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만난 북유럽의 종말

그리스·로마신화 정도가 익숙했던 일상으로 북유럽 신화가 불쑥 끼어든 건, 인터넷 사기혐의로 고발되었다는 경찰서 사이버수사대 형사의 전화에서부터였다. 호기심에 가입했던 게임 아이템 거래사이트에서 누군가가 내 명의를 도용해 사기를 쳤다는데 ‘라그나로크’라는 게임에 대한 질문이 쏟아진다. 참고인 조서까지 작성하다 보니 부아가 치민다. 그런데 궁금하다. 라그나로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데 볼 만한 책 찾기가 힘들다. 케빈 크로슬리-홀런드의 ‘북유럽 신화’ 정도가 읽을 만한 듯싶다. 북유럽 신화 속 세상은 9개의 세상으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관련 책자에서 라그나뢰크라로 표기 용어는 이 9개 세상이 소멸하는 최후의 전투를 의미한다. 태양도, 별도 사라진 라그나뢰크 속에서 모든 세상은 불타버려 재만 남고, 대지는 바다 속으로 침전하고 만다. 이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신과 두 인간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신화는 마무리된다.

북유럽신화 The NORSE MYTHS지은이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옮긴이 서미석
펴낸곳 현대지성사
12000원 / 362쪽
소장처 : 중앙도서관 사회과학실
청구기호 : 398.20948 C951n서
북유럽 신화만의 체제를 이해하는 덴 지루한 시간이 전제될 만큼 낯설었지만 왠지 모를 친숙함 또한 종종이다. 주신(主神) 오딘은 다양한 제품명에 등장하며, 저 유명한 테란 족 유닛 발키리는 여전사 발키리에의 차용이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는 난쟁이 안드바리의 황금반지 이야기를 주요 출전으로 활용한다. 또 롤플레잉 게임 ‘라그나로크’는 최후의 전쟁을, 3D게임 ‘아스가르드’는 신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신화 속 용어를 빌린 것이다. 이외에도 오딘의 창 궁니르, 천둥의 신 토르와 그의 망치 묠니르, 전사들의 궁 발할라 등 많은 대목들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인용되고 있다. 신화의 재미라고 하면 그 안에 배어 있는 당시인들의 삶이나 사유세계에 동참해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시의 계급구조와 더불어 저들만의 상세한 생활상을 조망해볼 수 있고, 각각의 신들에게 투영시킨 시대적 사상 내지 규율, 전통과 문화 등의 이면을 엿보는 재미가 덤으로 얹힌다. 북유럽 신화는 인간 존재의 기원과 설명해낼 수 없는 여러 현상에 스스로 답해가려는 고대 북유럽인들의 극적이고 독특한 노력의 과정 자체일 것이다. 오랜 시간 덧대어진 상상력의 광대함을 느껴보며 난쟁이 안드바리의 황금반지처럼 돌고 돌아 여태 이어지는 인간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는 건 신화가 주는 큰 교훈이다. 또한, 수천 년도 더 된 상상 속 이야기 곳곳에 기생하고 있는 우리네를 돌아보자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내가 알고 있으며 살아가게 될 시대 전체라는 오만함을 반성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토르’가 누구냐는 질문에 ‘마블코믹스 히어로잖아!’라고 대답하는 동국인들이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권한다. 중앙도서관은 아이템으로 사기 친 적이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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