塔婆(탑파)의 發生(발생)․樣式(양식) 다뤄

  <一(일)>

  古代(고대)의 造形(조형)으로 우리가 世界(세계)에 자랑하는 것이 결코 하나 둘만이 아니나 그 중 우리 山野(산야) 到處(도처)에서 전래하는 고대의 石塔(석탑) 또한 그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石塔(석탑)으로서 三國(삼국) 이래 千數百年(천수백년)에 걸친 우리 造形美術(조형미술)의 으뜸을 삼을 수가 있는데 그들은 동시에 특이한 우리의 景觀(경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內外人(내외인)에 의하여 ‘石塔(석탑)의 나라’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으로써 우리와 이웃한 中國(중국)의 塼塔(전탑), 그리고 日本(일본)의 木塔(목탑)과 더불어 각기 東洋三國(동양삼국)에서 같은 佛敎造形(불교조형)의 對比(대비)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 땅에 전래하는 1千(천) 수백기의 大小(대소)의 石塔(석탑)들은 모두 古代(고대)의 믿음과 造形(조형)의 所産(소산)이며 그 表現(표현)으로서 우리 上代(상대)의 미술을 홀로 대표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으뜸의 古代造形(고대조형)을 學文硏究(학문연구)의 중요대상으로 삼았던 先驗者(선험자)는 곧 又玄(우현) 高裕燮(고유섭) 선생이다(1905~1944). 그리하여 그의 刻苦(각고)의 努力(노력)은 마침내 結實(결실)되어 初有(초유)의 큰 學績(학적)을 우리에게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韓國塔婆(한국탑파)의 연구’이다.


  <二(이)>

  이 著書(저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대표적 조형작품의 硏究(연구)에서 이룩된 것인바 그것은 선생이 京城大學(경성대학)에서 처음으로 美學(미학)과 미술사의 專攻(전공)을 지향하셨던 때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卒業(졸업) 후의 3年間(년간)(1930年(년)~1933年(년)) 동대학의 硏究室(연구실) 時節(시절)에서 그에 대한 基礎作業(기초작업)은 점차 이루어졌다. 그 사이 全局(전국)의 主要(주요) 寺庵(사암) 또는 그 遺址(유지)를 찾아서 歷代(역대)의 遺構(유구)를 상대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 石塔(석탑)만이 지니는 特質(특질)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着手(착수)는 곧 이어서 그의 開成博物館(개성박물관) 奉職期(봉직기)(1933年(년)~1944年(년))로 곧 연결됨으로써 보다 集約的(집약적)인 勞作(노작)이 마련되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6年(년)에 이르러 그의 첫 論考(논고)가 震壇學報(진단학보)에 發表(발표)되었으며 이어서 同題(동제)의 論考(논고)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우리 塔婆硏究(탑파연구)는 그 始發(시발)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바 이 같은 硏究(연구)는 그 후 꾸준히 계속되어서 마침내 1944年(년) 6月(월) 그의 別世(별세)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최후의 著述(저술) 또한 상기한 진단학보의 그것과 同題(동제)였으나 그 내용인즉 새로운 構想(구상)을 따르던 것이며 또 그 차례는 總論(총론)과 主要塔婆(주요탑파)에 대한 各論(각론)을 따로 구상하면서 그 綜觀(종관)의 기회를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우리 塔婆(탑파)에 대한 최후의 執筆(집필)은 선생 在世時(재세시)에 발표되지는 못하였으나 그 중 總論(총론)만이 完成(완성)되었던 것은 매우 多幸(다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日政(일정) 말기 주로 선생의 開成博物館(개성박물관) 시절 전후기에 따로 마련된 ‘韓國塔婆(한국탑파)의 硏究(연구)’ 2편을 해방을 맞으면서 선생의 遺著(유저)로서 그의 學問(학문)을 대표하는 著書(저서)가 된다고 확신한다. 그의 死後(사후) 30년이 넘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獨步的(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여도 아무 異論(이론)이 없을 것이다.
  해방이 되면서 우리 古代(고대) 塔婆(탑파)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 始發(시발)과 연구의 기조는 선생이 마련한 軌道(궤도)와 이 著作(저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이에 비할만한 우리 塔婆(탑파)에 대한 체계적 論考(논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그보다 試圖(시도)조차 없었다고 함이 사실이다. 참으로 우리 塔婆(탑파)에 대한 이 著書(저서)는 마치 彗星(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40평생을 오직 이 한 길 위에서 불태우던 그의 생애와도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硏鑽(연찬)이 마침내 한국미술사연구 위에 이룩한 최초의 金字塔(금자탑)임에 틀림없다.


  <三(삼)>

  ‘韓國塔婆(한국탑파)의 硏究(연구)’의 眼目(안목)은 위와 같이 우리 대표적 造形作品(조형작품)에 대한 첫 系譜化(계보화)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노력이 집중된 초점은 또한 三國末期(삼국말기)의 塔婆(탑파)였다고 하겠다. 더욱이 이 시대의 始原石塔(시원석탑)에 있어서는 그 年代(연대)와 양식에 대하여 우리보다 앞서서 발설한 日人學者(일인학자)의 論議(논의)에 대한 선생의 反論(반론)을 들어야 하겠다. 그것은 독특한 학문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첫 대상은 전북 益山郡(익산군) 金馬面(금마면) 彌勒寺址(미륵사지)에서 오늘에 전래하는 大石塔(대석탑)에 관한 것이었다. 이 탑에 대하여서는 우리의 古文獻(고문헌)이 또한 ‘東方石塔之最(동방석탑지최)’라고 특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석탑 년대에 대한 日人(일인)학자 關野貞(관야정) 박사의 新羅統一(신라통일) 初期說(초기설)에 대하여 선생은 이 탑을 百濟(백제) 末期(말기)로 比定(비정)함으로써 다만 그 연대의 차이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 귀속 國家(국가)를 달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日人(일인)이 이 석탑과 그 탑이 자리 잡은 彌勒寺址(미륵사지)의 創建(창건)을 三國戰(삼국전)에서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의 安勝(안승)이 金馬渚(금마저)(益山(익산))에서 누렸던 報德國王(보덕국왕)으로서의 약 10년(文武大王(문무대왕) 14년부터 神文王(신문왕) 3년․674~683)에 比定(비정)하였다. 동시에 이 같은 比定(비정)의 文獻(문헌)으로서는 주로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益山條(익산조)를 들어서 설명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高(고) 선생은 첫째 문헌으로서 三國遺事(삼국유사) 卷(권)2 武王條(무왕조)를 들었으며 이에 따라서 이 석탑의 창립을 百濟(백제) 武王(무왕)의 治世基(치세기)인 7세기 전반으로 비정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이 석탑과 夫餘邑(부여읍) 南(남)에서 전래하는 百濟古都(백제고도) 유일의 定林寺址(정림사지) 5층 석탑과의 비교에서 이 미륵사 석탑을 그보다 앞서는 백제 최초의 작품으로 추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兩塔(양탑)의 연대추정은 주로 이 두 탑이 지니는 양식에 대한 藝術論的(예술론적) 考察(고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日人(일인)이 기왕에 미륵사 석탑을 新羅統一(신라통일) 初期(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함으로써 古新羅(고신라)의 작품인 경주 芬皇寺塔(분황사탑)보다도 下位(하위)에 두고자 한데 대하여 선생은 이를 전도하여 益山石塔(익산석탑)을 百濟王朝(백제왕조) 掉尾(도미)의 所作(소작)으로 새로 비정함으로써 한국 石塔(석탑)의 始源(시원) 그 자체를 百濟國土(백제국토)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선생의 새로운 立論(입론)은 문헌에 따르는 考察(고찰)도 있으려니와 그보다도 이 석탑이 지니는 樣式系統(양식계통)을 삼국시대의 木造塔婆(목조탑파)에 둠으로써 百濟故土(백제고토)에 있어서의 木塔(목탑)의 先行(선행)과 그를 다시 石材(석재)로서 飜案(번안)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百濟塔婆(백제탑파)의 발생과 古新羅(고신라)에 있어서의 그것을 각기 別系(별계)로서 구분하고 前者를 木塔系(목탑계), 後者(후자)를 塼塔系(전탑계)로 규정하였다. 이 같은 益山(익산) 彌勒寺石塔(미륵사석탑)을 中心(중심)으로 삼은 韓日學者(한일학자)의 論議(논의)는 그 후 재연되지는 못하였으나 그 寺址(사지) 자체에 대한 해방 후의 조사 특히 昨今年(작금년)에 이르러 이 寺址(사지) 일부(東塔址(동탑지))에 대한 발굴을 통하여 이 사원의 建立年代(건립년대)를 뒷받침하는 중요자료의 수합이 계속되었다. 동시에 이 같은 三國最大(삼국최대)의 彌勒寺(미륵사)가 이곳 益山(익산)에 건립되는 史的(사적) 背景(배경)이 文獻(문헌) 또는 遺蹟(유적)이나 遺物(유물)들을 통하여 더욱 밝혀짐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寺院(사원)이 이곳에 設置(설치)되는 최대의 이유로서 百濟王國(백제왕국)이 이 땅(금마저)으로 遷都(천도)한 事實(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기록은 우리 古代史書(고대사서)에서는 뚜렷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最近年(최근년)에 새로 우리에게 알려진 中國六朝代(중국육조대)의 ‘觀世音菩薩應驗記(관세음보살응험기)’에 부록된 百濟記事(백제기사)(帝釋寺本塔條(제석사본탑조))의 첫 머리에서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백제무광왕천도지모밀지)’라고 明記(명기)되고 있어 한층 그 같은 百濟(백제)의 천도사실을 文徵(문징)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말하여 둘 것은 이 같은 새로운 古文獻에서 百濟의 益山遷都(익산천도)의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보다 앞서서 해방 후 數十年(수십년)에 걸친 이 地區(지구)에 대한 우리 자신의 現地調査(현지조사) 또는 古山子(고산자) 金正浩(김정호)의 大東地志(대동지지)에 ‘今益山武王置別都於此(금익산무왕치별도어차)’라고 한 기록 등에서 이미 추정되어 왔던 바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地域(지역)에 대한 史的(사적) 背景(배경)이 더욱 밝혀짐에 따라서 우리의 시야도 확대되었으며 그에 따라 彌勒寺(미륵사)의 創建事實(창건사실) 또한 한층의 考察點(고찰점)을 얻었다고 하겠다.


  <4>

  ‘韓國塔婆(한국탑파)의 硏究(연구)’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韓國石塔(한국석탑)의 始原樣式(시원양식)에 대해서 대한 論議(논의)에서 하나의 중심을 찾을 수가 있겠다. 그리하여 선생은 우리 塔婆(탑파)의 發生年代(발생년대)와 그 作品(작품)과 양식을 설명하려 하였으며 그 産室(산실)은 당시 韓半島(한반도)의 東西(동서)에서 대립하던 百濟(백제) 新羅(신라) 특히 전자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이 兩系(양계)의 綜合(종합)으로서 韓國石塔(한국석탑)의 典型樣式(전형양식)을 다시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같은 綜合(종합)의 계기를 新羅(신라)에 의한 三國統一(삼국통일)에서 보고저 하였으며 그에 따르는 작품으로서는 경주 東海邊(동해변)의 感恩寺址(감은사지) 동서 3층石塔(석탑)과 경주시 暗谷洞(암곡동) 高仙寺址(고선사지) 3층石塔(석탑)을 들었던 것이다. 前者(전자)는 文武大王(문무대왕)이 ‘欲鎭倭兵(욕진왜병)’코자 東海國(동해국)에 창립한 護國大刹(호국대찰)로서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 二年(이년)(六八二(육팔이))에 完成(완성)된 大塔(대탑)이다. 이에 대하여 後者(후자)는 元曉大師(원효대사)의 主刹(주찰)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 年代(연대)는 또한 統一(통일) 直後(직후)로서 感恩寺塔(감은사탑)과 接近(접근)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兩塔(양탑)을 典型(전형)으로 삼아서 한국 石塔(석탑)의 定型(정형)은 마침내 이루어졌으며 그 후 新羅(신라)와 고려에 이르는 歷代(역대)의 石塔(석탑)들은 이를 模(모)하고 다시 이를 縮小(축소)하면서 변천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이들 感恩(감은)․高仙(고선)의 兩塔(양탑) 建立(건립)의 배경으로서 선생이 다시 시대와 人物(인물)과 장소, 이들 三者(삼자)의 契綠(계록)을 들은 것은 한국의 塔婆(탑파)가 우리의 歷史(역사)와 美術(미술)과 信仰(신앙)에서 이룩된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그 후 역대의 塔婆(탑파)는 시대에 따르던 변천상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또는 佛國寺(불국사) 多寶塔(다보탑)과 같은 변형을 創立(창립)하면서 한국塔婆(탑파)로서의 독특한 전통양식과 그 아름다움을 이어왔던 것이다. 한국이 石塔(석탑)으로서 古代造形(고대조형)을 대표시킬 수 있는 만큼 그들에 대한 선생의 이 著書(저서)는 길이 우리 美術史(미술사) 硏究(연구)에서 빛과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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