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다.
  다사로운 햇살은 얼었던 눈을 녹여 개울을 만든다. 淸淸(청청)한 물속에서 송사리떼들이 제철을 만나고, 땅위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그것을 아지랑이라 했다. 개울가의 괴벗은 갯버들은 도토리만씩한 싹을 내고 뽀오얀 숨털에서는 봄을 호흡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난 계절은 길고 긴 기다림의 여정. 이제 나비의 형상이 눈길에 잡힐 듯한, 그리고 녹색의 꿈이 튀어 오르는 가까운 앞산이라도 올라가 움질대는 아지랑이 속에 묻히고 싶다. 괜히 서성거려지고 마치 幸運(행운)처럼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어느 구석에선가 경이할만한 봄놀이가 한창일지도 모른다. 새 옷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다시 생동하는 봄의 여정에 오르고 싶다. 花草(화초)로 장식된 봄의 대합실 문턱에서 우울하고 싸늘한 여행이 끝나 나는 봄을 구가하는 사람들 속에 빨려 들어가 안식처의 품에 고스란히 안길 것이다.
  그래서 그 아늑한 품속에서 나만이 가지는 ‘驚異(경이)’ 할일거리를 처리해야겠다. 무서운 ‘우울’은 멀리 쫓아내버리고-.
  山河(산하)는 ‘크레파스’처럼 영롱하게 단장되고, 묵은 칠(色(색))들은 꼬리를 감춘다.
  벨벳처럼 봄공기 보드랍고, 훈훈한 속에 쌓여 나는 지나간 回億(회억)을 되새기는 기회를 얻고 回憶(회억)을 남용한다. 과거의 遺産(유산)은 쳇바퀴처럼 빙빙빙 돌아 제자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추억이 머리에 떠오르는 한, 추억은 내 귀에 다정히 속삭이는 英雄(영웅)이 돼 주고 나는 女王(여왕)이 된다.
  지난 세월을 되새기는 限(한), 모두는 孤兒(고아)이기에.
  어디인가.
  또 다른 내 다정한 ‘영웅’은 지금도 나를 기다리며 비탈진 등성이에서 있을 것이다. 다정하지 않다면 나는 어떡할 수 있을까. 감정 없는 이방인에게 화사한 선물과 도덕을 주고 싶다. 누구인가 용서해주고 싶다.
  봄에의 욕심을 부려보아야겠다.
  눈을 감고 백치가 되기 서운하여, 짧아져가는 봄밤을 등잔불 밑에서 음미한다. 육중한 테이블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배움의 터전을 갈고 닦아도 좋겠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소위 ‘도덕가’ 보다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에 감각과 정신과 심장 구석구석까지 가 있는 의식의 生(생)의 어떤 순간에도 行爲(행위)의 한 가운데까지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를 잊거나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까 염려해주고, 이 모든 것을 일깨워준다.
  나른한 잠 속에 빠져 있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절실한 표현방법인 ‘카리카츄어’를 그리게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시절, 봄이 왔다. 모든 사람들의 무지함을 무시하지 않고 서서히 관용을 베풀어 봄날에 散步(산보)의 길을 열어주기까지 한다.
  봄의 陽地(양지).
  왜 낯설고 썰렁한 방에 혼자 앉아서 기다리는가.
  미지의 지구 주위에는 회색빛 도는 대기가, 또 자기가 바라보는 한 대 내에서만 자전하고 공전하여 계절을 바꾸어 놓았다고 이론을 전개하려는 自滿(자만)을 앗아버리고…. 자연에 둘러 싸여 생동하는 봄의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망. 나 이외의 사람이 가진 값진 보물, 혼례를 치러버린 타인, 연애중이라는 기지배들의 우스꽝스럽고 소란스러운 재잘거림에서 외면당한 채, 훌륭한 테마 속에 조심스럽게 넣어주기로 한다.
  따스한 봄, 씨앗들은 이렇게 새 인물로 등장시켜준다. 담장 밖에 서서 들썩이는 번화가에 뒤섞이어 헤매는 방관자에게 호미까지 쥐어주며 봄을 가구도록 이끌어준다. 그것도 아주 자발적으로. 우리는 적어도 현재 대휴식에 젖었고, 봄을 키우기 위하여 心力(심력)을 다하고, 마련된 비료를 아낄 수 있는 소박한 기회를 -봄이 아닌 다른 계절을 물리치고 나에게까지 기회를 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라고.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눈부신 햇살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거리며 하늘에서 풀려와 날개를 펴고. 꽃피는 내 가슴에 현란하게 쌓이는 것을.
  모두들 ‘아그레망’하고 탄성을 올리며 함께 봄나들이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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