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師(대사)의 眞價(진가)살린 良書(양서)

  ‘西山大師(서산대사)’라면 아마 우리국민으로서 누구나 다 잘 앎직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는 李朝中年(이조중년)에 출현한 위대한 도승으로서 宣祖(선조)25년 ‘西紀(서기) 一五九二年(일오구이년)) 이리떼처럼 몰아오는 임진왜란을 당했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고 生民(생민)이 도탄에 빠져 再生(재생)의 길이 까마득하던 危急存亡之秋(위급존망지추)에 다다랐을 때다. 大師(대사)는 平安道(평안도) 妙香山(묘향산)에 계시다가 義州(의주)로 좌천하신 선조대왕을 찾아보고 救國(구국)의 方略(방략)을 점의했다. 그리고 八道(팔도)의 용병을 일으켜 그 弟子千餘兵(제자천여병)이 동원되어 사명ㆍ生靈處英(생령처영) 등의 首(수)제자는 각기의 용병장이 되어 사명대사는 明軍(명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점령한 小西行長軍(소서행장군)을 쳐부수고 서울을 收復(수복)하였고 處英(처영)은 幸州山城(행주산성)에서 적 군수만명을 박멸하는 大(대)전과를 거두었다. 靈圭(영규)는 승병 7백명을 거느리고 趙憲(조헌)선생과 함께 錦山(금산)에서 적병 八(팔)천명과 대결하여 육박전으로 최후에 一人(일인)도 남지 않고 전사하여 7백의 사총을 남기는 등의 구국의 활동으로 인하여 국운을 회복하고 민족을 구출한 위대한 공헌은 길이 청사에 빛나는 바이다.

  그러나 역사의 창조자이며 민족의 은인인 대사의 발자취를 이때까지 전민족 앞에 자세히 드러내어 보이지 못하였다. 그것은 마치 진흙 속에 묻혀있는 眞珠(진주)와 寶玉(보옥)처럼 대사의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이가 그 몇이나 되었으랴,
  이런 역사의 진토 속에 묻힌 대사의 얼굴을 이제 불교학자이며 現東大佛大學長(현동대불대학장)이신 徐京保博士(서경보박사)의 붓을 빌려서 남김없이 그리어내어 百萬人(백만인)앞에 公開(공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또 그것이 國民(국민)의 요청에 따라서 再(재)ㆍ三(삼)판을 내게 된 것은 더욱이 축하할 바이다.
  그것은 다만 慈悲救世(자비구세)의 佛敎(불교)정신의 발로일 뿐 아니라 憂國(우국)애족의 民族(민족)정의의 약동이었던 것이니 그 정신과 功業(공업)은 우리 민족청사 위에 불멸의 金字塔(금자탑)을 쌓아올린 것이다. 이 한권 책을 통하여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그 혼을 불러일으킴으로서 국토통일 민족중흥의 課業(과업)에 이바지된 바 크다고 본다. 徐(서)박사가 이 책을 엮은 意義(의의)는 참으로 깊숙하다고 보면서 나날이 퇴폐되어가는 민족정기와 國民道義(국민도의)를 붙들어 일으키는 유일의 교양서로서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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