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현재 속에 숨겨진 상처와 의지를 담다

 
우리대학은 과마다 FM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전통이 있다. 우리 생명과학과의 경우는 ‘민족 동국, 구국 바시대 생명과학과~’로 소개를 시작한다. 신입생 때 선배들이 지목하면 자동반사로 일어나 목청 터지게 외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많이 FM을 외쳤던 때가 있었는데, 동국인 등반대회를 하던 날이었다.
산을 오르기 전에는 등반대회를 왜 하는지 몰랐다. 그저 우리대학은 옆에 남산이 붙어있으니 날씨 좋은 날에 올라가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등반대회가 무엇을 기념하는 것인지를 알게 된 이후부터는 산을 오르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바로 4·19 혁명을 기념하는 등반대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몇과의 FM소개는 4·19 혁명을 기리는 구호가 들어있다고 한다. ‘민족 동국, 구국 바시대!’

맥주, 체코의 멋과 맛
동유럽을 가로질러 어느덧 나의 발길은 체코에까지 이르렀다. 이 전 나라인 오스트리아는 물가가 너무 비싸 최대한 배를 졸라매고 다녔다면 방금 도착한 체코의 물가는 너무나도 저렴해 다시 여행의 생기를 되찾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게다가 터키를 여행할 때 아주 친했던 지인의 숙소가 있어 당분간 머물게 될 수 있었다.
숙소도 해결되고 음식값도 너무 저렴하니, 체코 프라하는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은 도시가 되었다. 집을 나와 트램을 타고 구시가지로 들어가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각종 야외 공연이 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모두 수준급의 엔터테이너들이 길거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즐기며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면 체코만의 특별한 건물들과 광장, 강, 다리를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까를교’이다. 강 건너편에 있는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각기 동상들이 양쪽으로 줄지어있는, 햇빛의 높이에 따라 색이 변하는 이 다리는 그야말로 프라하의 최고 명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정시마다 아기자기한 인형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천문시계 또한 꼭 봐야 할 볼거리이다.
이렇듯 아름답고 사랑이 금방이라도 피어날 듯한 프라하를 즐기고 있자면 본인도 모르게 기분이 밝아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고 듣고 즐기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프라하에서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맥주! 많은 사람은 맥주 하면 독일을 먼저 떠올리는데, 오히려 유럽 사람들의 경우에는 독일보다 체코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체코 맥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우리가 흔히 미국 맥주로 알고 있는 버드와이저는 사실 부드바이저라는 체코에서 유래된 맥주이다.
체코 맥주를 마시기 전까지 난 맥주의 참 맛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더위를 없애고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용도가 더 큰 음료였는데, 체코에서 필스너 생맥주를 입에 댄 순간, 그동안 내가 마셨던 맥주들은 모두 길 잃은 어린양처럼 참 맛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맥주들이 되어버렸다. 체코의 필스너는 진정 ‘참 맛’이었다.
프라하에 체류하는 내내 술을 마셨지만 그렇다고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서 맥주만 퍼마셨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팁투어’라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이드 투어를 하였는데, 이 때 체코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니며 생각지도 못했던 체코의 상처를 보게 되었다.

체코의 아픔이 담긴 곳을 찾다
체코는 독립한 날보다 지배당했던 날이 더 긴, 항상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억압받고 고통 받았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오스트리아, 독일, 소련, 등등 체코인에게 햇빛이 뜬 날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와도 참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프라하의 명소 중엔 존 레논의 벽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가보면 알록달록한 낙서로 가득 찬 벽을 볼 수 있다. 겉보기엔 그저 장난스러운 낙서이고 아무 의미 없는 글자들이지만 이 벽의 유래를 안다면 그 아픔을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곳이다.
과거 체코가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체제에 억압당하던 시절, 누군가 수도원의 벽인 이 곳에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는 존 레논의 가사를 적었고 이를 본 체코 청년들은 독립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로 이 벽을 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교 건물의 벽이기 때문에 허물지는 못하고 그저 위에 덧칠을 계속 하였는데, 그 이후로도 낙서는 끊이질 않았고 겹겹이 쌓여만 갔다. 이 벽의 가운데를 살펴보면 돌에 부서져 나간 구멍이 있는데, 그 안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회칠과 낙서가 반복되었는지 그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체코의 독립을 위한 염원은 여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프라하를 대표하는 바츨라프 광장에 가보면 그 끝에 있는 국립 박물관 앞 인도에 크게 박혀 있는 나무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독재시절 당시 프라하의 독립과 잠들어있는 시민들을 깨우기 위해 분신자살을 했던 프라하 대학교 청년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 때 총 12명의 프라하 대학교 청년들이 분신자살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이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슬픈 역사, 찬란한 현재
독재를 당했던 역사와 나라의 독립 그리고 자유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체코 시민들을 떠올리며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활활 타오른 대학생들의 뜨거운 혈기가 남아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니, 깨어 있으려 노력하면서도 깨어있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을 받은 것이다.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교를 간다고 권리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고 가야할 책임감이 늘어나는 것이다. 우리 지성인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4ㆍ19 혁명 때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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