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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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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泗沘時代 政局運營에 대한 새로운 인식제49회 동대학술상 인문과학 가작

Ⅰ. 머 리 말

百濟史는 그동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겨져 왔다. 이는 新羅나 高句麗에 비해 빈약한 문헌사료가 가장 큰 이유였다. 韓國古代史의 가장 중요한 사료인 󰡔三國史記󰡕 · 󰡔三國遺事󰡕는 신라 위주의 서술이었고 고구려는 그나마 중국 측 사서에 내용이 있는 편이지만 백제는 그렇지 못했다. 또한 신라의 6세기 비문들과 고구려의 「廣開土王陵碑」와 같이 그 시대상을 자세히 보여주는 金石文이 백제에는 없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년이 지난 지금 백제의 모습이 어둠속에 갇힌 것만은 아니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이나 定林寺址 · 彌勒寺址 석탑은 우리에게 백제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백제금동대향로는 형언할 수 없는 천년 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공주나 부여에 가면 백제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처럼 모습만큼은 찬란했던 백제는 그동안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백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1948년 발견된 「砂宅智積碑」, 1971년 발굴된 武零王陵, 1996년 부여 陵山里寺址에서 발견된 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그리고 최근 2009년 미륵사지 서탑을 보수하면서 개봉된 「彌勒寺 西塔 舍利奉安記」(이하 「사리봉안기」)까지 백제사 연구의 진전을 가져올 획기적인 발견이 잇따라 일어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백제사 연구의 진전을 가져오는 발견 중에서도 최근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리봉안기」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백제 武王의 익산경영에 대해 한 걸음 더 다가 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살피고자 하는 점은 미륵사 건립의 주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무왕과 善花公主가 아닌 무왕의 왕비 沙乇氏(이하 沙氏)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동안의 연구는 무왕이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자 자신의 기반이 되는 益山 경영을 시도하였고 이는 무왕의 왕권강화로 이어진다는 게 통설로 여겨졌다. 하지만 「사리봉안기」의 발견을 통해 왕비를 배출하고 좌평을 역임한 최고 귀족세력인 사씨 가문이 익산 경영의 핵심이 되는 미륵사 건립의 주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익산 경영이 실제로는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문을 시작으로 과연 무왕대 혹은 그 이전의 정국운영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그 공간 배경이 되는 백제 수도 泗沘와 천도가 시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익산이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본고의 전개는 우선 사비 천도 이전 東城王-武寧王-聖王 시기 일련의 왕권강화 정책과 이를 둘러싼 귀족세력의 권력 구도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성왕의 죽음과 관산성전투의 패배가 가지고 온 백제 왕권의 약화에 대해 알아 보겠다. 백제 왕권의 약화는 威德王代부터 무왕대까지로 보고 이 시기 외척세력으로 득세한 사씨 세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최근 발견된 자료를 바탕으로 본고를 전개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많은 선학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수많은 연구결과를 지금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뜨거운 논의 속에 부족한 필자가 근거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더군다나 백제사에 큰 관심조차 없었던 필자가 백제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너무나 큰 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짧은 배움이었으나 선학들의 논의에 필자 나름의 의문을 갖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심에서도 이를 꼭 풀어보고자 하는 열의가 생겼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맨 밑부터 배워본다는 생각으로 천년 전 백제에 접근에 보도록 하겠다. 무엇보다도 본고가 백제사 연구에 害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Ⅱ. 泗沘로의 천도과정과 왕권의 강화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천도가 많은 편이다. 漢城時期에만 하더라도 여러 차례 遷都(혹은 移宮)한 경우가 있으며 외세에 의한 것이지만 熊津遷都가 있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사비천도도 있었다. 또한 학자들에 따라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 중 聖王 16년(538) 이루어진 사비천도는 백제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사비천도는 우선 웅진시대에 지속됐던 귀족세력의 권력 쟁탈전과 이에 따른 사회혼란의 종식을 의미했다. 또 사비시대의 일로 파악되는 22部司의 설치, 5部 · 5方제도의 실시, 16官等制의 확립은 동성왕과 무령왕에 의해 시도되었던 왕권강화를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본장에서는 이처럼 백제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시킨 사비천도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비천도를 처음 계획했던 것은 동성왕이었다. 동성왕은 사비로의 천도에 앞서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을 펼쳤고 웅진시기 실추된 왕권의 회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과도한 동성왕의 전제주의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동성왕이 살해당하는 등 또 다시 내부의 분열을 야기 시켰다. 하지만 동성왕의 강압정책의 문제점을 지켜 본 무령왕은 귀족세력과 상호협력적인 관계를 만들려 노력했다. 이는 대내적인 안정을 불러왔고 이를 바탕으로 추진한 대외팽창 전략은 국왕의 권위를 신장시켰다. 동성왕 · 무령왕대에 이루어 놓은 왕권 강화정책을 바탕으로 성왕은 사비천도를 단행 중앙귀족을 비롯한 지방 재지세력에 대한 통치를 재편하며 백제의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사비시대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백제의 전성기를 마련했던 성왕이 554년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에 대한 복수전을 꾀하지만 결국 성왕 자신은 전사했고, 백제는 참담하게 패배하기 때문이다.

 

 

1. 泗沘遷都 이전의 왕권강화

 

성왕 16년 백제는 웅진을 떠나 사비로 천도한다.

 

a-1. 16년 봄에 도읍을 사비(혹은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는 남부여라 했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위의 기사처럼 단순히 천도했다는 기사만 보일 뿐 그 이유나 배경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고려했을 때 사비천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됐던 것으로 파악되며 그 시작은 동성왕 때부터로 생각된다.

 

a-2. 12년 … 9월에 왕이 나라의 서쪽 사비원에서 사냥하였고 연돌을 달솔에 임명했다.

a-3. 23년 … 겨울 10월에 왕이 사비 동쪽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11월에 웅천 북쪽 들판에서 사냥하였고 또 사비 서쪽 들판에서도 사냥을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마포촌에서 머물렀다.

 

위 기사는 동성왕이 사비로 사냥을 나갔던 기사인데 재위 기간 중 세 차례에 걸쳐 사비로 출행하였다는 것은 동성왕의 사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동성왕이 사비로 천도를 시도 했던 이유는 우선 웅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웅진이 지니는 첫 번째 한계는 웅진으로의 천도가 백제 스스로의 요구가 아닌, 밖으로부터의 강요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남진의 위협 속에 백제는 방어를 위해 웅진을 선택한 것이었지 한 나라의 수도로서 웅진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웅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국왕에 대한 친위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南來한 귀족세력들과 재지세력간의 갈등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웅진으로 천도한 후 文周王이 재위 4년만에 해구에 의해 암살되었고 解仇의 반란과 三斤王의 단명은 백제 왕실뿐만 아니라 귀족세력간의 관계가 정상적이지만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주왕의 아우 昆支의 아들인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패기 넘치는 젊은 왕인 동성왕은 혼란의 종식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동성왕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는데 그 개혁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실추된 왕권의 회복이었다.

 

a-5. 15년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이찬 비치의 딸을 보냈다.

 

먼저 a-5 기사는 동성왕과 신라의 통혼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로 이는 소위 ‘羅濟同盟’을 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혼인을 시작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는 554년 管山城戰鬪 이전까지 고구려의 南進에 공동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동성왕이 기존의 관례를 무시하며 신라와 통혼을 한데에는 군사적 동맹뿐만 아니라 왕비를 배출하던 귀족세력의 지위를 격하시키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한성시대부터 眞氏와 解氏가 왕비족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동성왕이 시행한 신라와의 통혼으로 왕비를 배출하는 귀족세력은 국정운영에서 점차 배제되었고 이들과의 연합을 통한 기존의 정국운영 방식을 탈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와의 통혼이라는 개혁정책의 목표는 결국 귀족세력의 약화를 통한 왕권의 강화였던 것이다.

 

a-6. 8년 …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에 궁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신라와의 통혼뿐만 아니라 a-6 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궁실의 중수를 통해 왕권의 성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줬으며 왕의 위엄을 드러냈을 것이다. 또한 대규모 사열은 백제의 전성기인 近肖古王 때에 보이는 것으로 이는 군사적인 면에서 왕이 전권을 장악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성왕이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귀족세력을 배제하는 정책을 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정책을 지지해 줄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성왕에게 협력적이었던 인물들은 중국 측 사서인 󰡔南齊書󰡕에 등장한다.

 

a-6. … 영삭장군 명중왕 저근은 지금까지 (저를) 도와 때마다 힘썼으며 무공이 많으니 이제 가행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이라 했습니다.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는 젊은 나이에 보좌하고 충성심 또한 본받을 만하며 일찍이 사리를 분명히하니 이제 가행영삭장군 아착왕이라 했습니다. 건척장군 여력 또한 정성을 다해 충성을 다 하고 문무가 뛰어나니 이제 가행용양장군 매로왕이라 했습니다. 광무장군 여고 역시 충성스러우며 때마다 힘써 국정을 밝게 하니 이제 가행건척장군 불사후라 했습니다. … 신이 보낸 행건척장군 광양태수 장사 고달과 행건척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 행선위장군 겸 삼군 회매 등 3인은 … 지금 나라가 평온한 것은 실로 (사법)명 등의 지략 때문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으며 해례곤을 행무척장군 불중후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목간나가 전에 군공이 있고 성문과 배를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아야 합니다. 바라건데 천은을 베푸시고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어 관직을 제수해 주십시오. … 신이 보낸 사신 중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 삼군 겸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새

 

a-6 기사에서 관작을 수여 받는 인물들의 행적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왕이나 후로 불렸고 동성왕이 직접 사신을 보내 이들의 관직을 제수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동성왕에게 있어서 정국을 운영하는데 협력했던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성왕 12년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왕족 餘氏 3명, 도한왕 저근, 중국식 성을 가진 인물 3명으로 구성되었고, 동성왕 17년의 경우에는 사씨 1명, 贊氏 1명, 해씨 1명, 木氏 1명, 중국식 성을 가진 외교사절 4명 모두 8명이 보이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웅진세력들과는 다른 동성왕의 친위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의 생각에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된 왕권을 틈타 당시 웅진을 기반으로 귀족세력이 득세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동성왕은 웅진천도 이전 한성 시대부터 백제 왕실의 친위적이었던 목씨와 사씨, 그리고 해구의 난 이후로 세력이 약화됐던 해씨, 그리고 외래인인 중국인을 등용하면서 비대해진 웅진세력을 견제하려했고 이들의 지지로 개혁정책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의 일방적인 왕권강화책은 결국 대 다수의 귀족세력에 대한 반발을 샀고 더군다나 귀족세력과의 대화조차 단절해버리는 등 의 동성왕의 행동은 왕과 귀족사이의 불화를 한계까지 다다르게 했다.

 

a-6. 21년 여름 큰 가뭄이 와서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를 먹기까지 했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신료들이 창고를 열어 구휼하여 구하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

a-7. 22년 봄에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이나 됐다. 또 못을 파고 기이한 새들을 길렀다. 신료들이 상소하여 막고자 했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궁문을 닫아버렸다.

 

위 기사는 동성왕이 귀족들의 간언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이처럼 동성왕의 지지 세력을 포함하여 대 다수의 귀족 세력은 점차 동성왕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을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됨에도 동성왕은 귀족세력 전반에 대해 계속해서 강경한 대응을 취했고 결국 재위 말기에는 대부분의 귀족세력이 자신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동성왕의 사비천도에 반대한 웅진세력의 대표자인 苩加에게 시해당하면서 동성왕이 추진했던 왕권강화 정책은 중단되고 만다. 백가가 동성왕을 시해한 것은 이전 문주왕을 시해했던 해구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탈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왕의 죽음이 백가의 계획대로는 되지 않은 것 같다. 시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여 후에나 동성왕이 죽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 백가는 동성왕의 시해에 대한 책임의 추궁을 받았을 것이고 결국 가림성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즉위 후 이를 직접 토벌에 나서 평정된다.

새로 즉위한 무령왕은 기존의 동성왕이 시도했던 왕권강화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하지만 그 방식은 동성왕의 일방적인 행동과는 달리 귀족세력을 아우르는 정책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령왕의 취한 왕권 강화책은 귀족세력의 기득권을 구체화 시키고 국가에서 이를 보장해줌으로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냈을 것이다. 이는 무령왕대에 신분제가 강화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분제의 강화는 관등제의 확립을 통해서 가능했다. 관등이란 관료들의 서열을 뜻하는 것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분별에도 그 기능이 있지만 지배층 내에서도 그 권력의 강약에 따라 차별을 줌으로서 소수 최고 귀족에 특권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결국 관등제의 확립은 이전에 유동적이던 신분제를 고정화시켰고 뿐만 아니라 귀족세력들을 신분제의 최고위에 있는 왕의 편제 아래 둠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무령왕의 왕권강화책은 이전 동성왕이 추진한 정책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 동성왕이 전개한 왕권강화 과정에서 무령왕에게 가장 크게 도움을 준 것은 혼란스럽던 귀족세력간의 갈등이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귀족세력간의 분열이 종식된 가장 큰 이유는 동성왕의 강경한 왕권강화책에 대한 불만이 공통적인 요소로 작용하여 그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동성왕에 대한 반발심뿐만 아니라 오랜 분열이 가져다준 그들 스스로의 세력 약화와 백제 중앙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성장했을 지방 세력에 대한 견제가 백제 중앙 귀족을 하나로 묶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귀족세력의 내부 결속은 범 귀족차원에서 무령왕의 즉위를 지지함으로서 웅진천도 초부터 이어온 귀족내부의 갈등을 종식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무령왕대의 대내적인 안정은 백제의 활발한 대외정책에 배경이 되었다. 또한 무령왕은 활발한 대외정책을 왕권강화의 방법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무령왕이 취했던 대외정책 중 하나는 웅진천도 이후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무령왕은 즉위 원년부터 강력한 북방정책을 시도한다.

 

a-8. 원년 … 겨울 11월 달솔 우영에게 병사 5,000명을 이끌고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하게 했다.

a-9. 2년 … 겨울 11월 병사를 보내 고구려 변경을 공격하게 했다.

a-10. 3년 말갈이 마수책을 태우고 고목성을 공격하니 왕이 병사 1,000명을 보내 공격하여 퇴각시켰다.

a-11. 6년 … 7월 말갈이 와서 고목성을 함락시키고 6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a-12. 7년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다시 쌓아서 말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와 말갈이 모의하여 한성을 공격하려고 황악 아래에 진을 쳤다. 왕이 군사를 보내 싸우게 해서 퇴각시켰다.

a-13. 12년 … 가을 9월에 고구려가 가불성을 공격하여 취하고 병사들을 이동시켜 원산성도 함락시켰다. (이때) 살육하고 약탈함이 매우 심했다. 왕이 날랜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인들이 왕의 병사가 적음을 보고 쉽게 보고 진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나가서 갑자기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위 기사는 무령왕대의 북방진출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즉위 원년부터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위 기사에 등장하는 고구려와의 격전지는 대부분 고구려에 상실한 한강유역으로 비정된다. 즉 고구려와 전투는 상실한 舊土에 대한 회복전이었던 것이다. 무령왕대의 북방 진출은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했던 귀족세력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무령왕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기반이 한강유역이었던 백제 왕실에 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회복은 왕권을 유지하기 하려면 반드시 행해야 하는 필연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이는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성왕이 신라와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을 위한 전쟁을 벌이는 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된 무령왕의 구토 회복운동은 즉위 원년에 시작해서, 13년 황악전투에서 무령왕이 직접 친정에 나섰고 그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며 끝이 난 것으로 파악된다. 결론적으로 집권 초기부터의 대고구려전은 당시 실질적인 권력이었던 군사권을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집중시켰고 군사권을 기반으로 귀족들을 통제함으로서 백제 왕권의 신장을 촉진시켰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무령왕의 왕권강화 정책과 국내외 정세의 안정은 웅진천도 이후 지속되었던 혼란을 종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국력 회복은 국제적인 지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a-14. 21년 … 겨울 11월 양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이겼다고 하였다. 수년간 쇠퇴하고 약했다. 이에 표를 올리니 고구려를 여러 차례를 이겼음을 알리고 함께 좋게 지내기를 시작하고자 했다. 다시 강국이 되었다. 12월 고조가 조서를 내려 책봉하기를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여륭은 바다 밖의 번국을 지키며 먼 곳에서 조공하는 일을 하여 정성을 보이니 짐은 매우 기쁘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영명을 제수하니 사특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이 가하다 하겠다.”

 

무령왕 21년 梁에 사신을 보내며 고구려를 이겼다는 내용을 전하자 양에서 백제가 이전의 국력을 회복했음을 인정하는 기사다. 더불어 그 다음 달에는 무령왕이 ‘使特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되면서 당시 고구려의 안장왕보다 높은 작호를 받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실추된 백제 국왕의 국제적인 지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령왕에 이어 즉위 한 성왕은 이전 동성왕과 무령왕이 이루어 놓은 대내외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백제를 다시금 전성기로 올려놓는다.

 

 

2. 泗沘로의 遷都와 신진세력의 성장

 

성왕은 재위 16년 만에 백제의 수도를 사비로 천도한다. 사비천도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성왕 때부터 계획된 사업이었다. 하지만 동성왕의 시해로 중단되었다. 왕권강화라는 일맥에서 살펴본다면 무령왕도 사비로의 천도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령왕 재위기간에 사비천도로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이유는 동성왕의 강경한 왕권강화책에 대한 귀족세력의 불만을 없애고 안정책을 추구했던 무령왕의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왕대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무령왕은 귀족세력과의 상호 안정을 목표로 사비천도 계획을 중지하였지만 성왕대에는 어느 정도 대내외적인 안정기가 찾아왔고 동성왕과 무령왕에 의한 왕권강화책은 실효를 거둬 이전 웅진시기의 다른 왕들에 비해 왕권이 강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왕이 어째서 16년간이라는 시간을 웅진에서 보냈던 것일까라는 데에는 의문이 든다. 이 점에서 필자는 성왕대에 성장한 새로운 세력을 주목하고자 한다.

 

a-15. 원년 … 가을 8월 고구려병사가 패수에 다다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했다. (이에) 싸워 고구려군을 퇴각시켰다.

a-16. 7년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이 직접 병마를 이끌고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기병 30,000명을 이끌고 오곡의 벌판에서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3,000명이 죽었다.

a-17.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하여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a-15 기사를 보면 성왕 원년 좌장 지충이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 지충은 그 출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존의 ‘大姓八族’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과는 다른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성왕은 자신이 등용한 신진세력의 승리로 집권 초반의 상대적으로 약한 권위를 신장시켰을 것이다. 이어서 봐야할 것이 성왕 7년과 18년에 잇따른 백제의 패배이다. 이 전투의 패전 책임은 결국 연모와 연회로 대표되는 燕氏 세력이었을 것이다. 연씨 세력은 웅진천도 이후 등용된 세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패배는 사비천도를 전후로 하여 웅진을 중심으로 한 구귀족 세력의 약화를 불러왔을 것이다. 신진세력의 등장은 이 뿐만 아니다. 성왕은 分枝化 된 왕족 세력을 중용하며 왕을 중심으로 한 정국운영 또한 가능케 했을 것이다.

 

a-18. 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장군삼귀 · 상부의 나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이에 덕솔 동성자막고를 바치고 이전에 번을 섰던 동성자언과 교대시켰다. …

 

위 기사는 왕족인 여씨에서 분화된 새로운 가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사에 보이는 東城氏의 경우 무령왕이 즉위하면서 방계가 된 동성왕의 후손들을 이르는 말로 성왕대에 형성된 성씨로 추정된다. 동성씨 뿐만 아니라 백제말기의 인물로 黑齒 · 階伯 · 難 · 鬼室氏의 경우에도 왕족에서 분화되었던 점을 살펴보면 귀족세력 중에 성은 다르나 그 계보가 왕실에 해당하는 가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大姓 가문과는 다르게 왕족에 협조적인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성왕대에 중용 되면서 왕권강화에 큰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日本書紀󰡕에 성왕대에 해당하는 기사 중 여러 차례 등장 하는 己氏의 경우에도 성왕에 의해 등용된 신진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왕이 이처럼 신진세력의 성장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대성 가문 중 자신에게 협조하는 세력 또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a-19. 12월 백제의 성명왕이 이전의 조서를 다시 군신들에게 보이며 말하길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으니 마땅이 다시 같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상좌평 사택기루 · 중좌평 목협마나 · 하좌평 목윤귀 · 덕솔 비리막고 · 덕솔 동성도천 · 덕솔 목협미순 · 덕솔 국수다 · 나솔 연비선나 등이 같이 의논하여 말하길 ….

 

a-19 기사는 성왕대 최고위 관직인 佐平을 어떠한 세력이 점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 기사는 사비천도 이후의 기사인데 당시 좌평직은 사씨와 목씨에 의해 독점되어진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 때 사씨와 목씨 세력은 성왕의 정국운영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씨는 웅진시기부터 백제 중앙 정부에 등용되어오던 세력으로 錦江 유역권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추정된다. 사씨 세력은 웅진으로 천도와 함께 성장했으며 사비 천도 이후에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가문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목씨의 경우에는 이미 한성시기부터 백제왕실에 친위적인 성격의 가문으로 이들의 출자는 직산에 위치했던 목지국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 사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력 근거지와 인접한 사비 지역으로의 천도를 환영했고 목씨 세력은 왕실에 친위적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성왕은 이들을 대성 가문의 대표자격인 좌평에 임명함으로서 귀족세력을 통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왕이 자신이 성장시킨 귀족세력과 친화적인 관계만이 지속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대에도 그랬듯이 백제의 발상지였던 한강유역의 회복은 백제 왕실에 있어서는 왕실의 권위 신장에 꼭 해결해야할 과제였다.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성왕 또한 한강유역의 확보는 자신이 전개해 나가는 왕권신장에 있어서 꼭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때마침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고구려가 세력이 양분되어 내란으로 치달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고 이를 성왕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성왕의 권력 신장에 협조적이었던 사씨나 목씨 혹은 國氏 등의 귀족세력이 한강유역 회복에 찬성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은 또 한번 귀족세력의 재편을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왕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고자 일본에 지원병 요청을 했을 때 진모선문과 같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진씨 세력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았나 싶다. 사 · 목 · 국씨로 대표되는 사비세력이 한강유역에 대한 공격을 반대했다는 것은 다음 기사를 통해 드러난다.

 

a-20. … 여창이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기로들이 간하기를 “하늘이 함께하지 않으니 화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여창이 말하길 “늙었구려. 어찌 겁냅니까. 우리는 대국을 섬기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마침내 신라에 들어가 타모라새를 지었다. …

 

성왕 32년(554)에 해당하는 위 기사는 신라로부터 한강유역을 재탈환하고자 하는 성왕 혹은 여창(威德王)의 의지를 耆老들이 반대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기로들은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사 · 목 · 국씨 즉, 사비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백제는 크게 패배하였고 성왕마저 전사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의 패배는 귀족들의 세력이 왕권을 초월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위덕왕 이후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왕의 정국운영 방식을 살펴보면 이전 동성왕과 무령왕이 행했던 방식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이를 장점만을 선택하여 효과적인 운영방식을 만든 듯하다. 하나의 귀족세력이 거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견제하는 세력을 키워냈고 마찬가지로 새롭게 성장한 세력을 이전의 집권 귀족세력을 이용해 적절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왕은 동성왕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과 무령왕의 귀족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정국 운영에 모두 반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왕은 한강유역의 수복이라는 백제 왕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집착하며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론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백제의 대패로 웅진시기부터 진행해온 왕권강화 정책을 수포로 만들어버렸다.

 

 

 

Ⅲ. 管山城戰鬪 패배 이후 귀족세력의 득세

 

 

관산성에서의 패배는 백제에게 있어 너무나도 크나 큰 타격이었다. 패배에 따른 물리적인 피해도 피해였지만 무엇보다도 성왕에 의해 안정기를 맞이했던 백제의 중앙 정계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왕권의 쇠퇴와 귀족세력의 득세이다. 전쟁의 패배 책임은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위덕왕에게 가장 크게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위덕왕이 귀족세력의 성장을 방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덕왕은 다양한 정책을 통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활발한 對中國 외교의 전개이다. 하지만 실제 큰 효력은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위덕왕 사후 외척세력으로 성장한 사씨 세력에 의해 惠王과 法王이 즉위하는 등 왕실의 권위는 회복불능의 상태까지 떨어지고 만다. 무왕의 경우에도 방계 왕족 출신으로 사씨 세력에 의해 즉위했다. 무왕대에는 사씨 세력의 힘이 이전 시기보다 더욱 신장하였다. 사씨 세력은 무왕의 외척으로 대신라전을 주도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익산을 성장시키며 경제적 · 사회적 기반을 확장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씨 세력의 익산의 경영은 최근에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증명되었다.

하지만 결국 義慈王이 즉위하면서 외척세력에 대한 숙청이 단행되었고 위덕왕 즉위 이후 권력에 배제되었던 신흥귀족세력이 다시 부상했다. 이러한 귀족세력의 분열은 의자왕 말기까지 이어져 백제 멸망의 대내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 管山城戰鬪 패배에 따른 왕권의 약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비천도 후 성왕은 내외로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키며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또한 신흥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 대성팔족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한다. 이러한 대내 정책 이후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수복, 蓋鹵王 때 당했던 치욕을 일부분이나마 되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신라에 의해 수복한 한강유역을 다시 잃고 만다. 이에 성왕은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전개한다. 하지만 당시 왕자인 여창(위덕왕)에게 가던 중 신라군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백제군도 신라군의 공격으로 대패를 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에게는 크나큰 타격이었다.

 

b-1. 15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과 가량이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 우덕 ·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로 나아가 교전하였다.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습격하여 백제왕을 살해했다. 이에 군대가 승기를 타 크게 이겼다. 좌평 4인과 군사 29,600명을 죽였고 말 한필 돌아가지 못했다.

b-2. 8월 백제의 여창이 신하들에게 이르길 “소자는 지금 청이 있는데 돌아가신 왕을 받들고자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한다.” (이에) 신하들과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지금 군왕께서 출가하여 수도하신다면 마땅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게도 전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고 후에는 큰 환란이 있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대저 백제를 고려와 신라가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처음 개국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의 종묘를 장차 어느 나라에 주려 하십니까? 모름지기 도리를 따르는 것은 명에 응하는 것이 분명하나 耆老의 말을 따랐으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청컨대 전에 잘못을 고치시고 속세를 나서는데 힘쓰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하고자 하시면 나라의 백성들을 출가시키십시오.” (이에) 여창이 대답하기를 “좋다”라 했다. 즉시 신하들에게 도모하도록 했다. 신하들이 상의를 마치고 100인을 출가시켰다. 그리고 幡蓋를 만들어 여러 가지 공덕을 행했다.

 

b-1 기사에서 등장하는 물리적인 피해를 살펴보면 좌평 4인과 약 30,000에 이르는 인적피해가 있었다. 신라 측 자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백제에게는 치명적인 패배임에는 확실하다. 특히 좌평 4인이라 함은 왕의 측근세력들의 전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의 정치적 기반 약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b-2 기사는 이러한 위덕왕의 실추된 왕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기로들로 표현되는 당시 실권 귀족들에 의해 위덕왕의 결정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패배는 위덕왕의 즉위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삼국사기󰡕의 경우 554년 위덕왕의 즉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의 경우 3년 후인 557년으로 위덕왕의 즉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위덕왕의 즉위가 순탄치만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위덕왕은 나름대로의 왕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활발한 대중국 외교를 통해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는 점이다.

 

b-3. 14년 9월에 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b-4. 17년 고제의 후주가 왕을 사지절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임명했다.

b-5. 18년 고제의 후주가 다시 왕을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임명했다.

b-6. 19년 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

b-7. 24년 7월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 11월에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b-8. 25년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b-9. 28년 왕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수의 고조가 조칙을 내려 왕을 상개부의동삼사 대방군공으로 임명했다.

b-10. 29년 정월에 수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b-11. 31년 11월에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b-12. 33년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b-13. 36년 수가 진을 평정하였다. (이때) 배 1척이 탐모라국에 표류하였다. 그 배가 돌아가고자 우리의 국경을 지나가려 하니 왕이 매우 후하게 베풀어서 보냈다. 더불어 사신과 글을 보내 진의 평정을 치하했다.

b-14. 45년 9월 왕이 장사 왕변나를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수와 요동의 싸움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군이 되기를 청했다.

 

위 기사가 보여주듯이 위덕왕대의 외교는 대부분 중국왕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위덕왕대가 백제사상 가장 많은 대외교섭 횟수를 가졌다는 점은 이 시기 대외관계가 매우 중요한 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전 시기와의 차이점은 남북조 양국을 대상으로 하여 활발한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덕왕의 적극적인 대중국 외교라는 선택은 내부 정정의 불안 타개 · 신라 眞興王의 영토팽창에 따라 전쟁 수단을 통한 왕권신장의 돌파구를 찾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는 점이 때문 이었다. 뿐만 아니라 周禮의 6관제 채용을 통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北朝 국가가 왕권강화기반을 노리는 위덕왕에게는 훨씬 부합되는 외교 대상이었다. 이러한 대중국 외교를 통해 위덕왕은 4차례에 걸친 책봉을 받게 되는데 이는 백제의 국제적인 지위획득과 함께 백제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덕왕의 대외정책은 실제로 큰 효력은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인 인정만 있었지 대내적인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가 겪었던 위기는 계속된 전쟁에서의 패배였다. 위덕왕 원년 10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고, 8년 7월에는 신라에게 대패하였다. 이 후 24년 10월에도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가 이찬 세종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다. 이와 같은 계속된 침략과 패배는 관산성 전투 이후 계속된 백제의 위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내적인 위기의식을 위덕왕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며 실질적인 왕권의 강화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위덕왕 말년에 수나라에 군도를 청한 것에 대해 고구려가 보복으로 국경을 침범한 사건은 귀족들에게 있어 더 이상 위덕왕을 신뢰할 이유를 사라지게 하는 결과였다. 결국 이러한 위덕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은 위덕왕의 후계 문제에서 드러나고 있다.

 

b-15. 5년 여름 4월 정축 초하루에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했다.

 

위 사료는 위덕왕이 사망하기 1년 전인 597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백제 왕자가 등장한다. 즉 위덕왕에게는 직계 자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덕왕에 이어 즉위하는 것은 위덕왕의 동생인 惠王이다. 혜왕의 경우 기록이 매우 적고 법왕과 마찬가지로 단명하였기 때문에 그의 왕위 계승과 재위기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위덕왕에게 왕자가 있었음에도 동생인 혜왕이 즉위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정치적 이유라 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귀족세력의 불안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덕왕의 계속된 왕권강화 시도는 귀족세력에게 있어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행동이었다. 이에 왕자인 아좌를 배제하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동생인 혜를 즉위시킨다. 이후 혜왕은 2년 만에 단명하였고 아들인 法王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가계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귀족세력은 어째서 혜왕과 법왕 부자를 선택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필자의 생각에 혜왕과 법왕의 경우 당시 실권자였던 사씨 세력과 정치적인 결합을 위한 정략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관계는 혜왕이나 법왕의 의지보다는 사씨 세력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사씨 세력이 위덕왕의 왕권 강화정책을 견제하고 왕비족으로 상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혜왕에게 접근하였고 위덕왕 사후 자신이 지녔던 실권을 이용하여 혜왕의 즉위를 도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사씨 세력은 의도대로 왕비족으로서 왕실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는 무왕의 왕비가 사택씨라는 「사리봉안기」를 통해 증명할 수 있다 하겠다. 하지만 왕비족으로 상승한 사씨 세력은 더 이상 왕권과 대립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왕권의 신장이 결국 왕비족인 자신들의 세력성장과도 비례하였기 때문에 법왕의 불교 숭상이나 무왕의 미륵사 창건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자신들의 권위 신장을 더불어 꾀했을 것이다.

 

 

2. 武王의 즉위와 沙氏勢力의 益山經營

 

무왕의 출자는 기록마다 그 내용이 상이하다.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 法王禁殺條 · 󰡔隋書󰡕 · 󰡔翰苑󰡕에 따른 법왕의 아들설 · 󰡔삼국유사󰡕 武康條와 法王禁殺條의 細註에 따른 池龍과 貧母의 아들설 · 󰡔北史󰡕에 따른 위덕왕 아들설이 있다. 이와 같은 異說들의 존재는 무왕의 계보가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다만 무왕이 왕족 출신인 점은 분명했고 출생 이후 어떤 정치적 음모에 몰락하거나 혹은 방계왕족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근거지를 익산으로 옮기면서 그곳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직계왕족이 아닌 무왕의 즉위는 어떻게 가능하였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살핀바와 같이 당대의 실권 세력은 사씨 세력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혜왕과 법왕이 즉위했음을 서술했다. 필자는 무왕 또한 사씨 세력에 의해 즉위하였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사씨 세력의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서는 그들이 조종하기 쉬운 인물이어야 했을 것이고 몰락한 왕족 혹은 방계왕족인 무왕이 그들에게는 적임자였을 것이다. 결국 무왕의 즉위는 관산성전투 패전 이후의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무왕 즉위를 백제의 왕권강화로 인식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는 무왕의 즉위를 두고 왕권강화라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한다. 오히려 무왕은 사씨 세력에 의해 즉위했고 무왕 재위기간 내내 사씨 세력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b-16. 3년 8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아막산성(모산성)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정기병 수천명을 보내 막아 싸우게 했다. 우리가 군사가 이로움 없이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 외석 · 천산 · 옹잠 네 곳에 성을 쌓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오니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로 하여금 병사 40,000명을 이끌고 네 곳의 성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이 무리를 이끌고 막으니 해수가 불리하여 군사를 천산 서쪽 대택 안에 숨기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기를 타고 갑졸 1,000명을 거느리고 대택으로 쫓아왔는데 복병이 일어나 습격하니 무은이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크게 소리치며 말하길 “내가 일찍이 스승께 배우기를 군사는 마땅히 전투에서 퇴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도망쳐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소장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 죽었다. 남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군사가 패하고 해수는 간신히 면하고 단마로 돌아왔다.

 

b-16 기사를 보면 좌평 해수가 4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와 전투를 벌였지만 겨우 혼자 돌아올 정도로 대패 했다는 것이다. 이 아막성 전투의 패배에 결과에 대해서 무왕이 국왕의 권력 강화로 이용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 전투의 결과는 무왕의 권력 강화이기 보다는 사씨 세력의 확실한 주도권 확보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성팔족의 한 세력으로서 한성시기부터 존속해온 해씨 가문이 권력의 확보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귀족세력 내부에서는 사씨 세력의 권력 독점화가 심화 된 것이다. 이 후 다른 귀족 세력들도 사씨 세력의 통제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무왕대 집중되었던 대신라전의 주도권을 사씨 세력이 장악하면서 군사권까지 장악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무왕 17년 달솔 백기의 신라전 승리는 그 배경에 사씨가 존재하였을 것이고 무왕 28년 사걸이 신라에 크게 승리하면서 이러한 사씨 세력의 집권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씨 세력이 대 신라전을 전개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왕대의 대 신라전은 대체로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전쟁이었다. 관산성 전투에 참가한 대가야는 패전 이후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항하지 못하고 진흥왕 23년(562) 항복하고 만다. 대가야의 항복은 주변 소국에도 영향을 끼쳤고 가야 소국들은 대부분 신라에게 항복하고 만 것이다. 이는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줄이는 결과를 불러왔다. 무왕대 전투 지역에 대한 비정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가야지역 즉, 전라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옛 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은 사비-익산에 걸친 금강유역에 그 기반이 있는 사비의 실권인 사씨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 확충과 권력 유지를 위해 한강유역이 아닌 새로운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결국 이는 다수의 대 신라전을 전개해 나감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야지역에 대한 전쟁만 전개해 나간 것은 아니었다. 백제 왕실의 왕비족으로서 사씨 세력은 백제가 반드시 풀어야할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회복 또한 시도했다. 무왕 28년 대 신라 전투는 기록에도 나오듯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전이었다. 이러한 한강유역에서의 전쟁은 사씨 세력이 非 사비세력의 포용의 하기 위한 의도도 내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씨 세력의 대외 팽창 전략은 이전 무령왕이나 성왕이 시도했던 균등정책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무왕대에 와서는 형태는 같으나 그 주체가 국왕에서 왕비족으로 부상한 사씨 세력으로 바뀐 것이었다.

사씨 세력은 대외팽창 전략 외에도 왕실의 권위를 높임과 동시에 왕비족인 자신들의 권위 신장을 동시에 시도했다. 이러한 왕실 권위 신장은 무왕대 대규모 사찰건립을 통해 진행되었다. 무왕대의 대규모 사찰 건립은 대표적으로 王興寺와 彌勒寺 창건이다. 먼저 왕흥사 창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b-17. 2년 봄 정월에 왕흥사가 창건되고 승려 30인을 두었다.

b-18. 35년 봄 2월 왕흥사가 완공되었다. 그 절은 물가에 인접했고 그 장식이 매우 화려했다.

b-19. … 다음해 승려 30명을 두어 당시 수도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왕흥사를 창건했다. 처음에 겨우 기초를 세우다가 승하했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부친이 기반에 아들이 지어 수십년이 지나 완성했다. 그 절은 또한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가 임했으며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물을 건너 절에 들어갔는데 그 경치의 뛰어난 장려함을 찬양했다.

b-20. … 또 사비 절벽에 또 바위가 하나 있어 10여 명이 앉을 만한 것이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행차하여 예불하려 하면 먼저 이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했다. (그러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지니 돌석이라 불렀다.

 

왕흥사는 부소산성 맞은편에 있는 사찰로 법왕 2년부터 무왕 35년에 완성된 거대한 공사였다. 왕흥사라는 명칭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이는 왕실의 원찰로서 사비지역을 대표하는 절이었을 것이다.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산을 등지고 물에 인접하는 풍광이 좋은 곳이었으며 그 장식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또한 b-20 기사를 보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하러 가기 위해서는 사찰 맞은편에 돌석이라는 곳에서 미리 예불을 드리고, 배를 타고 향행의식을 거행하면서 절에 들어갔다고 한다. ‘돌석’이라는 이름은 왕이 왕흥사 예불 전에 그 돌에 올라가 미리 예불을 할 때 그 돌이 스스로 뜨거워졌기 때문에 연유된 것이었다고 한다. 돌이 스스로 뜨거워졌다는 의미는 그만큼 돌 위에서의 국왕이 성대한 의식을 베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배를 타고 향행의식을 베풀며 왕흥사로 들어갔다. 이런 화려한 의식의 주체는 국왕일 것이고 이러한 성대한 의식을 베푸는 의도는 왕의 권위 신장일 것이다.

왕흥사보다 주목되는 것은 미륵사의 창건이다. 미륵사의 창건은 그동안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무왕과 선화공주로 파악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사리봉안기」의 발견은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무왕의 왕후이며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졌다.

 

b-21.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으셨다. 그래서 왕궁에 태어나시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을 보이셨으며, 8해의 사리를 남기시어 삼천대왕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로) 하여금 일곱 번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하였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으셨기에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태어나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길러주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으니, 이에 공손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니다. 세세토록 하는 공양이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으로써 우러러 자량이 되어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니다. 왕후당신의 마음은 수경 같아서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영원토록 다함께 복되고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미륵사 서탑에서 발견 「사리봉안기」를 통해 보면 미륵사 전체를 백제 왕후가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사씨 세력이 미륵사를 건립한 이유는 왕흥사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웅장한 사원 조성을 통해 왕의 권위 신장이 그 1차적인 목표인 것이었다. 하지만 왕의 권위 신장도 큰 목표 중 하나였지만 미륵사의 조성은 익산경영이라는 사씨 세력의 정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익산은 청동기시대 이래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의 문화중심지의 하나였으며, 수로교통이 편리하고 또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익산이 의미하는 것은 사씨 세력의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익산은 준왕이 남하하면서 정착한 곳으로 건마국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고 건마국은 마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처럼 익산은 일찍부터 금강유역의 중심지로 이곳을 기반으로 한 재지세력이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재지세력을 사씨 세력이 아닐까 추측한다. 결국 무왕대에 익산경영은 왕비족으로 부상하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사씨 세력이 자신의 기반 확충을 위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익산의 미륵사뿐만 아니라 왕궁리 · 제석사 건립 등 모두가 사씨 세력의 주도에 의한 것으로 실재하지는 않았지만 익산으로의 천도도 사씨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가야지방으로의 진출도 익산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을 것이다.

 

 

 

Ⅳ. 맺 음 말

 

 

지금까지 사비천도를 전후로 한 백제 중앙 귀족의 존재 양태를 살펴보았다. 본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서 사비천도를 전후로 백제의 정국운영에 관한 필자 나름의 견해를 피력해보도록 하겠다.

사비천도는 동성왕 때부터 추진된 것으로 파악된다. 동성왕은 여러 차례 사비로의 전렵을 시행하면서 사비로의 천도를 준비하였다. 동시에 외세에 의한 웅진 천도 이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귀족세력의 권한을 억누르는 등의 강압책으로서 자신이 등용한 신진세력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은 동성왕의 시해로 사비천도와 더불어 왕권강화 정책은 중단되고 말았다. 뒤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동성왕과는 다른 정책을 펼쳤다. 그 또한 백제의 국왕으로서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원했다. 하지만 이전의 강압책과는 다른 귀족세력과의 공존을 도모함으로서 이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무령왕 정책 중 신분제의 확립은 왕족과 귀족의 지배권한을 확고히 함으로서 이들의 특권을 공인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지배층의 권한에 대한 구체화 작업은 웅진시기 이후 성장과 쇠퇴의 반복으로 혼란했던 귀족세력의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령왕 시기에는 실추된 옛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무령왕 대의 북방정책은 왕을 중심으로 한 군사권이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먼저 언급한 귀족세력의 갈등의 완화와 함께 뒤이어 성왕이 개혁정치를 펼 수 있게 되는데 기반이 되었다.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성왕은 동성왕과 무령왕이 이루어 놓은 왕권강화와 대내외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중앙정치구조와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 그리고 왕권강화 정책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사비천도를 시행함으로서 백제의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필연일 수 밖에 없는 한강유역의 회복에 대한 집착으로 사비 세력과의 갈등을 야기시켰고 관산성 전투의 패배와 성왕의 전사는 결국 그간의 왕권강화 정책을 모두 수포로 만들어 놓은 결과를 초래했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의 왕권은 귀족세력에 의해 잠식당한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어렵게 즉위한 위덕왕은 활발한 대중국 외교의 전개를 통해 왕위 권위를 대외적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에서의 패배 등 대내적인 악재 속에 왕권의 회복은 실현 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위덕왕 사후 사씨 세력이 혜왕을 옹립하면서 한성시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왕비족으로 부상하여 백제 중앙 정계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혜왕과 법왕 그리고 이어 즉위하는 무왕까지 모두 사씨 세력에 의한 정국운영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왕들이 사씨 세력과 대립하지 않았던 것은 왕비족으로 사씨 세력이 왕권을 실추시키는 정책은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사씨 세력은 왕의 권위 신장과 함께 왕비족으로서 자신들의 권위 또한 성장시키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사씨 세력은 가야지역에 대한 전쟁과 한강유역에 대한 전쟁을 주도함으로서 백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기반 확충 또한 이루어 나갔다. 사씨 세력이 주도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점은 佛事 활동이다. 그 예가 왕흥사와 미륵사 의 창건이다. 모두 왕실의 원찰로 파악되는데 왕위 권위 신장은 왕비족이었던 자신들의 권위 신장과도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씨 세력은 적극적으로 대규모 사찰 건립을 통한 왕권 성장을 시도했을 것이다. 미륵사의 경우에는 왕권의 신장도 그 목표였지만 익산을 재지기반으로 하는 사씨 세력의 익산 경영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백제는 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에 이어지는 동안 왕권과 귀족세력의 상호관계가 백제 정국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왕이 귀족을 통제하기도 하지만 귀족이 국왕권을 좌우하는 등 세력이 커지기도 했다. 목표는 달랐지만 이들은 백제의 지배층으로서 서로 상호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결국 국왕과 귀족이라는 양분된 구조에서 근본적인 공존의 관계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백제는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외래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 집단 간의 이중성 혹은 괴리현상이 매우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백제가 가지는 기본적인 취약점이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정치 · 사회사는 이 같은 이중성 내지 이질성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비천도를 전후로 한 백제도 이와 같은 문제를 풀고자 하는 국왕과 귀족세력간의 결합과 대립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안정기를 만들어낸 무령왕 · 성왕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역량으로 이들 세력의 요구를 절충하여 수용했던 결과가 안정기로 보인 것이지 결국 구조적인 모순은 해결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백제 말기까지 이어졌고 결국 지배층의 분열은 백제 멸망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동성왕부터 무왕까지 백제의 정국을 살펴보면서 본고에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중앙의 정치제도나 지방의 통치제도, 당시 불교계와 왕권의 결합 등이 본고에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다. 글을 준비하고 완성한지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오직 필자의 노력 부족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가졌던 필자 개인의 의문마저 다 해결하지 못한 체 본고를 마무리 하는 것 같아 아쉬움만이 남는다.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본고의 부족함을 채워보도록 하겠다.

<參 考 文 獻>

 

史料

󰡔三國史記󰡕

󰡔三國遺事󰡕

󰡔日本書紀󰡕

󰡔宋書󰡕

󰡔南齊書󰡕

󰡔隋書󰡕

󰡔翰苑󰡕

󰡔北史󰡕

 

單行本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이기동, 󰡔백제의 역사󰡕, 주류성, 2006.

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2003.

 

學位論文

김주성, 󰡔百濟 泗沘時代 政治史 硏究󰡕,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양기석,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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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究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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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무왕대 불교계의 동향과 미륵사」, 󰡔한국사학보󰡕37, 고려사학회, 2009.

김수태, 「백제의 천도」, 󰡔한국고대사연구󰡕36, 한국고대사학회, 2004.

, 「백제의 사비천도 불교」, 󰡔대구사학󰡕95, 대구사학회, 2009.

, 「백제 무왕대의 대신라 관계」, 󰡔백제문화󰡕42,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0.

김주성, 「백제 무왕의 정국운영」, 󰡔‘대발견 사리장엄 彌勒寺의 再照明’ 학술대회집󰡕,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 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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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益山지역 정치체의 史的 전개와 百濟史上의 益山勢力」, 󰡔마한백제문화󰡕15,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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