다고 보고, 그것이 熊津 천도 이후에 부족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고이왕대에 단위정치체로서의 부가 성립되었다고 본 그의 견해는 이후의 백제 部體制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부체제론은 高句麗와 新羅를 중심으로 논지가 전개되었기 때문에 백제의 경우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부체제론을 받아들여 백제의 部體制를 적극적으로 언급한 이는 盧重國이다. 그는 백제가 目支國을 비롯한 제기 초기기록에 나오는 諸 세력집단을 편제하여 고구려와 같은 5部體制를 성립시켰다고 보았는데, 구체적 성립 시기는 고이왕 후반기로 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정치 운영은 고구려의 諸加會議 등을 고려하여 ‘諸率會議’라는 회의체를 설정하고, 그것이 중요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 견해는 백제 부체제의 성립과정과 운영 양상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언급을 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되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部體制論에 입각하여 백제의 부에 대해 연구한 성과로는 李宇泰와 朱甫暾의 論考가 있다. 신라와의 비교를 통해 백제 부체제를 고찰한 李宇泰는 백제의 부가 신라의 6부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전국을 단위로 편제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부의 숫자도 중앙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4부로 파악하였다. 朱甫暾도 李宇泰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부가 특정 지역만을 대상으로 설치되었다고 보았는데, 초기의 3부체제에서 고이왕대에는 5부체제로, 다시 근초고왕대에는 2부중심체제로 변화하여 갔다고 파악한데 특색이 있다. 또한 5佐平을 5부체제 단계의 部長들에게 지급한 칭호로 보는 것도 독특한 견해이다. 이 외에 문동석, 김영심 등이 백제 초기의 부를 단위정치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盧泰敦 이후의 부체제론에 입각한 이들 연구는 백제 초기의 부가 고구려나 신라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은 三國 초기의 국가구조와 정치구조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대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은 지역별, 시대별로 일정한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분명 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고구려나 신라의 부체제 연구 성과에 비해 아직은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부체제의 성립 과정을 좀더 치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으며, 그 운영 양상에 대한 연구도 좀더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초기의 부를 고구려나 신라의 부와 유사한 성격의 것으로 보려는 이상의 견해들과는 달리, 부가 처음 설치될 때부터 중앙에 의한 지방 통제의 기능을 하였다는 견해들이 백제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선 朴賢淑은 제기 초기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에서 온조왕대에 지방통치구획으로서의 方位名 部가 전국을 단위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 李鎔彬이나 최범호에게서도 비슷하게 되풀이되었다. 金起燮은 부의 성립시기를 4세기로 보았지만, 그것이 지방통제의 수단으로 처음부터 방위명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朴賢淑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양기석은 백제가 2세기 후반 이전에 방위명 部制를 채용했다고 보았는데, 역시 그 성격을 지방구획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 강종원은 한성 초기부터 지방 행정조직으로서의 부가 성립했다고 보았는데, 다만 그 숫자는 李宇泰의 견해를 따라 4部로 보았고, 文安植 역시 백제의 부를 지방통치 방식으로 보면서 고이왕대를 그 성립 시기로 보았다.
이상의 견해들은 비록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존재하지만, 백제의 부가 방위명으로만 등장하는 점에 주목하여 그것의 지방통치조직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제기에 방위명으로만 부명이 등장한다고 하여 과연 그것을 그대로 믿어도 될지는 의문이다. 후대의 윤색에 의해 고유 부명이 모두 방위명으로 바뀌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기 초기기록에서 부명을 관칭한 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성씨를 가지고 등장하는데, 이들 성씨 집단이 애초부터 溫祚․沸流 집단과 함께 남하한 것이 아닌 이상은 한동안 백제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검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의 部는 그 성립시기, 성격, 성립 지역, 고유명 부의 존재여부, 부의 숫자 등에 있어 어느 것 하나 일치된 견해가 도출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부의 성격에 관해서는 부체제론자들과 지방편제의 방식으로 보는 논자들 사이에 극명한 의견의 대립이 있는 실정이다. 이는 사료의 절대적 부족과 더불어 연구자들 간의 시각 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문제점은 朱甫暾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부의 성립과 변천과정에 대한 계기적 파악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이는 온조왕대의 4부 설치 기사를 어느 특정한 시대의 사실로 파악한 다음, 부와 관련된 기사를 모두 그 시대의 사실로 파악하려는 이해방식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해방식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제기 고이왕기에는 佐平을 비롯한 16官等의 설치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모두 고이왕대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左․右輔를 대신할만한 보다 분화된 관직․관등체계가 이 때에 마련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체제가 고이왕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면서 부 관련 기록을 모두 이 무렵의 사실로 이해해버리면, 고이왕대 이후에도 여전히 좌․우보제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제기에는 部名을 冠稱하고 있는 인물들의 많은 수가 좌․우보에 임명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의 성립 시기를 일부 논자들의 주장처럼 온조왕대의 사실로 그대로 믿을 수도 없다. 건국 초의 백제가 그렇게 쉽게 집권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部名 冠稱이 사라지는 고이왕대에 백제의 중앙집권화가 완료되는 것이 되는데, 이는 百濟史에 대한 일반적 인식과도 상충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온조왕대의 4부 설치 기사를 후대 사실의 소급으로 보되, 이후에 등장하는 부 관련 기사의 기년은 대체로 인정하는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제기 초기 기록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부의 성립과 변화 과정을 계기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 결과 백제에서도 高句麗나 新羅와 유사한 部體制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또한 부체제 하에서의 정국운영의 동향과 부의 성격 변화에 따른 지방통치 조직의 성립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병행되어야 백제 부체제의 실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남은 물론, 중앙집권체제의 완성 과정도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연구 방법은 제기의 초기기록을 절충론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에 선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재구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구상한 틀 안에 필요한 사료들만을 임의적으로 배치해 넣는다면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제기의 초기기록에 대한 명확한 이해 기준이 제시된 것이 없어 연구를 수행하는데 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 역시 아직까지 완벽한 이해의 기준을 마련하지는 못 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일관성을 가지고 파악해보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본고에서는 일단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것들과 필자의 생각을 종합하여 제기 초기기록의 이해방향에 대해 간략하게 그 요점만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연구를 진행하도록 할 것이다.
Ⅱ. 部 관련 사료의 이해 방향

우선 部에 관련된 사료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현재까지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제기 초기 기록의 이해 기준을 간략히 그 요점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제기의 近肖古王代 이전 기록은 백제 당시에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역사서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실들의 기년이 소급되어 기록되었다. 따라서 근초고왕대 이전의 기록은 당대의 사실과 후대의 사실을 구분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2) 이중 溫祚王代의 영역 확장과 관련된 기사들은 3세기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으며,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3) 左․右輔와 관련된 기사들은 古尒王代의 佐平制 실시를 감안하면―비록 좌평제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고이왕대에 보다 분화된 관등․관직체계가 마련되었을 것은 확실하므로―대체로 그 기년을 신빙하여 3세기 중엽 이전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이와 관련하여 靺鞨과의 전투기사는 아직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이 좌․우보에 임명되는 것을 볼 때, 좌․우보와 관련하여 나오는 말갈 관련 기사는 대체로 그 기년을 신빙할 수 있다.
5) 또한 部에 관련된 기사들은, 부명을 冠稱한 인물들이 좌․우보에 임명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 백제의 성장과정을 계기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그 기년을 신빙할 수 있다.
6) 단, 백제 초기 왕들의 재위연수가 지나치게 길다는 점을 생각하면, 3)~5)의 기준과 관련된 기사들의 기년도 액면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고, 백제 건국에서 3세기까지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7) 고이왕대까지 보이는 新羅와의 전투기사는 양국이 국경을 접하게 된 이후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독자적 사료가 아닌 新羅本紀의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 그 밖의 기사들의 기년과 내용은 그 당시의 정세나 국가발전 상황 등을 고려하여 인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것이 현재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제기 초기기록의 이해 기준이다. 이 기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별고를 통해 다루고자 하며, 본고에서는 우선 주로 1)~6)의 기준에 의거, 漢城時代 百濟에서의 부의 성립과 그 성격의 변화과정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제기에서 한성시대 동안 부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 옮겨 보도록 하자.

A-① 溫祚王 31년(13) 春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A-② 溫祚王 33년(15)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A-③ 溫祚王 41년(23)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A-④ 多婁王 3년(30) 冬十月 東部屹于與靺鞨 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A-⑤ 多婁王 7년(34)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A-⑥ 多婁王 10년(37)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A-⑦ 多婁王 11년(38)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A-⑧ 多婁王 29년(56)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A-⑨ 肖古王 45년(210)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A-⑩ 肖古王 48년(213) 秋七月 西部人茴會獲白鹿獻之 王以爲瑞 賜穀一百石
A-⑪ 肖古王 49년(214)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A-⑫ 腆支王 13년(417)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A-⑬ 毗有王 2년(428) 春二月 王巡撫四部 賜貧乏穀有差

이상이 한성시대 동안 보이는 部 관련 사료의 전부이다. 전체 13개밖에 안되는 매우 빈약한 수인데, 그 중 11개가 백제 초기인 肖古王代까지의 기록에 집중되어 있어 성립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서는 그나마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면 앞에서 필자가 제시했던 제기의 이해기준을 적용하여 이 기사들의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먼저 A-①과 ②부터 살펴보자. 이 기사들은 백제에서의 부가 국가에 의해서 전국을 대상으로 구획되었고, 그 명칭은 처음부터 방위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논자는 온조왕대부터 백제가 전국을 대상으로 지방통치구획으로서의 부를 설치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기사는 이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사는 온조왕 13년의 강역획정 기사, 26․27년의 馬韓 병합 기사, 36년의 古沙夫里城 축성 기사 등과 관련되는 영역관계 기사로서, 영역확장과 관련된 다른 기사들과 유기적으로 연관지어 파악해야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자는 온조왕대의 영역 확장과 관련된 기사들은 3세기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으며,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었을 것이란 전제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백제의 마한 정복과정에 대해 고찰하면서 온조왕 13년의 강역획정 기사를 고이왕대의 사실로, 동왕 26․27년의 마한 병합 기사를 比流王代의 사실로 각각 파악한 바 있다. 部의 설치가 마한 병합 이후인 점을 생각한다면 결국 A-①과 ②는 온조왕대의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수 없으며, 대략 비류왕에서 근초고왕 사이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 제기에는 건국 초부터 백제가 方位名의 부를 설치하여 정연한 지방지배 체제를 수립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4세기 방위명 부의 성립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기사들도 후대 사실의 소급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필자는 左․右輔 관련 기사 및 부와 관련된 기사는 대체로 그 기년을 신빙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하였다. 비록 이 기사들의 부가 방위명을 칭하고 있지만, 이는 A-①과 ②에서 백제의 부가 처음부터 방위명으로 성립된 것처럼 기술하였기 때문에 윤색된 결과이며, 기사의 내용 자체는 후대의 사실로 볼만한 요소가 없다. 이것은 비록 부라는 명칭은 사용이 안 되었을 수 있지만, 4세기 이전에도 부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백제에 존재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전의 부와 4세기 무렵의 방위명 부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도 의미한다. 3세기까지의 부는 방위명을 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지방통치를 위한 행정구획적 기능을 수행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A-③부터 ⑪까지 보이는 방위명 부는 당시의 명칭과 상관없이 백제 주변의 여러 세력들을 방위 관념에 따라 소급하여 이름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종래에는 A-①과 ②에서 4부가 설치되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중앙부를 더하여 部體制가 처음 성립할 당시부터 5부체제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부의 성립을 논하면서 5라는 숫자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A-①과 ②는 4세기의 사실을 소급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4세기에 부의 성격이 변하여 새롭게 방위명의 부로 재편될 때에는 5부로 편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사실을 그 이전 시기까지 소급하여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제기의 초기 관련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여 백제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부가 성립하는 과정을 계기적으로 파악한다면 처음부터 5부로 성립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초고왕대까지의 부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면 총 11건 중에 4건이 축성 및 靺鞨과의 전투와 관련된 기사들이며, 부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한 A-⑧부터(후술) ⑪까지의 기사 4건 중에는 3건이 이러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즉, 중앙에 대한 각 부의 역할이 주로 군사적인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부를 지방편제의 방식으로 보는 논자들은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부를 군사․행정의 단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체제 단계에서 각 부가 대외 교섭권을 중앙에 박탈당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점을 근거로 백제의 부체제를 지방편제의 방식으로 볼 수는 없다. 이는 腆支王代에 해당하는 A-⑫의 축성 기사와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중앙집권화가 이룩된 전지왕대에는 한 개의 부가 아닌 두 개의 부에서 동시에 인력을 동원하며, 중앙에서 파견한 兵官佐平이 역사를 감독하고 있다. 그러나 부체제 단계의 기사에서는 한 개의 부 안에서만 축성 사업이 이루어지고, 중앙 관리의 파견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축성 사업이 비록 중앙에 의해 주도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개별 부와의 일정한 타협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부가 실질적으로 역사를 관리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백제에서 방위명 부가 설치된 4세기 이후에나 부가 지방편제의 단위로 轉化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됐든 백제의 몇 안 되는 部 관련 기사 중에 축성이나 전쟁과 관련된 기사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부가 차지하는 군사적 비중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건국 초부터 말갈의 침략에 시달렸으며,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주변 집단과 연맹을 맺어나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 있어서의 이러한 부의 군사적 중요성은 자연 군사적 역량에 따른 각 부의 우열을 가져오게 하였다. 말갈과 접촉이 많았던 東部나 北部의 경우 초기부터 기록에 자주 등장하지만, 외세와 직접 군사적 접촉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西部의 경우는 사료 상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각 부는 그들의 군사적 역량에 따라 백제 국가 내에서의 위상을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특히 두드러진 집단이 북부, 즉 眞氏 집단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말갈과 투쟁하는 속에서 계속적으로 역량을 강화시켜나갔으며, 그 결과 백제 지배체제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진씨 세력의 대두는 크게 본다면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지만, 이들을 완전히 제압할 만큼의 권력 집중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들과 결합하는 것이 왕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Ⅲ. 4部體制의 성립

그러면 이제 部의 성립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제기의 左․右輔 임명기사 및 각 성씨 집단들의 활동에 관한 기사들과, 각종 영역에 관련된 기사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사료 A와 중복되는 기사가 많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관련 기사들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B-① 溫祚王 2년(B.C. 17)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B-② 溫祚王 41년(23)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B-③ 多婁王 3년(30) 冬十月 東部屹于與靺鞨 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B-④ 多婁王 4년(31) 秋八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B-⑤ 多婁王 7년(34)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B-⑥ 多婁王 10년(37)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B-⑦ 多婁王 21년(48)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B-⑧ 多婁王 29년(56)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B-⑨ 肖古王 45년(210)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B-⑩ 肖古王 48년(213) 秋七月 西部人茴會獲白鹿獻之 王以爲瑞 賜穀一百石
B-⑪ 肖古王 49년(214)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우선 盧重國은 위 사료에서 각각의 성씨 집단들이 우보나 좌보에 임명되는 것을 이전의 독립적인 유력세력들이 百濟聯盟體내로 편입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임명 순차는 그들 세력이 백제연맹체내에 편입되는 시차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이 임명되는 순서가 백제와 관계를 맺은 시차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단순하게 그들이 바로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해 이하에서 상세히 살펴보면서 백제에서의 부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건국 초인 溫祚王 2년에 왕의 族父가 右輔에 임명되었다가 이후에는 모두 동․북부의 인물들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건국 초에는 주변 세력과 연결을 가지지 못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온조왕 41년에 乙音이 죽자 北部의 解婁를 우보에 임명하였다. 해루는 원래 扶餘人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解氏 역시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과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남하한 집단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多婁王 7년에는 해루가 죽자 靺鞨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東部의 屹于가 우보가 되었고, 동왕 10년에는 흘우를 左輔로 변경시키고 북부의 眞會를 우보로 삼았다.
우보나 좌보는 을음에게 兵馬事를 맡긴 점으로 보나, 말갈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을 임명하는 것으로 보나 군사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다루왕 29년조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1세기 중반에서 2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좌․우보는 물론이고 부와 관련된 기사가 단 한 건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2세기 무렵의 기사들이 1세기 전반으로 연대가 소급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백제 초기 왕들의 재위 연수가 지나치게 길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상정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건국 연대와도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섣부른 단정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하며, B-①~⑧의 기년은 1세기에서 2세기 말에 이르는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두고자 한다.
백제는 건국 초부터 말갈의 침입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 세력에 대한 방어는 국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眞氏나 屹氏 등의 집단이 백제의 외곽에서 말갈을 막아준다면 백제는 그만큼 국가의 군사력을 절감할 수 있으며, 내부적인 발전에 보다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말갈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흘우에게 상을 내리고 우보로 삼았던 것이다. 즉, 이러한 조치는 흘씨 세력과 연합하여 말갈에 공동으로 대처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우보 임명 기사들이 건국 초에 집중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당시의 좌․우보를 중앙의 관직으로는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건국 초의 백제가 주변 세력의 유력자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일 만큼 집권력이 강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흘씨나 진씨에게 좌․우보를 준 것은 그들을 중앙세력화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말갈에 대한 공동 방어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흘우에게 상을 주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는 그들에게 북방에서 가져온 우수한 철기문화를 전해주고 그 대가로 말갈에 대한 방어를 위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처음에는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제 본국 이외의 인물로 처음 우보가 된 사람은 해루인데, 그가 죽은 후에는 흘우가 임명되었다. 이것은 백제가 말갈에 대한 방어를 위임한 세력이 변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해씨와 백제와의 관계도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해루가 죽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해씨 세력이 약화되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백제와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비류왕대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해씨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기존 세력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력과도 관계를 맺기 위해 흘우를 좌보로 변경하고, 새로이 진회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이 이후로 고이왕대 이전까지 좌․우보 임명에 관한 기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이는 흘씨 세력과 진씨 세력이 계속적으로 백제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백제, 흘씨, 진씨의 세 세력간에 일종의 연맹이 형성되었다. 이 단계에서 백제는 아직 흘씨 세력이나 진씨 세력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고, 그들 각각은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아직은 소위 말하는 부체제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이른바 小國聯盟 정도의 단계로 파악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때 백제와 소국연맹을 형성한 집단들은 어떠한 성격을 가진 집단들이었을까. 일단 백제와 가장 처음 관계를 맺었던 해씨 세력은 해루가 본래 부여인이었다고 한 B-②의 기록으로 미루어 북방에서 남하한 집단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盧重國은 彌鄒忽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沸流系의 성이 해씨였다고 보는 입장에서 북부 출신으로 나오는 해씨와 미추홀의 세력이 상호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바 있다. 필자는 비류계의 성을 해씨로 보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으나, 그들이 백제 건국기에 미추홀을 근거로 삼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북부 출신으로 나오는 해씨가 미추홀과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에는 따를 수 없다. 또한 그들이 초기 백제 왕실과 같은 성을 사용했지만, 별개의 세력집단으로 등장하는 만큼 온조․비류세력과는 별도로 남하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부여계라는 친연성으로 인하여 주변 세력들 중 가장 먼저 백제 중앙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해씨와의 관계가 종료된 후 백제는 흘씨, 진씨의 세력과 연합하여 지속적인 소국연맹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해씨와 달리 출자를 밝혀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가 없다. 다만 진씨의 경우는 평양 정백동 19호분에서 ‘眞氏牢’라는 명문이 있는 耳杯가 출토되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樂浪지역에서 남하한 집단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어 참고된다.
해씨를 비롯한 이들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는 보통 독립된 小國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임진강 및 남․북한강 유역에 산재한 積石塚 축조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적석총들은 硬質無文土器, ‘呂’자형 주거지와 함께 ‘中島類型文化’로 규정되어 말갈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이 되며, 적석총들의 축조 하한은 3세기 중엽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3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동계가 연천-포천-양주-양평-여주 일대를 연결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고, 그 외곽지역에는 말갈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본 견해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진강 및 남․북한강 유역의 적석총들은 백제의 동․북부가 아닌 말갈 세력이 그 축조 주체였으며, 이들이 백제에 복속된 것은 백제가 聯盟王國을 형성하던 3세기 중․후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세력의 실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주목되는 유적이 파주 舟月里 유적과 포천 自作里 유적이다. 주월리 유적은 임진강변에 접하여 六溪土城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凸’자형 주거지를 비롯해 大形甕, 철제 농기구 및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입지나 출토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군사시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편, 자작리 유적에서는 ‘呂’자형 주거지와 함께, 원통형 기대, 기와편, 東晋製 청자편 등 주목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두 유적은 한성백제기 마을유적 중에서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다음가는 2등급의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이들 유적의 상한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유적의 위상으로 볼 때 제기의 동․북부 세력과 관련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러나 조사 성과가 보다 충분히 축적될 때까지는 결론을 유보해두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들 세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백제의 집권력이 향상된 결과 점차 백제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이른바 部體制를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다만 우보에 임명되었던 진회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 반면 좌보 흘우는 죽었다고 했으므로, 그 이후로 백제와 흘씨 집단과의 관계는 종료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진씨는 이후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비해 흘씨는 흘우 이후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다. B-⑧과 ⑨에서 동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가 흘씨 세력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해씨와 진씨가 모두 북부 출신으로 되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방위명의 부는 각각 한 세력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 주변의 여러 세력들을 방위에 따라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B-⑧과 ⑨의 동부가 흘씨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두 기사에서는 주목되는 점이 있는데, B-⑧에서는 백제 왕의 명령으로 축성을 하고 있고, B-⑨에서도 축성을 하고 동부의 민호를 사민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백제가 다른 부에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한 첫 사례들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두 기사의 동부가 흘씨 이외의 다른 집단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백제가 흘우가 죽은 이후 새로운 세력과 관계를 맺었다면, 당장 그러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흘씨 세력은 아마도 흘우의 사망 이후에 그 세력이 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사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흘씨 집단이 가장 먼저 백제의 영향력 하에 들어오면서 부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초기 기년에 문제가 있으므로, B-⑧ 기사의 기년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1세기 중엽에서 2세기 말에 이르는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만 추정해 둔다.
여기서 또한 동부와 관련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자료로 B-④의 기사가 있다. 종래 B-④ 기사의 高木城이 연천에 비정된다는 이유로 昆氏를 동부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고목성 지역이 동부에 속했을 수는 있지만, 다루왕대 당시부터 동부 소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B-④의 昆優는 부명을 冠稱하고 있지도 않다. 또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백제에서는 최소한 B-⑧ 기사의 시점 이후로 부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B-④에 등장하는 곤우를 동부 출신 운운할 수는 없으며, 그는 백제로부터 독립된 세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온조왕 22년(4)에 고목성을 축성했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어, 곤우가 백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인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온조왕대에 연천 지역에 축성을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우며, 최소한 고이왕대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B-④의 고목성이라는 표현도 후대의 고목성 지역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곤우의 활약이 특기된 것은 그가 말갈과의 전투에서 크게 이겼기 때문인데, 이는 말갈의 침입에 시달리던 백제의 입장에서 충분히 주목할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백제가 본격적으로 부체제 단계에 진입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선 다음의 기사가 참고된다.

C-①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三國志󰡕 魏志 卷30, 韓條)

위 기사의 앞부분은 桓帝(146~167)와 靈帝(168~189)의 말에 韓․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군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韓으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백제의 초고왕대(166~214)에 해당한다. 韓․濊가 강성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백제 역시 상당한 성장을 거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군현 지역에서 우수한 문화를 접한 사람들을 다수 받아들이면서 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근거하여 백제가 2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部制를 채용하였을 것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
그러나 백제가 부체제 단계에 돌입하는 것은 다음의 점들을 생각해 볼 때 3세기 초일 가능성이 높다. 비록 2세기 후반부터 韓․濊가 강성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상황만으로 백제에 부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분립되어 있는 지역사회가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대외적 위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建安 연간(196~220)에 公孫氏가 帶方郡을 설치하여 韓 사회에 대해 압박을 가하였다는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C-①에서 보듯이 공손씨는 이때 군사력을 사용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공손씨의 이러한 강경책은 韓 사회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백제와 그 주변의 집단들로 하여금 보다 강한 결속을 꾀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러한 대외적 상황 속에서 백제의 부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대방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낙랑군의 약화로 韓 사회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손씨에 의한 군사적 압력이 미친 영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C-①에는 대방군의 설치 연대가 단지 建安中이라고만 되어있지만, 그것이 설치된 보다 구체적인 시기는 公孫康이 公孫度의 뒤를 이은 204년에서 曹操의 烏丸 정벌이 이루어져 서변의 위협이 높아지는 207년 사이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에서 부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대략 이 무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3세기 초, 肖古王 후반기에 해당하는 위의 B-⑨~⑪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B-⑨는 중앙의 권력이 흘씨 집단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B-⑩은 茴氏 세력이 새로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온 것을 보여주고 있다. B-⑪ 역시 왕의 명으로 말갈과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볼 때, 진씨 세력이 중앙의 통제 하에 들어온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확실히 주변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말갈과 전투를 한 것으로 되어있는 B-③ 등의 기사와 대비해 봤을 때 큰 변화이며, 부체제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 회씨는 西部人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백제 서쪽에 위치한 집단이었던 것이 분명한데, 여기서 그 집단의 실체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종래 서부를 미추홀에 정착했다는 비류계와 관련시키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서도 말했다시피 필자는 비류계의 근거지를 미추홀로 보는 것 자체에 동의할 수 없으며, 회씨 집단이 비류계와 관련이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다만 서부 세력의 근거지를 경기․충남지역 서해안 일대의 土壙墓 문화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한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회씨 역시 이 지역의 토착적 토광묘 축조 집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비류왕대에 병합한 目支國과의 경계가 安城川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충남지역까지 범위를 넓히기는 힘들고, 경기도 지역에 국한하여 회씨 집단의 근거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최근 화성지역의 고고학 자료에 주목하여 이 지역을 백제 서부의 중심지로 파악한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이 견해에서 주로 검토한 白谷里와 馬霞里 고분군의 중심 연대는 비록 4세기이지만, 이외에도 다수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화성 지역이야말로 후일 서부의 중심지로 회씨 세력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특히 吉城里土城은 그 둘레가 2.1㎞를 넘어 규모면에서 몽촌토성에 버금가며, 인근의 社倉里 고분에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만 출토된 예가 있는 금동제 晋式帶具가 출토되어 이 지역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 지역을 백제의 南部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서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부체제가 성립할 때까지 유독 남부에 관한 기사만 보이지 않는데, 이는 단순한 기록의 不備가 아니라 후에 남부로 편제되는 지역 세력이 부체제가 성립할 단계에서는 백제와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백제에서 남부를 포함한 방위명 5부가 성립되는 시점은 마한 병합 이후인 4세기대의 일이며, 따라서 남부의 위치는 목지국의 세력권이었던 안성천 이남의 천안일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화성 지역은 B-⑩에 등장하는 서부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최근 한성시대 백제의 영역을 유적군의 분포 양상을 기초로 서울 강남, 경기 북부, 경기 서․남부, 경기 동부, 천안․청주지역 등 5개의 지역단위로 분류한 견해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세기 초에 성립한 백제의 부체제는 백제 중앙과 진씨, 흘씨, 회씨 등의 4부가 중심이된 ‘4部體制’로 성립하였으며, 그 지역적 범위는 경기도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Ⅳ. 방위명 5部의 성립 과정

이번 장에서는 百濟에서 4部體制 성립 이후 方位名의 5부가 성립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백제는 肖古王 후반기에 집권력을 강화시키며 부체제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3세기 중반 古尒王代 이후로는 급격한 영역의 확대를 이룩하며, 마한 연맹체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해 나가게 된다. 방위명의 5부는 이 과정에서 백제에 편입된 많은 세력들을 백제 중심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성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D-①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三國志󰡕 魏志 卷30, 韓條)

위의 기사는 正始 7년(246)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韓과 帶方郡이 충돌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에서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한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으나, 일단 백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때 백제가 주체가 되었으면 패전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텐데, 260년대의 체제정비에서 보이듯이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주체는 目支國 아니면 최근에 지지를 얻고 있는 臣濆沽國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목지국으로 보아왔으나,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臣智激韓忿’이 ‘臣濆沽韓忿’일 가능성이 보다 확실해진 이상 신분고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신분고국은 기리영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보아 마한 최북단의 핵심 세력이었으며, 군현과 三韓 중남부 내륙지방 사이에서 교역권을 장악하여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중심적인 세력의 멸망은 백제가 성장하는데 있어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구체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백제는 이때 신분고국이 멸망한 후의 힘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마한 북부지역에서 맹주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고이왕 25년(258)에 靺鞨이 이전까지의 적대적 자세를 버리고 갑자기 양마 10필을 바치는 저자세의 외교를 취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편 백제는 이때 주변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동시에 대방군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고이왕의 아들인 責稽王이 즉위 이전에 이미 帶方王女와 혼인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아마도 고이왕 27~29년(260~262)에 이루어진 체제정비는 대방군과의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계 인물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정황들로 미루어볼 때 아래의 기사에 보이는 백제의 영역은 대략 이 무렵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온조왕조의 영역관계 기사들이 3세기 이후의 상황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을 것이라 전제한 것도 이러한 정황에 근거한 것이다.

E-① 溫祚王 13년(B.C. 6)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일반적으로 위 기사의 浿河는 예성강, 走壤은 춘천에 비정이 된다. 熊川은 당시 마한과의 경계가 되었던 곳으로 금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안성천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3세기 당시 이러한 범위 안에는 대략 10여 개의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백제가 이 세력들을 어떻게 편제했을까 하는 점이다. 고구려의 경우 기존의 5부 이외에 새로 정복된 세력은 部內部나 集團隸民, 혹은 侯國的 존재로 편제가 되었다. 백제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게 편제되었을 수 있지만, 일단 고구려의 경우를 염두에 두지 말고 백제 자체의 발전 과정 속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고이왕대에 새로 편입된 집단들이 당시 백제 내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이왕 27․28년에 佐平에 임명된 인물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6좌평에 임명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內臣佐平-優壽, 內頭佐平-眞可, 內法佐平-優豆
衛士佐平-高壽, 朝廷佐平-昆奴, 兵官佐平-惟己

기존의 유력 세력인 眞氏와 왕족인 優氏를 제외하면, 高氏, 昆氏, 惟氏의 세 명이 눈에 띈다. 이중 곤씨는 B-④의 기사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B-④ 당시에는 독립된 세력이었지만, 고이왕대에 이르러 백제에 편입되면서 중앙으로까지 진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씨는 이때 처음 보이는데 낙랑지역 출신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대방군과의 혼인관계를 생각하면 대방군 출신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여겨진다. 유씨 역시 처음 보이는 성으로 그 출자를 알 수가 없으나, 고이왕대에 편입된 주변세력 출신으로 추정할 수는 있겠다. 고이왕대의 지배체제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유력한 세력은 진씨였지만, 그 외의 신진 세력들 또한 6좌평에 골고루 임명된 것을 볼 때, 새로 편입된 집단들이 기존의 세력에 비해 신분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놓이거나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새로 편입된 집단들이 최소한 집단예민이나 후국과 같은 지위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기존 부의 부내부로 편제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들이 부내부로 편제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줄만한 특별한 시사점 또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백제 중앙을 제외한 나머지 여러 세력들이 구조적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로 백제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측의 타당성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

F-① 溫祚王 34年(16) 冬十月 馬韓舊將周勤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위의 기사는 백제가 방위명 부의 편제를 완료한 온조왕 33년(A-②)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왕이 이때 거느린 병사의 수가 5천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近肖古王代 이전의 전투관련 기사 중 백제의 병력 수가 구체적으로 표시된 예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근초고왕대 이후로는 병력 동원 수가 3만 명까지 증가하는데, 이는 각 부에서 6천 명 내외의 병력을 징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기사에서 왕이 5천의 군사를 동원하였다는 것은 중앙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최대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된다. 그런데 방위명 부가 편제되기 이전의 기록에서 왕이 동원한 최대 병력 수는 1천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것이 5천으로까지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방위명 부의 편제를 통해 주변의 몇몇 세력들이 백제의 중앙부로 직접 편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방위명 부는 병렬적으로 존재하던 여러 세력들을 5개의 부로 통․폐합하면서 성립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 백제 부의 숫자는 4개나 5개 등으로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5부와 6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발전되어간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처음부터 특권을 가진 몇 개의 유력한 집단이 모여 건국된 국가가 아니었다. 백제가 유이민에 의해 건국된 국가로써 토착적 기반이 약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지적되어 온 바다. 백제의 유력 세력인 진씨 같은 집단도 온조․비류 집단이 처음 남하했을 때부터 백제의 구성원이 된 것이 아니라, 초고왕대에 와서야 부체제에 편입되었음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따라서 고이왕대에 새로 편입된 집단들이 백제 중앙을 제외한 기존의 세력들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새로운 초부족적인 관제의 제정을 통해 이들 세력들을 점차 중앙 귀족화 시키면서 중앙집권적 체제를 지향해 나갔다. 고이왕대에 佐平制 및 16官等制가 제정되었다고 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고이왕대에 6좌평 16관등제가 일시에 완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좌평에 해당될만한 관직․관등 및 率系의 관등 정도가 마련되기 시작했다고는 볼 수 있다. 위의 6좌평에 임명된 인물들은 지방의 유력자로써 중앙으로 올라온 인물들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방 유력 세력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모습은 좌평제 실시 이전 고이왕대 초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고이왕 7년(240)에 左將을 설치하고 眞忠에게 병마사를 맡겼는데, 좌장직은 연맹체 군사력의 일원적 편제 속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즉, 좌장은 왕권에 직속된 중앙 관직이며, 진충이 좌장에 임명된 것은 그가 이미 중앙 세력화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충이 부명을 冠稱하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이를 방증한다.
한편, 진충뿐만 아니라 고이왕 14년(247)에 진충을 대신하여 좌장에 임명된 眞勿 및 6좌평에 임명된 인물 등 고이왕대 이후의 모든 인물들이 부명을 관칭하지 않았는데, 종래에는 이를 고이왕대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가지고 서술한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고이왕대에 보이는 인물들이 모두 중앙 세력화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더욱이 진씨 같은 경우는 고이왕이 沙伴王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는 데에 협조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고이왕대의 정변을 계기로 많은 수가 중앙으로 올라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이때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중앙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들임을 감안하면 각 부에 남아있던 유력 세력자들은 여전히 부명을 관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고이왕대에 편입된 여러 세력들의 독자성이 이때 해체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고이왕대는 어디까지나 중앙집권화의 단초가 열리는 시기로써, 일종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시기일 뿐이다.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 중앙집권화가 이룩되면서 각 세력들의 독자성이 해체되고, 백제 중앙에 의해 방위명 5부가 성립되게 된다. 따라서 고이왕대부터 방위명 5부가 성립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는 고구려에서 방위명 부와 那部名이 함께 등장하는 시기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백제가 5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일까. 앞에서 필자는 A-①과 ②의 방위명 5부 성립에 관한 기사는 3세기 이후 백제의 일련의 영역 확장 과정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하였다. A-①과 ②를 전후해서 주목되는 영역관계 기사는 바로 다음과 같은 마한의 병합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 관한 기사이다.

G-① 溫祚王 26년(8) 冬十月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G-② 溫祚王 27년(9)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G-③ 溫祚王 36년(18)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A-①과 ②가 각각 온조왕 31년과 33년의 사실로 되어있고, 마한을 병합한 것이 온조왕 26․27년의 사실로 되어있으므로, 마한을 병합한 후에야 방위명 5부가 성립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제기의 마한 병합 기사의 시점을 두고는 몇 가지 설이 나와 있지만, 필자는 󰡔晉書󰡕에 보이는 마한의 활동을 목지국 중심의 활동으로 보는 입장에서 4세기 전반 比流王代의 목지국 병합에 관한 사실이 소급된 것으로 파악한바 있다. 또한 백제는 G-②와 ③에서 보이듯이 목지국 병합 이후 축성사업과 사민 작업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해체시키고 있다. 여기서 만약 목지국 병합 이후 처음 쌓은 것으로 되어 있는 大豆山城이나 湯井城의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다면, 방위명 부의 성립 시기의 범위도 대략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두산성은 위치의 비정을 둘러싸고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탕정성은 오늘날의 온양 지방으로 보는 데에 異見이 없기 때문에 탕정성의 연대 파악이 중요하다. 兪元載에 의하면 탕정성의 치소는 온양시 읍내동에 위치한 邑內洞山城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산성 내에서 線條文 및 格子文瓦片과 赤褐色 및 灰靑色의 硬質土器片이 상당량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중 연대파악에 중요한 것은 회청색경질토기편이다. 朴淳發은 한성시대 백제 토기가 灰色軟質土器에서 회청색경질토기로 토기질이 변하는 시점을 4세기 중엽 경으로 보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원주 法泉里 2호분 출토의 直口短頸壺는 회색연질이지만 견부에 사격자문이 시문된 소형으로 회청색경질 직구단경호에 가까운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과도적 단계로 볼 수 있다는 전제를 하였다. 그리고 이 직구단경호의 절대연대는 2호분에서 공반된 靑瓷羊形器의 연대를 4세기 전반~중엽으로 보는 견해에 따라 4세기 중엽으로 보았다.
필자도 이러한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절대연대는 다소 올라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천리 2호분 출토의 동진제 청자양형기는 중국 南京 象山 7호묘 출토품과 세부적인 면에서 거의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7호묘의 연대는 4세기 전반 동진 極初期에 해당하고 있다. 따라서 법천리 2호분 출토의 청자양형기와 직구단경호의 연대도 4세기 중반보다는 다소 이른 4세기 전반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회색연질에서 회청색경질로의 토기질 변화도 4세기 중엽보다 다소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탕정성으로 비정되는 읍내동산성에서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었다는 것은 탕정성의 축조 상한이 4세기 전반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하한은 근초고왕의 마한 잔여세력 공략이 이루어진 369년으로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탕정성의 축조 시기를 염두에 두면 방위명 5부의 편제도 4세기 초에서 중엽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시기는 근초고왕대 전반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근초고왕대에 중앙집권화가 이룩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일단 군사체제 면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근초고왕 24년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군사를 大閱하면서 모두 黃色의 기치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원적인 군사체제의 확립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각 부별로 독립적으로 군대를 유지하고 기치의 색도 각기 달랐을 것인데,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이들을 국왕 휘하의 군대로 일원적으로 편제함으로써 기치 색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병력 동원 수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병력 동원이 수백에서 많아야 수천에 불과했지만, 근초고왕대에 이르면 3만에 이르는 병력이 일시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병력체계의 변화만 보더라도 근초고왕대에 諸部의 독자성이 상당히 약화되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 諸部의 독자성이 약화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룩되면서 각각의 부들은 백제 중앙에 의해 방위명의 5부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근초고왕대에 비로소 왕도와 그에 대비되는 지방의 개념이 형성되면서 왕도가 지방에 대한 통제를 해나갈 수 있는 기제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면 왜 하필 방위명의 5부로 편제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백제에서 강역에 대한 四方意識은 도성으로 慰禮城을 결정할 때부터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것으로, 東西南北部의 설치 역시 四方意識의 발로에 따른 것이라고 본 견해가 우선 주목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부여의 四出道나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근초고왕은 만주 방면에서 남하한 인물로 생각되기 때문에 部名을 정함에 있어 4세기 당시 이미 성립해있던 고구려의 방위명 5부가 직접 참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편 백제가 東部都尉 및 南部都尉를 설치했던 낙랑군의 체제를 모방하여 방위명 부를 설치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들 자신이 지적하듯이 낙랑군의 체제와 백제의 체제는 서로 성격이 달랐으며 근초고왕이 북방에서 남하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므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5부의 편제 작업은 최소한 근초고왕 20년 무렵에 이르면 완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기 근초고왕기는 2년조의 기사를 제외하면 21년에 이르기까지 기록의 공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기간동안 부의 재편을 비롯한 체제의 정비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백제가 근초고왕 21년 이후로 급격한 영역의 확장을 이룩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때 5부로 편제된 지역은 어느 정도의 지역적 범위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보거나, 특정 지역만을 대상으로 부가 설치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A-①에서 국내의 민호를 나누었다고 하였으므로 그 편제 대상 지역은 백제 전역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 고이왕대의 영향력 범위를 보여주는 위의 E-①의 영역에 비류왕대 병합된 목지국의 세력권 정도가 추가된 정도의 지역 범위가 5부의 대상 지역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E-①의 웅천을 안성천으로 보기 때문에 목지국 역시 李丙燾 이래의 설에 따라 천안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G-②와 ③에서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쌓은 대두산성, 탕정성, 고사부리성 등은 각각 아산, 온양, 예산 지역으로 비정이 된다. 따라서 당시 백제 5부의 편제 대상 지역은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차령 이북의 천안-아산-예산 정도의 선에 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성시대 백제의 방위명 5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의 6부는 물론, 백제에 영향을 준 고구려의 방위명 부와도 큰 차이가 있었다.
Ⅴ. 정국 운영의 추이와 部의 성격 변화

한성시대 백제의 部는 그간 지방통치제도라는 측면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많았다. 그것은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부명이 처음부터 방위명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중앙에 의해 구획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백제 초기에 부로 표현된 지역들은 백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편제되어진 지방통치의 단위는 아니었으며, 독자성을 지닌 지역집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역집단들은 백제와 연맹관계에 있었으며, 3세기 초 이후에는 점차 백제 중앙에 의해 자치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部體制가 성립하였고, 4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방위명의 5부로 편제되어지면서 지방편제의 단위로 轉化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4세기 중반 이전의 부는 지방통제라는 차원에서 논할 수 없고,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와 같이 부체제라는 관점을 적용하여 정치구조를 살펴보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후 성립하는 방위명 5부는 고구려의 경우와 달리 전국을 대상으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지방통치라는 시각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백제 초기에 부로 표현된 지역집단들의 성격 변화 과정을 정리하면서 백제 초기 정치구조의 변화 과정 및 지방통치 체제가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정국 운영의 추이

필자는 앞에서 肖古王 후반기인 3세기 초 무렵에 백제가 4부체제를 형성하였고, 그 이전까지는 소국연맹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백제가 처음 소국연맹을 형성하면서 관계를 맺은 세력은 해씨였으나,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관계는 종료되었던 것 같다. 이후 해씨를 대신하여 흘씨 및 진씨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지속적인 소국연맹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사료 상으로는 이때 백제가 이들 세력에게 좌보 및 우보의 職을 주었다고 되어있다. 좌․우보는 고구려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琉璃王代의 大輔職이 大武神王代에 이르러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고구려 좌․우보제는 桂婁部가 沸流部 내지 椽那部와 연합한 상태에서 2那部 연합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이해된다. 백제에서는 대보는 보이지 않지만, 온조왕대 족부 을음이 임명되었던 우보가 고구려 초기의 대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왕의 측근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각 부의 세력에게 준 좌․우보의 성격은 고구려와는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비류부나 연나부가 나부로써 고구려 연맹체에 편제된 상태였지만, 백제의 경우는 진씨나 흘씨 등과 연맹 관계를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세력 정복에 적극적이었던 고구려와는 달리 초기 백제는 말갈에 대한 방어에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처럼 연맹세력을 왕권 하에 편제시키는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에서 주변 세력에게 좌․우보를 준 것은 그들을 중앙 정치세력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변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말갈의 침략에 보다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 백제는 이후 내부적인 발전에 보다 박차를 가하면서 집권력을 강화시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의 외곽에 위치하여 말갈과 보다 직접적으로 접촉하였을 흘씨나 진씨 등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백제에 비하여 집권력을 강화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결과 백제가 점점 연맹의 중심으로 기능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각각의 집단이 자치력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이들 집단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고, 각각의 집단은 그들 집단의 의사결정에 있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3세기 당시 부여에서 적이 있으면 諸加가 自戰하던 양상과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여에서는 官位의 분화가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고, 왕위의 부자상속이 행해지는 등 정치적으로 상당히 성장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당시의 백제와 직접 비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백제는 3세기 초 무렵에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외적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본격적인 부체제 단계에 접어들었다. 백제가 이 시기에 부체제를 형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집권력이 강해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회씨 집단이 새로 편입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백제 4부체제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일반적으로 부체제를 형성하게 되면 각 부는 왕권에 의해 무역․외교․전쟁권 등의 대외교섭권을 박탈당하게 되지만, 그 내부의 사안에 대해서는 자치력을 유지하면서 단위정치체적 기능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백제의 경우는 비록 사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모습을 역시 약간은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4부체제의 성립과정을 논하면서 살펴보았듯이 B-⑧~⑪의 기사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중앙의 권력이 각 부에 일정 정도 미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고왕대 후반이 되면 백제 역시 각 부의 자치력을 일정 정도 통제하면서, 고구려나 신라에서 있었던 것과 유사한 부체제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까지의 인물들이 부명을 冠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방증 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부명이 고유명이 아닌 방위명이지만 이는 후대에 윤색된 결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부명이 방위명으로 나타나는 것보다는 부명을 관칭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백제의 부를 그 성립 당시부터 지방통치를 위해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구획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재고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부체제 하에서의 백제 정치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의 경우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 사건들이 전하는 것이 거의 없어 실상을 알기가 어렵다. 이 경우 고구려나 신라의 사례가 참고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주로 고구려의 경우를 염두에 두면서 대체적인 흐름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주목되는 점은 다루왕 21년(B-⑦) 이후 고이왕 9년(242) 왕의 叔父 質이 우보에 임명되기까지 좌․우보에 관한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대무신왕대(18~44) 이후 太祖王 71년(123)에 이르기까지 좌․우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의 경우는 이 기간 동안 좌․우보제가 운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의미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백제의 경우도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좌보 흘우가 죽은 이후(B-⑦) 더 이상 좌보가 임명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좌보는 더 이상 주변 세력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흘우가 죽은 이후 동부로 표현된 집단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부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부체제가 성립하고 주변 집단의 자치력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는 더 이상 좌․우보의 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체제 하에서 각 부가 독자적 전쟁권 등을 통제 당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던 좌․우보의 직이 부체제 성립 후 더 이상 각 부 세력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초고왕대 북부의 眞果가 좌․우보의 직이 없이 왕의 명령으로 출격하고 있는 것에서도(B-⑪) 알 수 있다. 따라서 진씨에게 주어졌던 우보도 진씨 세력이 부체제 하에 편입되면서부터 박탈당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각 부 세력을 일정하게 통제하게 되었지만, 중앙 정치 운영에 있어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할만한 적절한 제도적 장치는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태조왕 이후 5나부체제가 확립되면서는 계루부와 다른 강력한 한 나부만이 손을 잡고 영도력을 발휘하는 좌․우보제가 갖는 한계성으로 인해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부체제 확립 이후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백제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고왕의 뒤를 이은 仇首王代에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려는 온조계 왕실의 입장이 비류계 및 진씨 세력의 반발을 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수왕은 재위 8년(221)에 漢水 서쪽에서 군사를 대열하였는데, 이는 군사권을 중앙에서 장악한다는 상징성을 내포한 의식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부에 대한 군사적 통제가 국가적 차원의 열병으로 수렴되었으며, 구수왕은 열병을 통해 군사통수권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수왕의 권력 강화책은 비류계 및 진씨 세력의 반발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구수왕 사후 비류계인 고이왕이 진씨 세력과 손을 잡고 구수왕의 아들인 사반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백제 왕위계승은 蓋婁王代까지 비류계에 의해 이어져왔는데, 초고왕에 의해 온조계 왕실이 등장하면서 온조계와 비류계의 갈등이 증폭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씨 세력도 부체제에 편입되었으나 중앙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미비로 정국 운영에서 소외되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실제로 구수왕대에는 진씨 출신 인물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고이왕의 정변은 초고계 왕실이 신정권 수립과 부체제 확립에 따른 지배 세력 내의 갈등 요소를 적절히 해결할만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안고 즉위한 고이왕은 자연 새로운 지배체제 창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이왕대부터는 부명 관칭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는 이 때부터 각 부의 유력 세력들이 중앙으로 결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이왕은 각 부의 유력자들을 끌어들여 중앙 정치에 참여시킴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동시에 각 부가 지니고 있는 자치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는 우선 앞서 보았듯이 7년에 左將을 신설하고 眞忠을 임명하였다. 이는 중앙으로의 집중을 꾀하고 있던 군사권을 진씨에게 줌으로써, 백제 연맹체 내에서의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더군다나 14년에는 眞勿이 좌장이 되고, 진충은 우보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씨의 정치적 위상 강화는 물론 그들의 족적 기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이왕대의 정변을 계기로 진씨 세력이 중앙으로 올라왔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점차 왕권 하의 중앙 귀족으로 전신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수왕대에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진씨 세력은 그들의 재지 기반을 포기하고 왕권 하에 편입됨으로써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왕권과 중앙집권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고유명 부의 제가들이 독자적 자치체의 수장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수도에 올라와 거주하며 중앙 귀족이나 관료로 전신하게 되었는데, 백제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기존에 동부와 서부로 표현되었던 세력들의 향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진씨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정치적 주요직은 진씨가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세력이나 위상은 진씨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러면 이 무렵의 정국 운영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단 우보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런데 이때의 우보는 부체제 확립 이전 연맹 세력들에게 준 좌․우보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존의 좌․우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앙 관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우보는 고이왕의 숙부와 중앙으로 진출한 진씨 세력이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중앙 관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이때에 들어서는 우보만 보이고 좌보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의 누락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의 우보는 연맹 세력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 행정상의 필요가 아니면 굳이 복수의 직이 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보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을까.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왕을 보좌하면서 행정 운영의 총괄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좌장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좌․우보와는 달리 군사 업무는 직접 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 업무는 좌장이 맡고 그 외의 국가 행정에 관한 사무는 우보가 총괄하는 식으로 양자의 기능이 분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 당시 백제에서의 회의체의 존재 여부 및 그것의 우보와의 관련성이다. 이 당시 백제에서 고구려의 諸加會議와 같은 회의체가 존재했는지는 일단 기록이 없어 알기가 어렵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백제에서도 비슷한 회의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고이왕의 즉위도 지배 세력간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닌 모종의 정변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회의체의 적극적 기능을 상정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이 당시 우보도 회의체와 관련지어 그것의 의장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우보는 왕의 대리인이자 중앙 행정의 책임자로 중앙과 각 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 백제의 지배 영역과 지배 계층이 확대되면서는 이러한 식의 정국 운영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백제는 신분고국의 멸망 이후 주변 세력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많은 세력들을 새로 편입시켰다. 이때 지배계층이 확대된 것은 앞서 6좌평에 임명된 인물들의 구성을 검토하면서 알 수 있었다. 이때의 확대된 영역과 지배계층을 적절히 통제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보만으로는 힘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대신하기 위하여 佐平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기록상 좌평은 고이왕대에 이미 그 구체적 직능이 구분되어 6명이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종래 많은 의문이 있어왔는데, 필자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본다. 6좌평제의 확립은 최소한 근초고왕대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고이왕대에 6좌평에 임명된 인물들의 인명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런 인물들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필자는 고이왕 당시에 6좌평의 직능은 완전히 분화되지 않았지만, 최고의 관등이자 관직으로써 다수의 사람이 임명되었던 것은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래 고이왕대 편입된 재지 수장층들에게 솔계 관등을 주고, 그 아래 邑落의 渠帥들에게는 德系 관등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왔다. 그러나 덕계 관등은 중간 관료층으로써 실무자 집단 내지 전문적 직능자 집단으로 이해되므로, 읍락 거수들에게 주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일반적으로 고이왕대에 재지 수장층을 편제하는 단위로 좌평이 마련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읍락 국가의 수장들에게 좌평을 주고, 읍락의 거수들에게 솔계 관등을 주었다는 견해, 率을 漢式 관명으로 보면서 고구려의 加나 신라의 干과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고이왕대에 재지 수장층을 중앙으로 끌어들이면서 다수의 좌평이 발생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언급되듯이 좌평이란 명칭이 이 당시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좌평이 설치되면서부터는 정국 운영이 좌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회의체를 구성하여 국정의 주요 문제를 다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의장은 首席佐平인 內臣佐平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맡았을 것이다. 비록 왕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 비추어볼 때 따르기 어렵다. 고구려의 경우, 3세기 중엽 이후 제가가 중앙귀족으로 전환되고 제가회의가 상설화되면서 國相이 회의를 주재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干支를 칭하던 각 부의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하던 시기에는 왕도 참석하였으나, 中古期 이후 그들이 관등을 수여받고 大等으로 불리면서는 上大等이 설치되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다. 더욱이 대등은 특정한 관부에 소속되지 않고 인원도 다수였다는 점에서 이 때의 백제 좌평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백제에서도 재지 세력들이 좌평을 수여받게 되면서는 수석좌평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당시의 회의체에 대해 佐平은 물론 左將까지 참여했을 것으로 보고, ‘諸佐會議’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좌장은 좌평보다는 하위의 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좌장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회의체의 명칭을 ‘佐平會議’라 부르도록 하겠다.
한편, 종래 이 당시의 회의 장소와 관련하여 南堂이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南堂에 관한 다음의 󰡔三國史記󰡕 기사들을 보면, 백제는 물론 신라에서도 남당이 귀족회의의 장소로 사용된 예가 없음을 알 수 있다.

百濟 南堂관련 기사
H-① 古尒王 28년(261) 春正月 初吉 王服紫大袖袍靑錦袴金花飾烏羅冠素皮帶烏韋履 坐南堂聽事
H-② 東城王 11년(489) 十一月 宴羣臣於南堂
新羅 南堂관련 기사
H-③ 沾解尼師今 3년(249)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H-④ 沾解尼師今 5년(251)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H-⑤ 味鄒尼師今 7년(268) 春夏 不雨 會羣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H-⑥ 訥祇麻立干 7년(423) 夏四月 養老於南堂 王親執食 賜穀帛有差
H-⑦ 眞平王 7년(585) 春三月 旱 王避正殿減常饍 御南堂親錄囚

南堂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李丙燾는 남당에서의 회의를 君臣會議로 규정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南堂을 귀족회의와는 관련 없이 왕의 ‘의식을 통한 정치’가 구현되던 공간이었다고 파악한 견해도 제출되었다. 위의 기사들과 이러한 견해들을 아울러 생각하면, 南堂이 좌평회의의 공간이었다고 파악할 수는 없겠다. 좌평회의는 泗沘時代의 政事嵓會議처럼 수도 부근의 신성한 장소에서 열렸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좌평회의와 그 의장인 수석좌평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서는 비류왕 즉위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I-① 比流王 원년(304) 比流王 仇首王第二子 性寬慈愛人 又强力善射 久在民間 令譽流聞 及汾西之終 雖有子皆幼不得立 是以 爲臣民推戴 卽位

위 기사에 의하면 비류왕은 구수왕의 二子로 臣民의 추대에 의하여 즉위하였다. 汾西王이 죽고 아들이 있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즉위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고이왕이 사반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즉위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더군다나 고이왕과 개루왕이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류왕도 구수왕의 아들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비류왕은 정변을 통해 즉위한 고이왕과는 달리 臣民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비류왕이 즉위 전에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다는 점을 봐도 그가 실력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즉위 과정은 고이왕과는 사뭇 대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고이계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던 초고계의 인물이 다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신민의 추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신민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들이 왕위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정치세력으로서 왕위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민이 비류왕을 추대할 때 그들이 모여 회의를 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인데, 이 회의가 바로 앞서 설정했던 좌평회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좌평회의는 왕의 즉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그 권한이 막대한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단편적인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 사례로 미루어볼 때 좌평회의는 당시 백제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왕의 즉위나 대외 전쟁과 같은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좌평회의에서 수석좌평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까. 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의 경우가 참고된다. 고구려에서 烽上王이 폐위되고 민간을 떠돌던 美川王이 즉위할 때 국상 倉助利가 수행한 역할을 보면, 백제에서의 수석좌평의 역할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백제와 고구려의 회의체를 직접 비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수석좌평과 국상이 회의체의 의장으로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창조리는 중앙귀족의 대표자로서 귀족의 전체 의견을 수렴하고, 방위부 출신 인물을 동원하여 행정실무를 총괄하였는데, 이는 국상이 귀족회의의 의장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백제에서 수석좌평의 역할도 귀족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에게 전달하고, 국가 행정의 실무를 총괄하는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
따라서 당시 수석좌평의 지위는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비록 고이왕대 이후 내신좌평에 王弟나 王妃族이 임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내신좌평이 다른 좌평들보다 관직․관등 체계상 상위에 있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귀족세력에게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아직 왕권중심의 지배체제가 마련되지 못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백제가 진씨를 왕비족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중앙 정치 운영에서 귀족세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정치 제도적 여건은 마련되지 못 하였던 것이다.

2. 部의 성격 변화

그러면 마지막으로 근초고왕대에 방위명 5부가 성립하면서 부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주목할 것은 고이왕 이래의 국력 성장에 힘입어 비류왕대에 마한의 중심이었던 目支國을 병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때 병합한 지역은 지리적인 위치로 볼 때 방위명 5부가 성립하면서 남부로 편제가 되었을 것인데, 백제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 실시한 일련의 조치를 살펴보면 방위명 부의 성립 과정과 성격을 일부 추정할 수 있다. 앞의 G-②와 ③을 보면 백제가 목지국을 멸망시킨 뒤 적극적인 축성과 사민정책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목지국을 멸망시켰을 당시 그들의 원주지와는 정반대 방향인 漢山의 북쪽에 주민들을 옮기고 있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의 세력을 철저하게 해체하려는 의도와 함께, 북방의 말갈이나 고구려에 의한 군사적 위협에도 대비하려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 조치로 이해된다.
이렇게 본다면 기록에는 비록 남부 지역의 축성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지만, 목지국 세력을 대거 북방으로 옮기면서 북방에도 대규모의 축성사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廣開土王에 의한 永樂 6년(396)의 백제 정벌 당시 고구려가 공취한 백제의 성이 58개나 됐다는 점을 봐도 가능한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58개의 성이 모두 한강이북에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상당수의 성이 백제 북부 지역에 축성되어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중에는 백제의 성장과정에서 백제에 편입된 세력들이 사용하던 성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겠지만, 새로이 축성된 성 역시 상당수 있었을 것이고, 그 성들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4세기 초에서 중후반에 걸쳐 축성되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북방에 대한 사민과 축성 과정 속에서 백제의 남․북부가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근초고왕이 단지 고구려의 방위명 5부에 대한 관념만을 갖고 국가 지역의 단순한 구분을 위해 방위부를 설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남․북부와 동․서부를 한꺼번에 설치하지 않은 것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근초고왕은 북방에 사민된 목지국 세력을 비롯한 諸 주민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 등 북방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의 축성사업과 함께 방위명 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북부의 편제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지방의 세력들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동․서부도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동․서부 지역에도 역시 축성 등을 통하여 주민의 통제를 시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부와 성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종래 部-城-村體制를 주장하는 설과 부와 성 사이에는 직접적인 통속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설로 나뉘어 왔다. 부-성-촌체제는 廣開土王碑에 나오는 백제의 지방 단위로서의 城과 村 위에 部를 더 두어 그것이 실질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는 입장이고, 후자의 견해는 사료상 부와 성의 통속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부가 광역의 지역구분의 의미만을 지닌다고 보는 입장이다. 후자의 견해대로 한성시대에 사비시대의 方領과 같이 각부를 통괄하는 部長같은 존재가 있었는지 아직은 확언할 수 없다. 새로 축성된 성을 중심으로 하여 일부 성에는 지방관도 파견이 되었겠지만, 일부 성에는 여전히 토착적인 세력이 지배력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4세기 당시 백제가 각지의 수장층에게 동진제 청자 등의 위세품을 사여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고 있는 점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장에 의한 일원적인 부와 성의 통속관계를 수립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가 단순한 지역구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남․북부와 동․서부를 시기를 달리하여 설치할 이유가 없다. 방위부의 설치는 축성사업과 함께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중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더구나 근초고왕대 이후에는 병력동원 수의 급격한 증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집권화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대외 정벌에 일시에 3만 명까지 동원하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렇다면 각부에서 6천 명 내외의 병력이 소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비시대에는 각 方에서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郡에서는 7백~1,200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초고왕대의 각 부에는 사비시대의 군에 해당하는 정도의 큰 성이 대략 5~6개 내외로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1개 군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지만, 초고왕대에 북부의 진과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을 공격한 것을 보면(B-⑪), 한성시대에도 큰 성에서 1천 명 내외의 병력이 동원됐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각 부의 주요한 5~6개 내외의 성에 지방관이 파견되고, 그 성을 중심으로 하여 병력의 동원과 행정의 집행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행정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그들 중 1명이 부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어쨌든 부를 단순한 광역적인 지역 구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방위명 부는 백제가 지방에 대한 지배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5부로 편제된 지역 내에서의 지방지배방식을 부-성-촌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근초고왕대 무렵부터 실시된 이러한 부-성-촌체제와 전시대의 부체제를 개념적으로나 용어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백제의 부를 성립 당시부터 중앙에 의해 구획되어진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부체제 내지 부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백제의 지방통치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용어 사용은 부체제에 대한 개념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부체제와 부-성-촌체제를 용어상 아무런 구분 없이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까지 발견된다. 부체제를 초기국가의 정치구조를 총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느냐 아니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넘어가기 이전의 한 단계로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 고구려사나 신라사에서 그것을 지방통치의 제도가 아닌 일정한 독자성을 지닌 단위정치집단 간의 정치구조를 설명하는 틀로써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직 백제에 대해서만 부체제라는 용어를 지방 통치 시스템으로 개념지울 수는 없기 때문에, 초기의 부 관련 사료를 모두 지방 지배와 관련된 자료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부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 관련 사료를 모두 지방지배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백제의 부 관련 기록이 모두 방위명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후대에 윤색된 결과에 불과하며,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이전에는 단위정치체적 기능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위정치체로서의 부가 중앙집권화가 이룩되는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독자성을 상실하면서 방위명 부로 재편되었고, 대대적인 축성 사업과 연계되어 부-성-촌체제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사에 있어서도 부체제라는 용어를 단위정치체 간의 정치구조를 설명하는 용어로 한정해서 사용해야 하며, 지방지배 방식을 나타내는 부-성-촌체제 등의 용어와는 명확히 구분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성-촌체제와 같은 큰 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지방지배 방식을 檐魯制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담로제가 근초고왕대부터 실시되었다고 보는 논자들 중 일부는 大城 중심의 이러한 통치방식을 담로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로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만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담로는 주지하듯이 중국의 郡縣에 비견되는 큰 邑을 지칭하는 백제의 고유어로, 특정한 통치방식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일반명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지배 방식이 확인된다고 하여, 이를 바로 담로제라는 특정한 지방제도로 파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성 그 자체는 백제 전 시기에 걸쳐 보편적으로 사용된 통치 단위이다. 따라서 담로제라는 것을 하나의 지방제도로 상정할 수 있으려면, 다른 지방제도와 구분되는 담로제만의 특수한 운영 방식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담로에 관한 기록에서 그것이 22개라고 한 것을 볼 때, 그것은 당시 백제의 모든 성의 개수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담로 자체는 일반명사이지만, 󰡔梁職貢圖󰡕와 󰡔梁書󰡕의 담로에 관한 기사는 무언가 특정한 방식의 지방 지배체제와 관련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子弟․宗族이 파견되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견해에 따를 수 없으며, 蓋鹵王과 東城王代에 보이는 王․侯를 담로제와 연결시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담로제는 대왕권이 확립되는 개로왕대에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근초고왕 이래 편입된 5부 이외의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Ⅵ. 結 論

지금까지 百濟에서 部體制가 성립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백제의 경우 部에 관련된 사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명칭도 처음부터 方位名으로 나타나고 있어 종래 연구에 난점이 많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료들만이라도 선입견에 구애됨이 없이 면밀하게 분석한다면 무언가 계기적인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제기 초기에 보이는 부에 관련된 사료들을 백제의 국가 발전 과정과 관련지어 단계화시킬 수 있었다.
제 1단계는 백제가 주변 세력들과 小國聯盟을 맺은 시기의 기록이었으며, 이 단계에서 부로 표현된 각 세력들은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해씨 세력과 연맹을 맺었지만 이들과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 하였고, 이후 흘씨 및 진씨와 지속적인 연맹체제를 유지해 갔다. 그 시기는 대략 1세기에서 2세기 말 정도까지로 볼 수 있다.
그 다음, 제 2단계는 3세기 초부터 3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로, 백제가 주변세력들을 일정한 통제 하에 두면서 부체제를 성립시킨 단계이다. 보통 백제의 부체제를 언급할 때 5部體制를 상정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백제 중앙, 진씨, 흘씨, 회씨 등 4개의 집단이 중심이 된 4部體制였음을 알았다. 한편, 부체제 성립의 외부적인 계기로는 公孫氏에 의한 帶方郡 설치가 주목되었다.
다음, 3단계는 臣濆沽國의 멸망 이후 백제가 馬韓 북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시기이다. 이때 다수의 세력들이 기존의 부 세력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로 백제에 편입됨으로써 기존의 4부체제라는 틀은 유지되지 못 하였다. 기록상으로는 部名 冠稱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는 재지 세력들이 중앙으로 올라온 결과였다. 그러나 아직 각 부의 독자성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4단계는 近肖古王代에 중앙집권화가 이룩되면서 부의 독자성이 완전히 해체된 단계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比流王代에 병합한 目支國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방위명의 5부가 편제되어졌다. 이 5부는 기존에 백제에 편입되어 있던 여러 세력들을 방위에 따라 5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통․폐합한 것이었다. 방위명 5부는 高句麗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전국을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수도 일대에 편제된 고구려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었다.
한편, 이러한 변화과정에 짝하여 백제 정국의 운영 방식도 변화되어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1단계에서는 백제가 주변세력들에게 左․右輔를 주었는데, 이는 중앙 관직은 아니었다. 이때의 좌․우보는 靺鞨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2단계에 들어오면서 좌․우보는 운영되지 않았고, 확대된 지배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결과 중앙 정치 운영에서 소외된 세력들의 불만이 쌓였고, 古尒王과 진씨에 의한 정변이 발생했다. 이 정변을 계기로 左將이 신설되고, 우보가 부활되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가 고이왕대 후반에 3단계로 진입하면서는, 우보 대신 재지세력들을 흡수하여 佐平이 설치되었다. 이 때부터 백제 정국 운영의 중심에는 佐平會議가 있게 되었다. 좌평회의는 왕의 즉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권한이 막대한 기구였기 때문에, 왕권을 일정하게 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근초고왕대에 중앙집권화가 이룩됨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왕비족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국 운영의 변화상은 시기가 지날수록 각 부의 독자성이 약화되고, 부의 유력 세력들이 중앙 귀족화하는 추이와 맞물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이 완료되는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각 부는 독자적 존재 의의를 잃고 지방 행정단위로 전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성립된 방위명 5부는 지방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성립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部-城-村體制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행정은 部長에 의한 일원적인 통제가 아닌, 각 부의 주요한 5~6개의 성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부-성-촌체제는 부체제와는 그 개념을 명확히 구별해서 사용해야 하며, 아울러 檐魯制와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參 考 文 獻》

1. 史 料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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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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