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詩僧(시승)의 淸雅(청아)한 숨결

  분명히 글은 곧 사람이다. <영혼의 母音(모음)>의 저자 法頂(법정)스님을 아는 사람은 그의 글이 곧 그의 인간이고 그의 생활임을 의심치 않는다.
  奉恩寺(봉은사) 경내 구석진 곳 기나긴 여름날에도 진종일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어릿거리지 않고, 산새들조차 기웃거리는 일이 없는, 이 세계의 외곽지대 같은 곳에 茶來軒(다래헌)이란 이름의 세평 남짓한 書舍(서사) 한 채가 있다. 이 書舍(서사)가 바로 스님의 거처이다. 스님은 거기에서 동화책과 詩集(시집)을 읽고 쇼팽을 듣고, 詩(시)를 쓴다. 그는 실지로 詩(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詩人(시인)이지만, 그 보다도 詩(시)를 生活(생활)하고 있는 詩人(시인)이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 들으며 안개에 가린 下界(하계)를 굽어보고,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다리는 道仙(도선)의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스님은 결코 동양식의 은둔거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샤르트르型(형)의 自由人(자유인)이다.
  그래서 몸은 산에 머물러 있어도 눈은 社會(사회)와 현실을 늘 노려보고 있다. 부정선거가 있고 거리에 데모가 소란할 때엔 어느새 世宗路(세종로) 한구석에 나타나 한두 마디 가시 돋힌 발언을 독백하기도 한다. 비뚤어지고 더러운 것은 몹시 못마땅해서 늘 팽팽한 저항의식을 품는다. 그에겐 動(동)과 靜(정), 꿈과 현실, 이런 것이 묘하게 조화되어 있고, 한 말로 동양의 禪(선)과 서구적 知性(지성)으로 그 感性(감성)이 잘 단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멋쟁이 知性宗敎人(지성종교인)이 그 때 그 때에 쓴 글을 모은 책이 곧 <영혼의 母音(모음)>이다. 書評者(서평자)는 과장 없이 말해서 그 책을 앉은 자리에서 발을 새워가며 다 읽었고, 어떤 글은 두 번 세 번 읽었다. 글은 곧 사람이어서 사람이 멋있으면 글에도 그 것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글이 서투르면 안타깝게도 전달이 안 된다.
  그러나 法頂(법정)스님은 누구보다도 글을 잘 쓴다. 그의 글에선 빛이 나고 윤이 흐르고 영농한 색채가 그림을 이룬다. 여기에 닥치는 대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우리들 몸에도 붉은 피 대신 연둣빛 樹液(수액)이 흐르는 五月(오월), 허리가 굽은 할머니도 정결한 鶴(학)처럼 새 옷으로 갈아입고 휴우휴우 고개를 넘어 山寺(산사)를 찾는다. 눈을 반만 뜨신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며 나붓이 엎드려 절을 한다… 그래서 초여름의 山寺(산사)는 날마다 잔치집처럼 들떠있다. 메마른 世情(세정)에도 달무리 같은 溫度(온도)가 배는 연둣빛 잔치가’(부처님 오신 날) 散文(산문)이 이쯤 되면 詩(시)와 구분이 안 된다.
  나는 스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淸雅(청아)한 글을 읽을 수 있는 행복을 감사하고, 그 맑디맑은 感性(감성)과, 착하고 곱고 앳된 原初的(원초적)인 영혼의 숨결에 그만 젖어버린다.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하신 분이 있으면 꼭 한번 읽어서 書評者(서평자)와 같은 감격을 체험하라고 권고하는 바이며 合掌(합장)하여 스님의 健勝(건승), 健筆(건필), 精進(정진)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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