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성실해 보려는 마음이 긴장을 베푸는 속에서 매일을 지내다보면 계절의 변화 따위에는 별스런 관심을 둘 사이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게 일쑤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계절의 감각을 운운해 보려는 이들 앞에서 한마디 응수 한번도 허락지 않는 위인이라면 딴딴한 주름이 잡힌 감상을 지녔을까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앙상했던 가로수 樹皮(수피)아래 물을 나르며 봄을 대비하고 비좁은 방구석에 웅크리고 겨울을 지나던 이들 산에 올라 심호흡을 가누는 이 늘어나고 휴일이 가져다주는 갖은 들놀이가 모두 봄을 구가하는 표현이겠지만 뭐니뭐니해도 봄의 선구자는 거리를 거니는 아카시아들이 먼저다. 작년 이 맘 때쯤이다.
  숱한 ‘프레시ㆍ맨’들 중의 하나로 가슴 벅찼었다. 아직도 고교시절의 앳된 것들이 생생한데 한꺼번에 밀어 닥치는 지나칠 정도의 무던한 자유!
  철저하게 착실한 편이라기보다는 활발한 자유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일들에 대한 패기의 벅참도 크게 이들의 행동을 규제하지는 못한 채 지나쳤다. 그때 무엇이 그렇게 가슴 벅차게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새로워졌다는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면 너무 싱거운 일들이었다.
  메마른 사로에 이식된 오리나무의 역경이나 필연적으로 이어나가야 하는 투쟁의 각오쯤은 우선 우연한 기대에 침잠되어졌는상 싶다.
  새로운 환경은 항상 새로울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매일을 같이 지나고 생활 속에 파고들던 지난 수없는 일들이나 습성의 여운이 체 가시기도 전에 어느새 또 다른 환경은 권태 속에 말려들고 별로 신통치 않은 요원한 일들이 우리를 또다시 노예로 종용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무의 생애는 최후까지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데에 위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흡족하지 못한 토질과 간신히 타협을 이룬 잔뿌리 일지언정 자기의 기호성을 찾아 완전히 적응하고 무성히 자라나는 것! 그러면 온 벌거숭이산에 수목이 우거지고 가는 곳마다 숲을 이루어 재해들 막아주는 제 구실을 할 때에 사람의 마음은 살벌하지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평화로워질 것이 아닌가.
  바짝 마른 나무 줄기와 뿌리만이라면 보는 이의 마음을 비곤하게 해주고 불안을 안겨주고 어느 한 바람결에 쓸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식물과 곤충들이 긴 동면에서 탈출을 하는 때다. 깡마른 토질이라 역겨워 하지 말고 물기를 찾아서 왕성히 뿌리를 뻗혀가자.
  거추장스런 옷가지들을 이것저것 걸치고 제법 여유 있어 보이든 앙상한 분들이 저희 거리인양 뽐내던 모습이 사라지고 노출미에 민감한 여자분들께서 거리를 누비기 시작하는 이때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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