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①

  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쿨룩, 쿨룩 기침을 하면서 망연히 한길 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세차게 날리고 있는 그 길은 한적하였다. 그저 터엉 비어서 곧장 뻗어나갔다. 길 위에는 색이 바랜 흰 플랭카드가 길 양편의 전봇대에 매달려 거칠게 나풀거렸다. 목조 건물의 면사무소도 눈에 띄었다. 바로 앞 네거리에서 한켠으로 비껴 있었다. 벽의 판자가 떨어져 그 속의 마른 흙이 내다보였다. 면사무소 주위로는 녹슨 함석지붕의 단층집들이 오밀조밀 간판을 달고 늘어서 있었다. 어느 것이나 페인트의 거풀이 일어나 회색의 함석이 맨살처럼 나왔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분다면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집들은 한층 더 낮게 엎드려 숨죽이고 있었다. 흡사 폐허만 같았다.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서 초라했다. 면사모소 뒤켠에 있는 너덧 그루의 느티나무가지가 바람을 타며 흔들거렸다. 가뭄의 땅거죽처럼 하늘을 갈래갈래 갈라놓은 그 가지들은 완전한 검은 색으로 견고한 금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흔들거렸다. 하늘이 작은 파문을 만들며 배색의 칼라처럼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제 막 잡은 물고기가 팔딱거리며 몸부림치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순간 가슴이 뻐근히 아파왔다. 그러나 그것도 금새였다. 역시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았다. 하늘은 그저 암울한 구름이 분간할 수 없게 펼쳐있었다. 그런 하늘로 바람만이 살아서 전선(電線(전선))을 울리며 지나갔다.
  시선을 발밑으로 떨구었다.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자갈들이 차바퀴의 자국 양옆으로 두꺼운 두 줄을 그으며 이어나갔다. 발 이랑처럼 울퉁불퉁하면서도 거의 확실한 두 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자국을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아주 느리게.
  그러나 나는 뭘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뭣 하나 꼭 꼬집어 생각할만한 게 없었다. 소란하고 어두운 다방에서 갑자기 밖으로 풀려난 것처럼 그저 걸었다. 나뭇잎 하나가 살랑살랑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발끝에 떨어진 그것은 곧 내 구두에 밟혔다. 발을 들어 낙엽을 다시 날려 보냈다. 꼭 돌이 굴러가는 모양으로 둔중하게 바람을 탔다. 문득 이제야 생각난 듯이 발을 조금 꺾어 올렸다. 그리고는 적당한 폼을 만들고 바로 앞에 떨어진 낙엽을 겨냥했다. 슬쩍 찼다. 궤적(軌跡)을 따라 서너 발치 앞으로 굴러 가다가는 곧 멎었다. 다시 다가갔다. 그러나 차지 못했다. 다른 한 발이 이미 낙엽을 앞질러 디뎠다. 순간, 비틀, 넘어질 뻔했다. 다리가 뻐근하게 저며왔다. 통증은 심하지 않았다.
  외투자락이 무릎 위에서 나부꼈다. 그 찬바람이 바지를 타고 올라 가지랑이를 썰렁하게 적셨다. 꼭 물속에 다리를 묻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춥다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추위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이미 있던 것이 왜 이제사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식은땀이 바람에 증발되어서 등이 몹시 시렸다. 차거운 쇠판에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니 얼음이 언 논 가운데에 맨 살을 내놓고 쓰러져 있었다.
  아아,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이 추위말고도 다른 것이 더불어 나의 체온을 빼앗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담배를 빼 물었다. 내뿜어진 연기가 얼굴 가득 휩싸고 등뒤로 날아갔다. 쿨룩쿨룩 기침이 나왔다. 허리를 바짝 숙이고 배를 움켜쥐었다. 엉덩이에 바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이 왔다. 아픔을 참으려 잠시 엉거주춤 서있었다.
  그때 길옆의 유리문이 드르륵 열렸다. 백지(白紙)를 배면(背面)으로 한 유리창에는 금색글씨로 큼직하게 <빵>이라고 쓰여 있었다. 빨간 외투에 하얀 줄무늬 머풀러를 두른 아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웃고 있었다.
  불모의 땅거죽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는 모습이었다. 아주 청순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기침이 나왔다. 사정없이 오른쪽 엉덩이가 아파왔다. 붙었던 그 자리가 골절(骨折)된 금 그대로 다시 골절되는 것 같았다.
  <쉬었다 같이 가죠?>
  그러나 나는 그냥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얼굴에 잔뜩 주름이 잡혀진 채로 통증을 참으면서…. 작게 열리며 흰 이를 드러내는 그 예쁜 입술이 다시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미처 듣지 못했다. 윙윙거리는 나뭇가지 소리 같은 목소리로 귓가를 스쳐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리문이 닫혔다.
  숙이, 나는 목에 걸린 알약을 집어내듯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내 머릿속을 메우고 있었던 그녀를 황망히 기억해냈다. 우리는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과한 두 시간 후면 반갑게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에 충만해 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숙이의 편모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2년이나 전의 일에 불과했다. 2년이란 세월은 그녀와 나 사이에 어두운 침묵이 가로막힌 채로였다. 시퍼런 강물을 건너는 외나무다리 위에 서있는 것처럼이나 조마조마하고, 안타깝고, 외쳐 부르고 싶고, 하루빨리 달려가 붙들고 통쾌하게 울고 싶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 다만 무한정으로 기다려 볼 요량이었다. 끝까지 참고 버텨 볼 욕심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 즈음 내가 터득한 것은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成熟度)와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맹세코 나는 이를 믿었다. 그리고 끈질지게 기다렸다. 다만 기다림만이 내게 남아 있었다. 최근까지의 일이다.
  그러나 다시 쉽게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내가 병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외출을 내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쯤에서 서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나야 했다. <보호자와 필히 동행할 것>을 조건으로 입원 이래 처음으로 병원을 나왔고, 그 다음 혼자 도망치듯 서울을 빠져나온 것이다.
  닫힌 유리문을 바라보면 나는 금새 후회했다. 그렇지 않아도 쉬고 싶었던 참이었다. 문틈으로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걸었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기분이 머릿속에 걸려 남았다. 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들킨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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