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피워 될까요?”
  “아, 예.”
  “정말 모든 거 다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기만 해요.”
  “…”
  “잠깐 기다리시지요. 차를 가져올 테니.”
  행자는 화재가 어색했던지 마른 열매, 줄기, 풀잎 따위를 한줌 쥐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아내의 흉터가 생긴 원인을 알지 못했고, 그는 아내의 흉터가 생긴 원인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람을 쏘이고 싶었다.
  밖에는 눈이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사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눈 멎은 하늘처럼 빛을 뿌려 산사(山寺)의 밤을 충만감으로 가득 채웠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내장까지 맑아질 듯 밤공기가 피로를 몰아냈다. 잠시나마 두고 온 도시의 때를 씻고 싶었다.
  “행자님, 세면 좀 할까요?”
  “이리 오세요. 따뜻한 물이 있으니.”
  “아니 찬 물이 더 좋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잠시나마 집에서처럼 지내세요.”
  행자의 호의는 그에게 낯선 곳, 낯선 사람 앞에 있는 것을 잊게 했다. 애인에게 열중한 소년처럼 진지하게 차(茶)를 끓이는 행자를 보고, 그는 불쑥 아무 말이든지 하고 싶었다.
  “행자님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나요?”
  “………”
  피차에 어색하고 곤란한 질문이었나 보았다. 행자는 넓은 등을 보이고 한동안 종지를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하지도 않은 대답을 나지막한 음성으로 들려주었다.
  “본래 난 불량배였습니다.”
  “저런…”
  “제대하고는 할일이 없었어요. 뜻은 커도 사회는 거대하여 몸을 의탁할 곳마저도 찾을 수 없었지요. 싹이 피어나기도 전에 짓밟아 버리는 사회는 나를 다시 지하의 굴속에 처넣어 거세시켜 갔던 것입니다. 다시 못된 버릇이 시작됐고, 나는 그것을 하나의 몸부림으로 규정지었지요. 그때 스님을 만났으나 며칠을 절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가곤 했지요, 그러다가 스님의 끈질긴 보살핌으로 이번에 오래 견딜 수 있었어요. 이제 봄에 계를 받으면 불경(佛經)과 가까워지고, 부질없는 꿈에서 벗어나야 되겠어요.”
  행차가 잔잔하게 과거를 밝히고 있었다. 흉터, 거친 손, 열정적인 눈동자, 행자의 온몸과 옷자락, 숨소리, 그리고 촛불까지 지울 수 없이 아픈 과거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행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흉터가 있어도 삭발한 머리는 승복에 잘 어울렸고 향 내음을 물씬 풍겨주었다.
  엄격하게 구부린 행자의 등을 보며, 출가한 더 깊은 이유를 들으려는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모의 얼굴이면서도 정확한 윤곽이 잡히지 않는 아내의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하는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으스스 오한이 들었다. 그는 행자와 방으로 들어갔다.
  “바람에는 영혼이 있지요.”
  “이 산, 이 암자, 그리고 스님과 행자님에게 영혼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도 제법 시적인 기분에 젖어 행자의 음성을 흉내냈는데, 말투가 어색하여 먼저 쓴 웃음이 나왔다.
  차는 쑥, 가래, 아주까리 냄새가 배어있어 독특하면서도 향기로웠다. 종지를 공손히 받쳐 들고 마시는 행자의 모습이 차의 맛을 친숙하게 하는 줄도 몰랐다.
  “좋으시다면 얼마든지 차를 마시며 바람소리를 들으시지요.”
  “고맙습니다.”
  맑은 차속에 목탁소리가 숨어 있었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산행의 피로를 아주 잊었다. 숨소리마저 요란한 작은 방에서 그는 벌거숭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차종지를 내려놓으며 행자가 말을 이었다.
  “스님이 백일기도에 입재하신 후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 선생님입니다. 전에는 달갑지 않던 방문객이 스님이 정근에 드신 후로는 그렇게 그렇게 기다려질 수 없었어요. 벙어리나 귀머거리라도 있다면 오랫동안 붙들고 떠들고 싶을 만큼….”
  “자주 와야 되겠는데요. 하하….”
  “별 말씀을….”
  촛불. 저 뜨겁고 깊은 불빛 아래에 마주앉으면 누구나 모든 고뇌를 잊고 정겨워졌다. 그는 문득 산중에 파묻혀 사냥꾼처럼 입적(入跡)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추운 밤에도 잠들지 않은 산의 움직임, 눈 덮인 산은 어둠을 몰아내고 겨울의 축제를 준비하였으며 바람은 노래하고 수목은 춤을 추었다. 산은 하나의 교향악이었다. 그는 행자의 눈빛으로부터 산사의 감미로운 밤을 가습조이며 음미했다.
  “스님은 불쌍한 분이지요.”
  문밖의 어둠 멀리에 있는 다른 누구에게 말하듯 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때는 누구나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졌다. 말을 더듬는 사람도 괴로웠던 과거를 감동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감상에 젖은 듯, 행자의 목소리는 눈 내리는 소리만큼이나 희미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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