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일 기념사


  佛敎(불교)를 말하면 極樂(극락)을 생각하고 極樂(극락)을 말하면 佛敎(불교)는 波岸(파안)을 위한 現實否定的(현실부정적)<독트린>을 가진 종교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佛敎(불교)가 종교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나, 佛敎(불교)가 現實否定的敎義(현실부정적교의)로 차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佛敎(불교)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反論(반론)이 된다.
  부처님이 오신 날이면, 太子(태자)(悉達(실달))가 룸비니 東山(동산)에서 周行七步(주행칠보)하고 ‘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이라고 외치셨다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한마디야말로 佛敎(불교)의 생명을 갈무리고 있는 근원인 것이다.
  死後(사후)에 極樂(극락)을 가기위한 노력으로 佛敎(불교)를 신앙하라면 하마쯤 佛敎(불교)는 3천년 가까운 역사를 무시하고 人間社會(인간사회)에서 완전히 疎外當(소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太子(태자)가 태어난 것은 世界(세계)가 열린 것으로 太子(태자)가 大地(대지) 위에 7步(보)를 걸은 것은 太子(태자)가 그의 세계를 建設(건설)한 것이고,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부르짖은 것은 세계의 지배자임을 -創造者(창조자)임을 喝破(갈파)한 것이다.
  어찌 太子(태자)만 그러랴! 우리 모두가 母胎(모태)에서 떨어질 때 부르짖은 고고聲(성)이 저 太子(태자)의 소리와 다르지 않으며 太子(태자)의 위치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敎典(교전)에 의하면 太子는 처음 虛無(허무)와 懷疑(회의)를 느끼고 出家(출가)했다고 한다.
  눈 쌓인 숲속에 6年(년)을 앉았다가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결코 신비스럽고 不可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거 存在(존재)하고 인식하는 세계의 제일 원인이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가슴이 덜컥하고 눈에서 閃光(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그는 이미 世上(세상)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大絶望(대절망)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번 가슴이 미어지는 소리로 고함쳤을 것이다. <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
  人間(인간)에게는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人間(인간)은 광야의 十字路(십자로)에 그저 던져져 있었다.
  人間(인간)(太子(태자))은 大地(대지)를 굴러다니면서 걸음을 옮겼다. 位置(위치)를 設定(설정)하고 세계를 창조했다.
  이것이 人間(인간)이다.
  人間(인간)은 제 自身(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창조한다.
  人間(인간)은 自身(자신)의 意志(의지)에 의하여 그 사회를 極樂(극락)으로도 地獄(지옥)으로도 만든다.
  人間(인간)에게는 다만 자유만이 있는 것이다. 人間(인간) 本來(본래)로 亭有(정유)하는 자유를 어떻게 驅使(구사)할 것인가도 亦是(역시) 自由(자유)다.
  사회를 嘆(탄)하지 말고 자신을 激勵(격려)하라.
  人間(인간)은 자신의 主宰者(주재자)요 자신이 처한 세계의 主宰者(주재자)며, 모든 現實(현실)의 제일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佛敎(불교)의 敎義(교의)가 覺(각)을 促求(촉구)하고, 安樂(안락)한 來世(내세)를 위해 오늘의 善行(선행)을 가르치는 것도 人間(인간)의 노력에 依(의)하서만이 人間(인간)이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며, 현실의 개척이 未來(미래)에의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全生命力(전생명력)을 다하여 이 순간을 사는 것이 그것이 佛敎(불교)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聖誕日(성탄일)을 儀禮的(의례적)인 儀式(의식)을 執行(집행)하고 즉흥적인 行使(행사)나 하는 날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순간 어느 날이라고 그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날만큼은 우리 모두가 生(생)의 환희를 느끼는 날이 되어야 하고 自身(자신)에 가장 충실한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來年(내년)이면 이날이 또 온다.
  그러나 이것은 觀念(관념)이다. 未來(미래)에 속지 말고 오늘을 잡아라!
  거기 生命(생명)의 빛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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