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햇살이 마른 잔디 위에서 흐느적이고 있다.
  윤희(白允姬(백윤희))는 가슴 어느 한구석에 펑하니 구멍이 뚫린 듯 허술한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그 구멍으로 흐느적이는 햇살조차 술 술 빠져 나가는 것 같아 더 허술했다. 무엇으로든지 가슴 가득히 꽉 차게 메워 보고 싶었다. 윤희는 무릎을 감쌌던 팔을 풀어 힘껏 가슴을 안아 보았다. 아무것도 안겨 오지 않는 안타까움이 또 술 술 새어 나갔다. 윤희는 멍한 시선을 산 아래로 던져 보낸다.
  반듯한 주택들이 넓은 골목 사이마다 진을 치고 있었다. 윤희는 전시장의 건축 모형도를 훑어 가듯 대강 대강 시선을 흘려보낸다다.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에서 멈추었다.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흰 빨래는 적은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윤희는 흰 깃발을 들고 마당에 엎드린 자신의 형편없는 등어리를 찾아내고 어깨를 추스렸다. 항복을 받아들일 적장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윤희는 한달음에 뛰어가 대문을 흔들고 싶어진다.
  (다들 있을까? 그전대로,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가, 아버지의 방에는 아버지가, 언니의 방에는 언니가 있을까? 언니의 방에는 내가 쓰던 물건들이 아직도 있을까. 내가 언제든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먹서먹하지 않게 벽에 붙여 놓았던 <세잔느>의 복제(複製)그림이나 때묻은 다다미가 깔려 있을까.)
  그러나 울타리는 너무 높아져 버렸다.
  대문은 몇겹으로 두텁게 막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윤희는 자꾸 가슴이 허전해서 풍선처럼 둥 떠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풍선은 바람 따라 불려가는 순한 멋이라도 있다. 극한의 한 모서리까지 가서는 소리 내며 터져버릴 용기라도 있다. 윤희는 잔디를 한 웅큼 뜯어 후 불어 보았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왜 이럴까?)
  윤희는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흥 하고 웃어버렸다. 윤희와 같은 경우의 어느 사람들은 제외하더라도 아무 소리 없이 저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윤선(允善)언니를 보면 그것은 이유가 서지 않는다. 그건 사치한 핑계일 뿐이라고 하던 윤선의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삼신할망구가 노망을 해서 너를 낳게 했다는 할머니의 푸념이 바로 들어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희가 얼마만큼 영리하고 명랑한 소녀였는지는 할머니도, 윤선이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저애가 어려선 그러지 않았는데 차츰 커가면서….”
  하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려서는….)
  윤희는 발등에 기어오르는 왕개미 한 마리를 잡아 손바닥에 놓았다. 개미는 짧은 촉수를 바싹 치켜 세우고 허둥거린다.
  “개미 똥구멍은 참 시다.”
  “먹어 봤어?”
  “응. 그러니까 언니도 먹어 봐.”
  “아이 징그러.”
  공기 줍기를 하다가 찡그리던 윤선의 작은 얼굴이 흔들리고 있다.
  늘 이끼가 파랗게 돋아 있던 습기찬 뒷마당에는, 집도 없는 달팽이가 흰 줄을 죽 죽 그으며 기어 다녔다. 윤희는 작은 풋콩처럼 알알이 들어박힌 오동나무 열매가 아무리 따고 싶어도 달팽이가 징그러워서 뒷마당에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윤희가 기다란 장대를 찾아 들면, 윤선은 찡그린 얼굴을 한사코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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