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좀 더 다른 아침을 맞아야겠다.

 

  ‘1989년 ○월 ○일’
  해질녘의 어스름에 흥겨이 북을 치던 한 낮을 조망한다.
  친구와 어깨를 걸고 늦은 오후에 술집으로 갔다. 비 내린 오후에 밀려오는 건조 열풍의 한 오라기를 마시며 빛을 발하는 물빛의 영롱함을 느끼는 하루, 그러나 부어진 한 잔의 술잔에 고이는 작은 파동을 마셔야 하는 일련의 빈 웃음들을 머금었다. 지금은 한 잔을 더 기울일 때라는 암호 같은 사주를 받는 것이다.
  단지 이 취기가 번지는 순간만은 애절한 우리 옛적 인간놀이를 상기하며 잔을 들어 엷은 미소를 흩뿌릴 수가 있다는 자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처세에 의한 경험에 비추어 나의 快(쾌)는 곧 若(약)라는 명제에 아둔패기처럼 꼼짝할 수 없는 나를 친구에게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신이 내려주신 거룩한 목숨살이는 숨을 쉬고 있는데, 어느 날 밤 희미한 가로등 불 밑에서 조간신문으로 얼굴을 가리며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던 ‘인간의 폐차’, ‘무익한 인간’ 도저히 생성되지 말았어야 할 나의 존재의 허울을 생성되지 말았어야 할 나의 존재의 허울을 생각해 보면서 허탈하게 잔을 비워야 했다.
  ‘아이러니’
  눈은 언제나 변화가 있다. 가시적인 객체에 주관성은 늘 알 수 없는 결과를 유발해 왔다.
  이것은 이럴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정확히 반대의 사건을 유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예상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인위적으로라도 그 예상은 깨어지고 말더라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부조리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우린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는 모순이다.
  그렇게 삶은 죽음에 의해서 단절된다. 그러나 삶은 죽음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영원한 삶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원적인 이유 공존하는 목적은 무얼까? 알 수 없는 갈등의 방황 속에서 혹시나 오늘은 무언가 되지 않을까 하는 비굴한 기대감에 젖어보지만 신은 늘 내 곁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래 죽어도 좋다’
  6연발 리벌버의 총구가 머리를 관통하는 죽음이 언제고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라도 내가 의미 있게 죽을 수만 있다면 난 언제라도 죽을 수가 있으리라 다짐해 본다.
  또 한잔을 삼켰다.
  사랑을 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받기 위해서라도 노란 옷을 입고 자결한 젊은 베르테르의 짧은 소야곡을 다시 불러 보고픈 바람으로 멋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Jonathan-Livingston-seagull-이 남긴 말 “우리는 무지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향상시킬 수도 있으며 지성과 특수 기술을 익힌 고등생물임을 자인할 수도 있다”를 내뱉고 싶었다. 젊은 나의 존재가치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어 보고픈 소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잔......’
  관념의 시간을 똑딱이는 벽시계의 규칙성을 듣는다. 의미 없이 보낸 하루라는 불가시적인 객체가 이렇게도 지대하게 맘을 파고드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은 좀 더 다른 아침을 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져 보았다.
  밤이 깊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피할 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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