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刊詩集(근간시집) 3卷(권)

  전쟁의 기억 이후, 잇달은 사회적 변혁과정이 빚어낸 이 땅 언어의 난맥상은 類型的(유형적)이면서 또 배타적인 인간관계 속에 오히려 속도감이 있고 또 예민한 감각을 가진 俗語(속어)의 뉘앙스로 더불어 개인의 향락과 사상과 생활, 그리고 생명마저도 휩쓸고 있는 느낌이 있다.
  시대는 이미, 그 언어의 현실로 말미암아 변모되고 개인의 존재는 주야로 奔流(분류)하는 俗語(속어)의 홍수 속에 浮沈(부침)하는 한 장의 枯葉(고엽)의 운명에 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言語(언어)는, 그가 결과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또 무관심하다.
  이것을 지켜보는 이가 詩人(시인)이다.
  詩人(시인)은 言語(언어)의 관찰 속에, 그 言語圈(언어권)에 속하는 인간의 意識構造(의식구조)의 변화를 주시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이 日常語(일상어)의 의미관련을 어느 방향으로 따돌리는가?에 따라 그가 바라는 번역에의 의지를 보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그 詩人(시인)의 정신의 방향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 가을 들어 풍성하게 쏟아져 나온 詩集(시집)들 가운데서 이 <日常語(일상어)의 詩語化(시어화)> 문제만 가지고 들여다보자.
  석초의 詩行(시행)에는 日常語(일상어)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格調(격조)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제 火曜日(화요일)에/ 金后蘭(김후란)과/ 成春福(성춘복)을 만나고’(새벽에 앉아)는 生存者(생존자)의 實名(실명)을 들고 나와 리리씨즘에 레알리떼를 더한 점은 확실히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꽃이나 술이나에/ 묻히어 살던/ 陶淵明(도연명)이 아니어라’
  實名(실명)에서 보다 한결 생동하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고정적인 의미연관에 묻고 안 묻고 한데 원인이 있다.
  ‘나는 華溪寺(화계사)어구/ 조용한 주택가를 걸어/ 화사한 꽃장지를 둘러보며/ 아침출근을 한다’(北漢山(북한산) 連逢(연봉))의 <아침출근>은 이미 生活語(생활어)가 아니라 화사한 뉘앙스로 번지는 안정된 措辭(조사)이다.

  朴在森(박재삼)의 것은 첫째 그 가락으로 물들어 있다.
  ‘아, 그래…알다 뿐인가’(고향소식) ‘참말로 그러긴가’(잠이 먼 밤에) ‘사돈의 팔촌이나 되던가’(피리구멍)등은, 日常語(일상어) 그대로의 土俗的(토속적)인 親近感(친근감)으로 在森詩(재삼시)의 독특한 무드를 형성해 준다.
  둘째는 그에게 없던 現實(현실)態(태)에의 관심으로 보이는 언어 현상이다.
  ‘부우연 노을 속 한 경치로서/ 조금씩 확인할 따름이다’(겨울나무를 보며) ‘再建運動(재건운동)의 수레 밑에 깔려서/ 신작로가 되고’(늪)
  또 한 가지 그에게 드문 일은 ‘내 살 냄새에 흘려/ 살 연애나 생각하는’(과일가게 앞에서)의 <살 戀愛(연애)>나,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貞陵(정릉)살면서) 같은 메타포어는 그의 새로운 방향에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金耀燮(김요섭)의 日常語(일상어) 채용은 거의 메타포어로 轉任(전임)될 때만 그 빈도가 높다. 그것도 다분히 모더니티를 의식한 메타포어에 한해서 그렇다.
  ‘穀間(곡간)에 貯藏(저장)한 것은/ 勞動(노동)의 광채 나는 收穫(수확)’(奇襲(기습))
  ‘起重機(기중기)는 시장하다.’(覺書(각서))
  ‘여름의 時間(시간)이 가득 찬 술 倉庫(창고)’(불의 契約(계약))
  ‘作業中(작업중)인 一月(일월)과 握手(악수)했다’(불씨)
  漢字語(한자어)가 가지는 메커니즘을 십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레알리떼는 뜻밖에 執拗(집요)하다. ‘국민학교 2학년짜리를 데리고/ 李氏王朝(이씨왕조)도 끝난 옛 궁성을 구경하던 일요일/ 관람료는 70원’(궁성구경) ‘배추 한 단을 품에 안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쓸 데 없는 짓은 생각지 않는다’(素朴(소박)한 니힐리스트)
  이미저리가 안정되면 바람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後者(후자)들의 方向(방향)이다.
  <書評蘭(서평란) 필자는 月末(월말)에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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