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特輯(독서특집) 冊(책)속에서 自由(자유)를

  무시무중의 宇宙(우주)의 어느 刹那(찰나)에 인류가 地球(지구)위에 생명을 영위하고 그 어느 순간에 文化(문화)의 꽃이 피고 그 꽃밭에 잠깐 왔다가 가는 人生(인생)이다. 우주라는 대양에 좁쌀만도 못한 나― 이 나는 80년을 산다고 해보았자 눈 깜박할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生(생)이 순간임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영원을 구한다. 영원이라고 해보았자 뻔한 일이지만 또 그것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인간은 견딜 수가 없다. 설혹 영원에의 사모에 불타다 말 일일지언정 사람들은 그 소중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영원思慕心(사모심)’만은 버릴 도리가 없다. 宗敎(종교) 藝術(예술) 哲學(철학)을이 이래서 태어났고 찾아 헤매다 이것으로도 불만인 사람들은 物質(물질)도 영화도 사랑해보고 자기사업에도 빠져보고 급기야엔 인간도 사랑해본다. 그러나 이 모두가 永遠(영원) 思慕心(사모심)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어디로 가는가, 또 어디로 가야 마땅할 것인가. 이것저것 다 해보다 求(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그 生命(생명)은 地上(지상)에서의 심지가 눈 깜박할 사이에 다 타버리고 만다.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죽음의 神(신)의 노크 소리가 어느새 가까워 진 것이다.
  종교, 예술, 철학 및 일체의 사랑을 통한 永遠思慕心(영원사모심)의 만족이 끝내 허사임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時間(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진작 젊고 또 어렸을 때 그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內部(내부)로부터의 힘이 아니면 그 누구의 힘에 의하여서라도 말이다.

  이러한 경우의 사람들에게 나는 讀書(독서)라고 하는 永遠思慕法(영원사모법)을 권장하고 또 이를 入聞(입문)으로―아니면 無時(무시)로 드나듦으로써 宗敎(종교)에도 藝術(예술)에도 哲學(철학)에도 其他(기타) 일체에 對(대)한 사랑의 事業(사업)에도 종사할 것을 권해본다.
  讀書(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永遠(영원)을 살 수 있다. ―고 깨닫고 그 생애의 일찍부터 달리기 시작한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과거 속에 뛰어 들어가 살 수 있고 과거와의 對話(대화)를 통하여 現在(현재)를 보다 더 여물게 할 수 있고 이 여문 現在(현재)를 통하여 未來(미래)의 빛에 여생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 독서는 영원 思慕法(사모법)의 센터에서 放射的(방사적)으로 각 부문을 향하여 뻗어 나갈 수 있는 관문인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영원을 사는 길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위에서의 나의 생각이다.
  古典(고전)을 읽는 기쁨도 그 언저리의 산물이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내놓고 영원을 사는 기쁨이 또 어디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古典(고전)은 단지 고전이라고 해서 다 古典(고전)은 아닌 것이다. 흡사 오래 살았다고 해서만이 대우를 받을 조건을 모조리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듯이 말이다.
  古典(고전)은 고전 그것으로서가 아니고 <現典(현전)>으로 서의 의미를 지닐 때 아니 지님으로써만 意義(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니코타이 하르트만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1933’에서 역사적 生成(생성)의 現在(현재)에는 ‘지나간 것의 現在(현재)에의 沒現(몰현)’과 동시에 ‘現在的(현재적)인 것의 未來(미래)에의 出現(출현)’이 속해 있다고 했다. 지나간 것의 단순한 지나감은 意味(의미)가 없다. 그러한 지나간 것에의 知識(지식)이나 골동취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 各自(각자)의 <안방에 속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 지나간 단순한 지나감이 안 되기 위하여서는 게오르그 짐멜의 말처럼 現在(현재) 속에 現實的(현실적)으로 “들어와 存在(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거만이 現在(현재)를 통하여 영원한 未來(미래)에까지 입김을 쏘이게 된다. 짐멜에 의하면 “現在(현재)는 未來(미래)를 向(향)하여 現實的(현실적)으로 ‘나가서 存在(존재)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러한 實存(실존)의 存在方式(존재방식)을 우리의 生(생)이라고 했다. 古典(고전)의 存在理由(존재이유)나 가치를 生(생)의 原理(원리)에 적용시켜 봄은 그 理解(이해)를 크게 돕는 결과가 될 것으로 믿는다.

  古典(고전)도 古典(고전)이 아니고 이른바 <現典(현전)>인 데에서만 비로소 古典(고전)이라고 했다. 一百年前(일백년 전), 五百年前(오백년 전), 一千年前(일천년 전), 二千年前(이천년 전), 二千五百年前(이천오백년 전)의 지나간 소리들이 단지 지나가 버린 소리들이 아니고, 오늘의 나의 고막을 간절하게 때리는 소리 곧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리로서 들리는 데에만 그 生命(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洋(양)의 東西(동서)와 時(시)의 古今(고금)을 가리지 않고 옛 또는 먼 나라 사람들의 內心(내심)의 世界(세계)를 엿보고 듣고, 남의 思想(사상)을 追思惟(추사유)하고 남의 經驗(경험)을 追體驗(추체험)하며 이를 媒介(매개)로 對話(대화)하고 위안 받고 나의 사상의 적응성여부를 自己(자기) 試驗(시험)하게도 된다. 이웃과의 共感(공감)의 世界(세계)도 즐겁지만 먼 곳과 옛 과의 그것은 더욱 즐거운 共鳴(공명)의 세계다.
  “흥부전”의 “아이밴계집 배차기,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로부터 시작되는 심술궂은 익살과 江南(강남)에서 온 제비의 흥부집 처마 끝에서의 “지지위지지부지위부시지야타”는 우짖음은 作者(작자)의 유식한 論語(논어) 短識(단식)의 풍자적인 활용이다.
  위정편의 孔子(공자)의 말씀 ‘知之爲知之不知爲是知也(지지위지지부지위시지야)’라는 人間(인간)인식의 한계론이 칸트哲學(철학)의 주제를 이루는 대문임을 상기할 때 微苦笑(미고소)를 금치 못하는 共感(공감)의 世界(세계)가 문득성립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더러 괴테의 <파우스트>12111行(행)을 다 읽고 이를 단 한마디로 줄이라면 “아! 나의 가슴 속에는 두 개의 혼이 살고 있다”가 되겠는데, 이는 곧 150년 전의 永遠未來(영원미래)에 걸친 古典(고전)이 주는 공명의 소리라고 할 것이다. 論語(논어) 20卷(권) 521章(장)을 통독하고 나서 단 하나 마음에 드는 章(장)을 든다면 ‘老者安之(노자안지), 朋友信之(붕우신지), 少者懷之(소자회지)’ (공야장편)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는 오로지 現代人(현대인)의 따라서 영원에 걸친 人類(인류)의 平凡(평범)속의 理想(이상)의 최고 형태이겠기 때문이다. 예수敎(교)의 黃金律(황금율)인 “너희는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누가6~31)와 孔子敎(공자교)의 大綱領(대강령)인 己所不欲(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안연편, 위령공편)와는 이렇게 까지 닮을 수 없으며 孔子(공자)에게 있어서 理想的(이상적) 인간상인 君子(군자)는 ‘謀道不謀食(모도불모식) 憂道不憂食(우도불우식)’(위령공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義(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衣ㆍ食(의식))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7~33)라는 말에 나타난 사상과 어쩌면 그리 같은가. 眞理(진리)는 하나, 어디에도 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主體(주체)에 의하여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플라톤의 對話篇(대화편)의 하나 <테아이테투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경이로부터 시작 한다’라는 말은 孔子(공자)의 ‘敏而好學(민이호학) 不恥下問(불치하문) 是而謂之文也(시이위지문야)’(공야장편)의好學(호학)=好問(호문)의 哲學精神(철학정신)과 완전 일치한다.
  이는 반드시 兩聖人(양성인)에게만의 一致(일치)가 아니라 너와의 일치며 나와의 일치다. 一致一如(일치일여)의 세계, 그것은 古典(고전)=現典(현전)의 경지에서만 열린다. 古典(고전)을 통한 超時超空(초시초공)의 一如(일여), 곧 同悲同樂(동비동락)의 인류의 大廣場(대광장)은 비록 좁쌀만도 못한 나일망정 外面(외면)하거나 괄시하지 않는 한 영원한 王國(왕국)의 市民(시민)으로서 永遠(영원)에의 思慕(사모)라고 하는 祖國愛(조국애)에 불타는 한 나 또한 너와 더불어 永遠(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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