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최초의 사랑 이야기

▲ 리시 이야기 1·2
(Lisey’s Story)
지은이 : 스티븐 킹
옮긴이 : 김시현
펴낸곳 : 황금가지

스티븐 킹이 얘기하는 ‘멀건이’ 상태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든 제 아무리 사소한 행위에서조차 ‘기대치’라는 것을 배제하긴 ‘종나’ 어려운 삶들이다.
적어도 킹이란 작가에 대한 기대치엔 스멀거리는 간지러움과 같은 멜로 따위는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선 악(惡)스러운 미지의 존재 또는 벽장 속 호박 빛 안광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 더 제자리를 잘 찾아간다는 게 일종의 선입견이었던 셈이다. ‘리시 이야기’의 광고문구인 ‘스티븐 킹 최초의 사랑 이야기’라는 문구에 시선을 던질 때마다 상기되는 거북스러움 내지 낯설음은 모던호러의 대가라는 그런 식의 기대치 내지 선입견 위에 놓여 있었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눈에 띄는 붉은 색 표지의 ‘리시 이야기’를, 은근히 신경 쓰였으나 인기 없음으로 인해 누구도 손대지 않고 있었던 이 책을 읽기 시작한건, 퇴근 시간에 임박해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조급증과 빈손으로 나가게 됐을 때 그야말로 한 시간여를 ‘멀건이’ 상태에서 보내야 한다는 짜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소한 것도 망각을 거부할 수 있다

“세상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니… 노래, 달빛, 키스 등 현실 세계가 하루살이로 분류한 것이 때로는 가장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리시는 깨달았다. 쓸데없는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호히 망각을 거부할 수 있다.”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유명작가 스콧 랜던의 미망인, 리시 랜던에겐 남편이 남기고간 그 모든 흔적들이 사소해야했다. 의미 자체의 가벼움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도 흘렀어도 남편에 대한 떠올림 일체는 슬픔의 되새김질에 다름 아니었으니, 자의든 타의든 연관된 기억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꺼내기 힘들 어딘가 깊숙이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겨진 흔적들을 지워나가던 중, 리시는 스콧과 함께 겪어냈던 과거, 사소한 것들로 이어지는 단서들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은 현실 자체만으로 서 있을 수 없기에 과거로 침전하고, 과거는 슬픔이나 사랑 혹은 낮은 햇살아래 ‘부야문’으로 이어지는 향기로운 오솔길로 다시 나타난다.
‘알망나니’ 혹은 ‘멀건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랜던 일가의 참담한 삶이 한 편에 놓인다. 그 삶에 대해 이해와 망각으로 동참해야 했던 리시 자신의 자취들을 되짚어 가는 과정이 다른 한 편으로 놓인다. 일종의 보물찾기! 죽은 남편이 남긴 알 수 없는 단서들을 통해 과거의 일부를 찾아내고, 다음의 단서로 또 다른 일부를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낸 과거로 그 다음의 과거를 떠올리는 식으로 리시는 사소해진 기억 속 보물찾기와 퍼즐 맞추기를 이어간다.
물론 ‘리시 이야기’에도 현재라는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 집요한 인컨크 이야기나, 첫 대면에서 가슴을 도려내려는 짐 둘리, 리시의 기나긴 이야기에 동참하는 언니 아만다의 발작과 현실 속에 놓인 보물찾기의 단서들.
하지만 소설 속 대부분은 그녀가 불현 듯 곱씹고 추억해내는 과거 속의 한때이게 된다. 그러니 굳이 비중을 두자면야 하루살이로 분류되었더라도 망각을 거부한 사소한 것들의 지나버린 이야기 쪽이 오히려 묵직하다.

단순한 사랑 놀음은 아니다

혹여나, 이 모든 것들이 리시와 스콧의 사랑 놀음에 대한 진부한 나열 정도로 생각하고, 짧기도 길기도 한 단편들을 지나쳐버리면 읽는 이는 더 이상의 책읽기가 어려워질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소설 ‘리시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리시’에게도 과거란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닌 스스로 망각을 거부할 만큼의 의지를 지닌 강력한 실체이고 끊임없이 현실을 도발하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리시’의 이야기이긴 하나, 일부의 현실과 방대한 과거가 엮이다 보니 그녀의 끊임없는 상념에 대해 동의해야만 순조로운 책읽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단지 죽은 남편에 대한 슬픈 회상이 내용의 전부라면, 킹의 애독자로서 무척이나 낙심했었겠지만, 부야문, 피의 챌, 서늘한 웃음소리의 거대하고 악한 존재, 목을 역류하는 물 한 모금으로의 순간이동 등등 비상식적인 소재거리 또한 끝없다. 그의 작품에서 접하기 쉬운, 비현실적이라는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소재들 또한 등장하기에 그저 사랑이야기에 그치지 않나 라는 걱정은 쉽게 접을 수 있게 된다.

사랑해. 모두 같아.

마지막 장면, 스콧이 남긴 편지를 리시가 읽어간다.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의 시간, 한 장 한 장 읽어갈 수록 줄어드는 편지지.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스콧은 여전히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몇 장이 남았는지 헤아리며 남편의 줄어드는 흔적을 안타까워하는 리시의 조급함에, 읽는 이 또한 굵은 볼딕체로 인쇄된 편지의 남은 분량이 얼마만큼 인지 자꾸 헤아리게 된다. 편지가 마무리되면 이 길고 긴 이야기도 끝나버릴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킹의 전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명확한 실체, 논리적 또는 체계적인 전개, 사실 이런 걸 느끼긴 힘들었지만, 사랑이야기라는데…. 사랑 앞에선 눈이 멀어버림을 대수로 여기면서 이해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는 게 뭐 그리 문제가 되겠나? 사랑이라는데?
참고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 리시와 스콧만의 용어들이 무수히도 난무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가죽 이기다, 적보가이, 알망나니, 덩, 종나, 종나 대벙한, 챌 등등…. 2편의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미리 접해보는 것도 읽기에 도움이 될 테고, 뭐 그렇지 않더라도 리시의 상념 속에 같이 빠져 들다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테니 미리 걱정할 필요까지야 없을 듯싶다. 어찌한들…. ‘모두 같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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