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불편한 오른쪽 다리 때문에 이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내가 이 不具(불구)를 지니고도 세상을 그런대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가 환자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오만 덕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室內(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자욱한 간접 조명 속에서 김선생의 표정은 조금 파리해 보였다.


“정말 거듭 감사합니다.”
K는 자기가 비운 술잔을 김 선생쪽으로 건넸다.
“아닙니다” 한 손으로는 피우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김선생이 다른 한손을 내저었다.
“제 쪽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뭘. 의사로서도 치료를 받던 분이 건강을 회복하여 이렇게 활기차게 생활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글쎄요, 김 선생님께서 그러시다고 하시니까 그런 줄로 알겠습니다만, 어디 김 선생님 같으신 의사 선생님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지난 병원 생활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 합니다.”
  자기 말에 다소 과장이 섞였음을 일부러 나타내려는 듯이 K는 지긋지긋하단 말 끝에 슬쩍 웃음을 보였다.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사실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김 선생은 시종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그건 그래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병원 생활을 해야할 일이 있게 된다면 때에 따라서는 해볼만한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우선 괜히 쉴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병원에 있으면서 의사 분들한테 워낙 질려 놔서요.” 김 선생을 의식했음인지 이번에도 K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얼른 덧붙였다. “물론 김 선생님은 절대 예외입니다.” “허어, 이거 공짜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들께서 K형을 몹시 귀찮게 해드렸던 모양이죠?”
  김선생이 일부러 엄살을 떠는 듯한 태도를 해보이면서 K앞에 놓인 빈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되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병, 그러니까 홧병같은 거, 하나를 더 앓게될 지경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말입니다. 정말 의사분들은 왜들 그렇게 환자와 얘기하는 걸 꺼려하는지….”
  K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했다.
  “回診(회진)이면 병원 日課(일과)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김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진 때가 되면 환자들은 대개 자기의 病勢(병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고 싶어하고, 또 자기 나름으로 느낀 바를 의사 분들께 알려주고 싶어한단 말입니다. 혹 치료에 도움이 될까해서요. 그런데, 도대체 제 병원 생활 동안 김선생님 말고는 다른 의사분들과 시원하게 얘기 한마디 주고받아본 기억이 전혀 없어요.” 목소리가 너무 높았다고 느꼈는지 K는 목소리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몇번인가 얘기를 꺼내보았었는데, 번번히 실없는 꼴만 당하고는 아예 의사들 앞에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어요.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노라’는 듯한 표정을 해가지고는 무뚝뚝하게 환자를 다루는 의사를 볼때면 그 태도가 그렇게 傲慢(오만)해 보이고, 밉살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의사분들이 병실을 다녀가고 나면 환자들끼리 모여서 담당 의사들에 대한 험담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K는 얘기를 잠깐 멈추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리고 조금은 醉氣(취기)가 어린듯한 태도로 김선생 쪽을 한번 건너다 보았다. 김선생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진이 끝나고 나면 자기들 의사들끼리는 무슨 얘긴가를 주고 받긴 하던데, 그게 어디 환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여야죠. 하다못해 반창고 하나만 하더라도 의사분들은 ‘반창고’하지 않고 ‘플래스터’ 하시더만요. 그러니…” 얘기하다 말고 K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가 후 내쉬었다.
  “그런데 참, 제가 왜 김선생님 앞에서 이러죠? 벌써 취했나 봅니다, 이거.”
  허허 웃으며 K는 수선스럽게 담배를 비벼 끄고는 술병을 들어 김선생한테 술을 권했다. 김선생이 잔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재미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야 늘 겸손하시고, 친절하셨으니까, 환자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대단했었습니다. ‘이제 醫業(의업)에 從事(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어쩌고 하는 선서를 꼭 지키실 분이라고들 했습니다.” K가 김선생의 잔을 채우고 나서 들었던 술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말이 났으니 말씀입니다만, 어떻습니까? 닥터, 참, 보람을 맛볼 수 있는 직업 아니겠습니까? 특히나 김 선생님 같으신 경우에는 더구나…” K가 同意(동의)를 구하듯 김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사실, 대단히 부럽습니다.”
  “뭐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김 선생은 의자에서 등을 살며시 떼면서 살짝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급 마시고는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K형, 세상에 傲慢(오만)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내내 웃으면서 가벼운 말대꾸만 해오던 김선생이 돌연한 질문을 던지자 K는 여간 당황한 모양이었다.
  김 선생이 K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신에게는 오만해질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느낀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그순간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저는 이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보람을 느낀다기보다는, 솔직히 오만을 얻고 있는 셈입니다.”
  김 선생은 자못 단호했다. 아직도 김선생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K가 윗몸을 가만히 뒤채면서 꿀꺽 소리나게 침을 삼켰다.
  “무수히 부대끼면서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뭔가 오만해질 만한 건더기 같은 것이 나에게 만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김선생은 K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K는 대답이 없다. 김선생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저는 이 불편한 오른쪽 다리 때문에 이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내가 이 不具(불구)를 지니고도 세상을 그런대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가 환자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오만 덕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室內(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자욱한 간접 조명 속에서 김선생의 표정은 조금 파리해 보였다.
  “K형을 포함해서 여러 환자 분들이 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好感(호감)을 갖게 됐던 것은 아마, 다른 닥터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저의 이 불구가 그 분들로 하여금 쉽게 오만해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김 선생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때, 술 기운 때문인지, K는 자신과 김선생이 함께 자욱한 간접 조명의 불빛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고 느꼈다.
  “많이 오만해 질 수 있으면, 그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심한 기압의 변화를 겪고 있는 듯, K에게는 김 선생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