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는 말-이청준 소설연구

다시 태어나는 말

이청준 소설연구

삶으로 맺고, 말로 열고, 소리로 풀고

 「떠도는 말들」은 연작 소설 <언어사회학서설> 제1편으로 1973년 2월에 씌어졌고, 「서편제」는 또 다른 연작 소설 <남도 사람>의 서작으로 1976년 4월에 씌어졌다. 그 이후 십 년에 가까운 작가 이청준의 문학에의 꿈과 노력은 많은 부분이 이 두 연작물의 부끄럽지 않은 진행에 바쳐졌고, 그런 만큼 그 기간은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변화 없는 부채의 변제기가 되어 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언어사회학서설>에서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삶의 관계를 형성하고 여러 법칙을 만들어 온 말들의 모습이나 우리와 그것과의 화해롭고 조화스러운 질서를 찾는 일이, <남도 사람> 연작에서 우리의 삶의 한 숨은 양식이나 존재의 근원을 찾는 일과 전혀 다른 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청준은 「다시 태어나는 말」 한 편으로 일단 이후 연작물의 결편 작업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 언어사회학서설>의 의도적인 작품 배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의 다른 창작집에서 뽑아내 이 연작의 의도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연작 사이사이에 다른 계열의 작품을 끼워 순서 그 자체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끝까지 읽고 나서 보면 그 전체가 「다시 태어나는 말」에로 수렴되게끔 만들었다는 데서 그것은 분명해진다.
  이청준에게 있어 그의 70년대는 ‘잃어버린 말’을 향한 집요한 탐구의 수련기였다. 그의 ‘잃어버림을 찾는’ 고행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에 붙은 ‘언어사회학서설’이란 부제가 시사하듯이, 그의 말에의 집념은 오늘의 우리의 삶 󰠚 그 존재론적 삶과, 그 ‘존재의 집’인 말의 참됨 간의 거리를 확인하고 그 괴리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은 동양적 지혜의 핵심인 ‘도(道)’로 통하는 것이고, 그의 ‘잃어버림’과 ‘찾음’에의 노력은, 삶 그 자체인 말, 참 그것인 말, 옳음 바로 그 뜻이어야 할 말이 그러나 그 존재성과 당위성을 다 함께 상실해 버리고 삶과 참과 옳음으로부터 벗어나 유령처럼 떠도는 현상에 대한 추적이다. 그가 말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에 집착하면서 현실 세계의 타락을 직관하고, 내면적 추상화로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넓히면서 외적 현상들에 대한 날카로운 직감을 중시해 가며 ‘잃어버린 말을 찾는’ 작업은, 그러므로 언어와 사회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며 사회적 탐구 과정이기도 하다. 당시 이청준의 10년은 이 접근과 탐색의 문학적 시련기였던 것이다. 이같이 잃어버린 말을 찾아 나선 작업이 「소문의 벽」이나 그 이후 「떠도는 말들」(1973),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지배와 해방」(1977) 등 일련의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이라 할 수 있다.
 「소문의 벽」에서 주인공 박준은 언어의 벽 혹은 소문의 벽에 부딪혀 ‘진술 공포증’을 느끼며 위장된 광기를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작가이다. 정체를 숨긴 채 상대방의 정체만을 강요하는 전짓불은 억압적 현실 원칙의 상징으로 보인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그 전짓불 앞에서 개인은 온전히 알몸을 내놓은 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자유의 빛을 거두어 간 어둠 속에서 생장한 권력은 전짓불을 앞세우며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침묵에 젖게 한다. 이러한 ‘전짓불 공포증’의 연쇄 반응으로 ‘진술 공포증’이 따라온다. 진정한 작가의 문학적 진술은 문학적 진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짓불로 상징되는 세계의 억압은 그 진리를 막고 비진리화를 획책하다. 왜냐하면 전짓불이 진리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비진리화를 조장하고 획책하는 전짓불은 언어의 생명력이나 창조력마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살아 있는 언어로 진술하려고 하는 작가라면 그 전짓불 앞에서 공포를 느낄 것은 정한 이치이다. 검열ㆍ금지ㆍ획일화ㆍ어용화 등을 조장하던 지난 1970년대 유신 시절 우리의 언어 풍경을 떠올린다면, 아마 박준의 ‘진술 공포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전짓불은 ‘이쪽에서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진술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욱더 두렵고 공포스럽게 빛을 쏘아대’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로운 언어 내지 진리의 진술은 차단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벽에 부딪히게 되면 더 이상의 진술을 할 수 없다. 이렇듯 더 이상 진술을 할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된 상황의 벽에 도전한 것이 바로 일련의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이다.
  그의 소설은 연작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매 편마다 한 사건의 완결된 단락을 이룬다. 이청준은 한 편의 소설에는 사건의 발발과 진행ㆍ결말의 전 과정이 수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의 철저한 신념으로 삼고 실천한다. 그의 소설은 반드시 시작과 클라이막스와 결론을 가지며 그리하여 그 소설 공간 안에 하나의 완전한 세계가 충만한다. 이것이 계기적인 연작 소설의 일반적 성격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에게 있어 시점의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하더라도, <언어사회학서설>은 이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떠도는 말들」로부터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 「몽압발성(夢壓發聲)」, 「다시 태어나는 말」에 이르기까지 이 5편의 소설들은 연작이라고 하지만 그 전체의 줄거리로 보자면 하나의 장편소설을 향한 연속 소설로 읽는 것이 옳다. 이 각각은 앞선 소설의 뒤를 이어 전개하고 있으며 다음 작품 역시 앞선 이야기들을 상기시키며 줄거리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청준의 연작은 각 편마다 한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만끽시키면서 그 작품에서 제기한 사건을 그 소설 안에서 완결시킨다.
  제1작 「떠도는 말들」에서는 오접된 전화 사건을 통해 이 시대가 말들의 망령으로 미만해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그 언어의 망령이 정직한 삶을 버린 사람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코미디언과 농촌 개척자의 자서전 대필을 중단키로 결정한다. 작가의 문제의식이 본격적이고도 집약적으로 들어 있는 제3편 「지배와 해방」에서 자서전 대필을 포기한 지욱이 ‘떠도는 말’을 감금하기 위해 각종 강연을 녹음했으며 그 중 젊은 작가의 강연 ‘글은 왜 쓰는가’에서 글을 써야 할 충분한 이유를 납득한다. 인간이 언어를 잘못 부리게 되자 언어가 인간을 배반하게 되고, 현실이 개인을 억압하는 상황과 대결하면서 작가의 존재와 이념을 독특한 논리로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4편 「몽압발성(夢壓發聲)」에서 지욱은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가위눌린 말들이 어떻게 횡행하며 ‘글을 써야 한다’는 작가들의 명분이 어떻게 차단되는가를 확인한다. 이 절망 속에서 진실의 말을 찾는 지욱은 제5편에서 차를 마시는 마음의 지혜를 통해 말이 삶으로 되는, 「다시 태어나는 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마지막 소설은 또한 「서편제」와 「선학동 나그네」의 전혀 계열을 달리하는 소리꾼과 소리에 대한 서정적 소설들의 줄거리를 싸안으면서 극히 추상적이고 지적인 그의 소설 한 줄기와 극히 토착적이고 감성적인 그의 또 다른 소설 줄기에 일대 종합을 가함으로써 70년대 전반에 걸친 일련의 소설 작업들을 그는 완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은 적어도 ‘말’의 소설은 여기서 종착을 본 것일까. 「소문의 벽」이 완결된 후 <언어사회학서설>이 나오게 된 창작 구조를 보자면, 그가 어떤 형태로든 탐구를 계속하는 작가라는 것 외에 분명하게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없을 것이다.
  <언어사회학서설> 연작 중 이청준 특유의 관념적 진술이 돋보이는 「지배와 해방」은 이청준의 문학적 태도를 잘 알려주는 소설이다. 비평가 김현의 문학론이 그랬던 것처럼 억압하지 않는 것으로써 억압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고 그것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는 것, 억압을 승화시킨 보편적 이념으로 지배하여 ‘화창한 자유의 질서’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 현실을 지배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 새로운 억압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 새로운 이념의 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지고 글을 쓰는 이유는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행복스런 우리들의 삶 또는 그 삶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 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를 천명함과 동시에 그는 그 태도의 문학적 실천으로 「서편제」(1976), 「소리의 빛」(1977), 「선학동 나그네」(1979), 「새와 나무」(1980) 등등의 이른바 <남도 사람> 연작을 발표한다. 존재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말이 가출하여 폭력적으로 존재 그 자체를 허물어트리는 언어와 사회의 현상에 대응한 것이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이었다. 작가 스스로의 주석적 진술에 의하면 ‘사회적 관계 질서로서의 언어의 기능’을 점검한 것인데, 여기서 작가는 비관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언어가 존재의 실체나 삶의 실상에서 벗어나 획일적인 공리성이나 폭력적이고 타율적인 질서로 타락해 가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실체를 배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과 삶이 하나로 어우러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해방의 질서, 자유의 질서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바로 <남도 사람> 연작이다.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어 ‘서편제’라는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이 <남도 사람> 연작은, 서둘러 말하자면, 민족 언어와 심상이 승화된 한 극점으로서의 판소리 세계를 통해 충일한 존재적 언어의 세계, 말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조화롭고도 창조적인 생명의 미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본 문학 공간이다. 일찍부터 음악의 세계는 우주와의 합일과 조화를 꿈꾸는 예술 세계였거니와, 이청준이 찾아 나선 ‘소리’ 역시 우주와 인간의 비밀을 열어 가는 하나의 유력한 열쇠였던 것이다. 이 연작에서 소리꾼인 아비는 소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의붓아들이 떠나자 딸마저 도망칠까 봐 두려워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만든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딸이지만, 아비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아비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대신 아비를 용서한다. 용서를 통해 딸은 아비라는 타인의 세계를 넉넉히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자기의 영혼의 자리를 넓히고 깊게 한다. 그리고 복수와 적대감의 원한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역동적인 한의 에너를 지니게 된다. 용서를 통해 깊어진 한은 소리로 승화된다. 이 승화는 육체적 실명 대신 영혼의 광명을 볼 수 있게 되는 동양적 정신주의의 역설이라는 매개항에 의해 계기되는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에 나오는 ‘두 눈이 성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라붙은 들판에서 있지도 않은 물과 산 그림자를 볼 리가 없었고, 있지도 않은 물과 산 그림자를 본 것은 그녀가 오히려 앞을 못 보는 맹인이기 때문이었다.’라는 구절이나, 「소리의 빛」의 ‘한으로 해서 소리가 열리고 한으로 해서 소리가 깊어지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레 한 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이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육체적 결핍을 정신적 충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계기를 경유해서 얻게 된 여인의 소리는 대략 세 가지 성격을 지닌다. 역동적인 한의 창조적 승화를 통한 영혼의 소리라는 것이 그 하나요, 그녀의 삶과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라는 것이 그 둘이며, 그녀 개인만의 단독자적인 세계가 아닌 타자들의 겹 무늬로 아로새겨진 공동선의 세계라는 것이 마지막 셋이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소리는 잃었던 영혼의 단추를 찾게 하고, 오래전에 사라졌던 선학의 비상을 보게 한다.
  포구에 물이 들면 마을 뒤의 관음봉이 한 마리의 학의 모습이 되어 날아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선학동이다. 그런데 마을 앞 포구에 제방이 생겨 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선학동에서는 더 이상 비상학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환상 속에서만 신화처럼 그리던 관음봉의 비상학이었다. 그런데 이 신화가 소리와 더불어 재현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서 주막집 주인이 보게 된다. 선학동 마을의 공동체적 신화의 부활은 작가 이청준의 문학적 꿈의 현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편 『당신들의 천국』(1976)에서 조백헌이라는 소록도 병원 원장의 개혁적 사고에 회오의 시선을 보냈던 이청준이었다. 조원장이 개인의 진실, 즉 자유와 사랑에 기초하지 않고 제도적이고 공리적인 질서에 개혁적 기반을 둔 채 단독자적 자기 낙원을 꿈꾸려 했기 때문이다. 자율적 선택의 자유에 뿌리를 두지 않은 타율적 물리적 변혁은 오히려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우려였다. 그런 이청준에게 있어서 「선학동 나그네」에서의 비상학 에피파니는 매우 소중한 것으로 보인다. 현상적인 폭력이나 억압, 배신에 대해 복수나 원한으로 대응하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견디면서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을 받아들임으로써 한을 승화시키고, 나아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랑의 공간 위에서 온전하고 그윽한 삶의 실체를 얻어 낼 수 있다는 문학적인 꿈의 에너지를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피파니는 또한 작가 이청준이 1970년대 전반을 바쳐 고뇌했던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과 <남도 사람> 연작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완결편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말」(1981)을 잉태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존재인 삶과 존재의 집인 말을 배반하기 시작하면서 얼룩진 배반의 역사를 되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다시 태어나는 말’에 대한 작가의 열망은 거의 감동적이다. 복수가 아닌 자기 인고와 용서 및 화해를 통해 어렵게 ‘다시 태어나는 말’은 ‘삶’과 ‘말’이 온전히 합쳐지는 진실한 소망을 담고 있다. 잃어버린 말을 되찾아가는 이와 같은 말의 재생 신화는 개인의 진실에 바탕을 두고 집단의 공동체적 꿈을 향해 가는 구조로 짜여 있다. 말을 좀 더 엄밀하게 바꾸면, 개인의 진실에서 출발하되, 그것과 집단의 꿈이 서로 스미고 짜이는 상호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창조적 지평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을 소리로 승화시켜 비상학의 에피파니를 보여 준 남도 여인의 이야기에서 많은 힘을 얻은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구조는 현실의 역학 관계에서 보면 매우 취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와 사회 언어의 구조적 타락과 배신에 대해 개인의 진실에 입각한 ‘새로 태어나는 말’이 속수무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새로 태어나는 말’이 제 소리를 내기도 전에 이미 오염된 기존의 타락한 말의 분위기에 감염되고 휩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태어나는 말’의 진정성이 현저하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지배와 해방」에서 밝히고 있는 작가의 문학관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패배를 감수하면서도, 공동선에 입각해 현실을 지배하고 해방시키려는 게 문학의 꿈이라면, ‘다시 태어나는 말’의 논리도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적 생산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문학적 역설마저 허용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허전하고 삭막할 것인가. 삶의 맺힌 한을 어찌 풀 수 있을 것인가. 무릇 현실적 삶은 무수히 많은 매듭으로 맺혀 있는 법이다. 삶은 한을 낳고, 한은 또 여러 종류의 삶을 잉태한다. 그런데 맺힌 것은 풀려야 한다. 이에 작가 이청준은 그 맺힌 매듭을 ‘말’로 열고, ‘소리’로 풀어 보려 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패배하고 지친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말’로 웅얼거리고 ‘남도 소리’를 들으며 귀향하고 싶어 했던 소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과, <남도 사람> 연작의 비의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두 계열의 이청준 소설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 말과 소리로부터 떠나 있으며 그것을 기다리고 혹은 찾으면서 원한과 복수감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윤지욱과 그의 친구들이 글쓰기를 포기하면서 그들의 살아 있는 말을 찾듯이, 그리고 사내가 의붓아비와 뼈 다른 누이동생의 소리꾼들을 배반하고 떠돌면서 그들의 소리를 찾아 헤매듯이 말이다. 이 사내와 윤지욱은 끝내 해남 땅의 여관에서 엇갈려 만나고 거기서 ‘다시 태어나는 말’을 예감한다. 그것은 차 마심과 빗질하는 여인을 통해서였다. 그들이 여기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다시 태어나는 말’의 가능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화해와 용서의 마음에 있었다. 사내는 이미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을 길이나 사람이 없음에 덧없어하면서, 그 회한을 살아갈 것이고 윤지욱은 그 용서라는 말의 뜻과 무게를 지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끝내 말없이 빗질하는 여자를 통해 화해의 실체를 체험하리라는 시사는 상징적이면서 육감적이다. 마치 말과 소리가 상징이면서 육감이듯이. 그리고 이에 이르러 한과 복수는 용서와 화해로 변증하게 되며 말과 소리는 그 존재의 집에서 그 자체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청준은 여기서 드디어 10여 년에 걸친 탐색의 종착을 보여 주었고 그 자신의 말과 삶이 결합할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남도소리 연작의 서작

  서편제는 남도사람 연작의 첫 작품이다. 특히,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로 이어지는 이 세 연작소설은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말하고 있고 동시에 그 내용 전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우리의 논의는 서편제가 중심이 되겠지만 필요한 경우 다른 두 작품과 비교하면서 진행될 것이다.
  우선 ‘서편제’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작가가 복합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최종적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깥 이야기는 사내가 보성읍 밖 소릿재 주막을 찾아들어 그 주막 여인으로부터 소리 무덤에 대한 이야기와 내력을 질문하여 듣고 어떤 사실을 확인하면서 다시 떠나는 이야기이다. 안 이야기는 주로 회상에 의해서 떠올려지는 과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소리꾼 부녀가 마을에 찾아들고 떠난 이야기, 소년이 소리꾼 사내를 죽이려다 떠난 후 잊지 못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바깥 이야기와 안 이야기의 구조는 사내와 주막 여인과의 대화를 주축으로 해서 현재와 과거의 시제를 교차하고 있다.
  결국 ‘서편제’의 주요 내용은 사내가 누이를 찾아서 헤매는 과정인데, 누이를 찾는 것은 곳 소리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사내는 그가 찾는 수수께끼의 열쇠를 주막집 여자에게서 얻는다. 즉, 주막집 주인여자는 이 소설의 매개자인데, 주막 여인의 과거 이야기는 사내로 하여금 사내와 헤어진 후의 소리꾼 부녀의 자취를 더듬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막 여인의 소리는 사내가 과거를 회상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주막 여인의 소리는 사내가 과거를 회상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인 것이다. 이때 주막 여인의 과거 이야기와 주막 여인의 소리로부터 환기된 사내의 어릴 적 이야기는 이 연작소설의 핵심적인 에피소드로 이 부분은 ‘소리의 빛’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내용이다. 아무리 연작이라곤 하지만 동일한 이야기를 똑같이 써먹는 것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 그 만큼 이 부분이 남도사람 연작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며, 이 에피소드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동일한 부분과의 연관을 통해 ‘서편제’에서 다 말해지지 않았던 감추어졌던 사실들은 ‘소리의 빛’을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서편제’와 ‘소리의 빛’에는 공통적으로 소리꾼아비가 숨을 거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서편제’에는 없는 아비가 숨을 거두면서 딸에게 사죄하는 이야기가 ‘소리의 빛’에는 나오는 것이다. 또한 ‘소리의 빛’에는 여자가 옛일을 털어놓으면서 아비가 예전에 오라비의 살기에 대해 말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편제’에서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하던 살기는 일방적으로 서술된데 비해서 ‘소리의 빛’에서는 아비가 그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줌으로써 그것이 상호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과 소리

  사내의 끝없는 떠돎은 소리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고, 소리를 만날 때마다 사내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사내의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 하는 소리는 어머니의 소리, 의붓아비의 소리, 누이의 소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것은 곧 총칭해서 남도소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결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가물가물 콩밭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하루 종일 그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은 이상스런 콧소리 같은 것을 웅웅거리고 있었다. 어미의 웅웅거리는 노랫가락 소리만이 진종일 소년의 곁을 서서히 멀어져 갔다간 다시 가까워져 오고, 가까워졌다간 어느 틈엔가 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가곤 할 뿐이었다. (p 19)

  사내의 소리는 또 한가지 이상스런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에게 살기를 잔뜩 동해 놓고는 그에게서 다시 계략을 좇을 육신의 힘을 몽땅 다 뽑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녀석이 정작 긔의 부푼 살의를 좇아 나서 볼 엄두라도 낼라치면, 사내의 소리는 마치 무슨 마법의 독물처럼 육신의 힘과 부풀어 오른 살의의 촉수를 이상스럽도록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곤 하였다. 그것은 심신이 온통 나른하게 풀어져 버리는 일종의 몸살기와도 비슷한 증세였다. (p. 28)

  여자의 목청은 남정네들의 그 컬컬하고 장중스런 우조뿐 아니라 여인네 특유의 맑고 고운 계면조 풍도 함께 겸비하고 있어서, 때로는 바위처럼 우람하고 도저한 기백이 솟아 오르는가 하면 때로는 낙화처럼 한스럽고 가을 서릿발처럼 섬뜩섬뜩한 귀기가 넘쳐났다. 가파른 절벽을 넘고 나면 유장한 강물이 산야를 걸쳐 있고, 사나운 폭풍의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새소리 무르익는 꽃벌판이 한나절이 펼쳐졌다. (p.47)

  위의 인용문은 각각 사내의 어머니의 소리, 의붓아비의 소리, 누이의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각각의 소리는 한풀이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 사내의 어미는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밭뙈기 농사를 여름 한철 거두면서, 이상스런 콧소리를 웅웅거린다. 이 어미의 웅웅거림은 이상스런 노랫가락이 산속에서 들려오자, 더욱 극성스러워지고 있으며, 저녁 어스름녁 뱀같은 노랫가락에 의해 덮쳐지게 된다.
  두 번째 인용문은 첫 번째 인용문과 이어지는 것으로, 노랫가락의 정체인 소리꾼 사내가 마을에 들어오게 되고 어미가 핏덩이인 누이를 낳고 죽은 후, 사내가 소리꾼을 따라다니며 느끼게 되는, 사내의 소리꾼 의붓아비의 소리에 대한 반응이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내는 그 소리 때문에 소리꾼 아비를 죽일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 때문에 도망치게 된다. 더구나 어릴 적 사내에게 그 소리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무덤가 잔디에서 진종일 계속되는 노랫가락 소리를 들어야 했고,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에 지친 잠을 자거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잠을 다시 깨어야 했다. 잠을 자거나 잠을 깨거나 소년의 귓가에서 노랫소리가 떠돌고 있었고 소년의 머리 위에는 언제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가 걸려있었다”(p.20)에서 알 수 있듯이 사내에겐 그것이 운명의 얼굴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내의 소리 탐색은 소리꾼 사내의 소리에 그 근원을 두고 있고, 따라서 사내는 유랑자, 방랑자, 떠돌이 라는 이름으로 남도소리 연작 전편에 걸쳐서 탐색의 여정에 서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인용문은 사내가 도망치고 나서 누이까지 잃지 않으려는 소리꾼 아비에 의해 눈을 잃은 누이가 그 한을 판소리로 승화시킨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삭임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한의 생태는 가장 서럽고 한스러운 가락을 주조로 하고 있는 판소리 예술이 하나의 예술로 성취 되어 가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누이는 한을 삭혀 예술적 성취를 이루게 되는 한 편 용서라는 인간적 성숙에도 이르게 된다.
  위 세 인용문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서편제’에서 소리는 한의 정서를 나타내고 소리로 그 한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청준은 서편제에 대한 언급에서 “그래 나는 ‘서편제’에서의 한을 쌓임이나 맺힘의 사연보다, 본래의 삶의 자리와 자기 모습을 되찾아 가는 적극적인 자기 회복의 도정, 그 아픈 떠남과 회한의 사연들까지도 우리 삶에 대한 사랑과 간절한 희원으로 뜨겁게 끌어안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풀이의 과정을 더 소중하게 풀어 보려 한 것이다. 한의 맺힘 자체는 원한이 되기 쉽고 파괴적인 한풀이만을 낳기 쉬움에 반하여, 그 아픔 떠남의 사연과 회한 껴안기, 넘어서기의 떠돎은 우리 삶에 대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풀이와 정화, 상승의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통합과 극복의 뜨거운 예술 정신에 홀려 나는 감히 그 소리의 정서와 한의 양식을 ‘서편제’의 모체로 삼아 보려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 한과 소리와는 별도로, 좀 더 근원적인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가 한 인가 하는 의문이다. 왜 우리 민적의 정서의 바탕에 한이 자리하고 있는가? 가난과 잦은 외침 때문에? 아니다. 정확하게 따져 보면 한국인의 정서에 한 이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다. 우리의 기본 정서에 한과 풀이라는 관념을 넣음으로써 통치의 한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무조건 적으로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를 한의 정서라고 보는 것은 주체적이지 못한 생각일 것이다.

서편제와 이청준

이상으로 서편제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서편제와 이청준이란 작가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마무리 할까 한다.
  첫째, ‘서편제’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는 현재와 과거의 시제 교차와 맞물리면서 보여지고 있다. 그것은 곧 과거에 얽힌 갈들을 현재에서 해소 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리려는 작가적 의도로 읽을 수 있다.
  둘째 문답 형식은 질문과 털어놓음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주인과 손님의 이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두 사람이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대화 양상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선문답의 태도라는 점이다. 즉, 한 사람은 ‘예감, 조바심, 기대, 궁금증’의 태도를, 다른 사람은 ‘망설임, 시치미, 무시, 비킴’의 태도를 가지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연, 내력, 곡절, 연유를 듣게 되는 양상인 것이다.
  셋째, 지치고 허름한 몰골의 나그네는 늘 주막 같은 일시적 장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이 연작 소설들이 여로형 구조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주인공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고 난 후 곧바로 떠나고 있는 반복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경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양상들은 거개가 비현실적인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남자는 ‘서편제’ 와 ‘소리의 빛’에서 소리를 찾아 떠돌다가 결국 ‘선학동 나그네’ 에 와서 누이를 통해 소리를 찾게 되는데, 이때의 소리 찾기는 마른 땅에서 학을 날게 하는 상상력의 소산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남도사람 연작은 한 나그네가 소리에 관련된 궁금증 가지고 길을 떠돌아다가 어느 장소에 들러서 그 사연을 묻고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다시 떠나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작 소설은 소리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이며, 이때의 소리는 소설 속에서 한풀이의 한 방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작중 주인공인  작중 주인공인 사내가 소리를 얻기 위해서 떠돌아다니는 근본 이유는 맺힌 한을 소리로써 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망의 희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한다는 식의 역설 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곧 이청준 소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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