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론

■ 자유론

사회적 통제 한계와
개인 자유 한계 고민

 

사람들은 ‘자유’의 존재임을 믿는다.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반문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자발적인 여성 섹스판매업자의 벌이 노동, 개인의 양심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하게 번 돈으로 마약을 복용하는 것, 자발적으로 상호 동의된 혼외성관계…… 이 모든 자유는 제한되고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인 사회에서 자유보다는 부자유가 더 많이 유통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렇다면 ‘개인은 자유롭다’는 믿음은 허구인가?

이런 의문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 예를 들어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의 첫 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인간은 굴레에 갇혀 있다. (……) 어떻게 이런 변화가 나타났는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이런 굴레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고립된 개인에게 자유란 없으며, 어떤 제약도 없이 사회적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개인이란 단순한 악성 유토피아이다. 자유란 오로지 사회 내에서 생산, 유통되는 ‘사회적 사실’이기 때문에, 사회성의 원리(공리의 원리)내에서 자유를 논할 때만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의 ‘자유론(1859)’은 개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한계를 정하고, 사회적 제한을 어디까지 인내 수용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 저항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고전적인 연구로서, 루소가 그로부터 백년전에 제기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밀은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유명한 말로 공리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공리주의는 ‘모든 개인은 행복을 원한다’⇒‘행복은 좋은 것이다’⇒‘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원해야 한다(최대다수의 최대행복)’는 추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정말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감정(심리적 능력)이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이 책이 나온 후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밀이 개인의 자유(개별성)와 사회성이 충돌할 경우에 대해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귀족, 상류층, 엘리트의 관습과 전통을 사회적 선호로 설정하고, 그것으로 대중을 억압하는 ‘도덕적 전체주의자’라고 비판했고, 다른 쪽에서는 그가 개인의 개별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으며, 관습이라는 이름의 ‘다수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적절한 보호장치를 제공하는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고 옹호하고 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각자 책을 읽으면서 판단할 문제인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밀이 개인의 자아 완성은 오직 자유의 증진에 있으며, 자유의 증진은 개인의 개별성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며, 자유란 사회적 선호나 혐오에 대해 저항하는 수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서설, 사상과 언론의 자유,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 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 원리의 적용 등 5장으로 된 얇은 책이다. 원문은 놀랍도록 난해하지만, 몇몇 잘된 번역서는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이 가을에 ‘자유론’과 더불어 ‘자유’를 쟁취해 보자.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 개인이 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 쟁취는 고도한 지적, 도덕적 성실성에 근거한 ‘자유 행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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