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1848년에 프랑스에선 2월 혁명이 있었고, 같은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1968년 전 세계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2월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 국한되었지만 이번엔 프랑스, 영국, 서독, 이탈리아, 체코, 미국, 멕시코, 일본 등 유럽, 북중미, 동아시아를 넘나드는 진정한 의미에서
미투 운동의 열기가 뜨겁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여성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그들의 지속적인 고발로 성폭력 사건이 결코 개인 간의 사적인 일이 아닌, 젠더 권력과 위계질서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각계각층의 수많은 남성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은 게 아니라 겨우) 사회적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가해자에게 감정이입 한 일부 남성은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거론하며 펜스 룰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펜스 룰(Mike Pence rule)은 마이클 펜스 미 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한국
왜 사랑인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말했듯 “사랑의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담론은 때가 아닌 것 같을 때에도 유유히 존재해왔다. 세계가 황폐해지거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거나, 많은 이들이 끝없이 상처받을 때에도 사랑은 문학, 음악, 연극 등에서 끝없이 재현되는 중요한 소재이자 화두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도, 파멸시키기도 하는 강렬한 정동(affect)으로도 작용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정동으로서의 사랑이 전부라고 말할 수
홀로코스트의 주모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최종 재판에 넘겨지기 직전 정신감정을 받았다. 그를 감정한 의사와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판단했다. 예루살렘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이히만이 외설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되고 있던 소설 『롤리타』를 읽고 ‘아주 불건전한 책’이라며 화를 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미치광이나 악마가 아니라 자상한 가장이자 상식적인 국가 공무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 대학 강사였던 한나 아렌트는 미국의 『뉴요커』지 특파원 자격을 얻어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의 냉전연구서인 The Cold War: A World History(2017)는 보기 드문 대작이다. 이 책은 1945년 파시즘 체제의 종말과 함께 시작된 냉전체제를 보다 넓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야심만만한 저서이다. 여기서의 '보다 넓은 세계사적 관점'이란, 공시적인 관점과 통시적인 관점 모두의 확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일견 무모해보일 정도로 광활한 시간대와 지정학적 관점을 고려한다. 이 책이 지향하는 냉전세계사의 핵심이자 가장 독창적인 관점은 냉전의 기원을 19세기
멜로드라마, 코미디, 범죄 등은 국가를 초월하여 인기를 끄는 영화 장르(Genre)이다. 이들 장르는 대체로 인류의 보편타당성을 근저에 두고, 특정 국가의 역사적·사회적·정치적 특수성에 맞게 변주되어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면 미국의 웨스턴(Western)과 같이 특정 국가의 맥락 속에서 피어나 세계적으로 뻗어나간 장르도 있다. 한국에서는 ‘분단영화’가 이에 해당한다. 최은진의 연극영화학과 박사학위 논문 「 이후 분단영화에 나타난 핍진성과 장르변주의 상호텍스트적 관계 연구」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궤적을 함께 한
아감벤은 현대 예술을 ‘내용 없는 예술’이라고 말하며, 현대 예술의 방향이 “내용 없는 형식적 새로움”으로만 향해 간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 아감벤은 과거 예술과 현대 예술의 분리와 그 의미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현대 예술과 미학은 예술가와 관람자에게 그에 따른 고통과 허무를 안겨준다. 또 우리는 자주 미적 판단의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간과하고 예술을 마주한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현대 예술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는 현대 예술과 예술의 운명에 대해 자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예
‘바깥’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대한 흐름을 마주하게 된다. 블랑쇼, 바타이유에서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바깥의 사유’로 일별될 수 있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전복의 시도는 먼 한국의 지성계에도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그 전모의 대강을 드러낸 전통의 형이상학은, 탈-근대적 현대에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바깥의 철학은 이 형이상학이 구축하고 있는 동일성과 차이의 이항대립적 질서에 대한 부정을 표방하면서 그러한 질서의 내부에 대하여 외부를
홍진혁의 영화영상학과 박사학위 논문「1960년대 한국영화 모더니즘 스타일 연구」에서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고전적 양식이 본격화된 시기인 동시에 모더니즘 미학이 대두된 시기로 규정된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비평은 서구영화의 미학을 우월한 담론으로 상정하고 영화를 통해 연역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밝힌다. 또 1920년대까지 문학작품이 원작이 되어 만들어져 좋은 영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예술영화’라는 용어가 해방 이후에는 대중영화와 예술성 있는 영화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며 지적했다. 필자는 이러한 예술성에 대한 일종의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노동 윤리는 농경사회에는 잘 들어맞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농부 아버지가 잠만 자는 아들한테 “이놈아, 뭐라도 일을 해!”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들은 주섬주섬 산에 나무하러 가든 방에서 새끼를 꼬든 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노동은 자연을 직접적 대상으로 삼았고, 노동과 삶의 영역은 그다지 구분되지 않았다. 노동은 상당한 정도로 자기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노동 윤리의 맥락은 바뀐다. 아버지에게 꾸중 들은 백수 아들이 일하자고 마음먹어도 일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
요즘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이라는 동요가 인기다. 아이들뿐 아니라 20대 사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어 유튜브 누적 조회수 10억 뷰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뜯어보면, 그다지 교육적이지는 않다. 3대로 이루어진 상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 노래는 젠더화된 가족과 생태계의 포식자 질서를 잘 보여준다. “귀여운 아기 상어”, “어여쁜 엄마 상어”, “힘이 센 아빠 상어”, “자상한 할머니 상어”, “멋있는 할아버지 상어”로 이루어진 상어 가족은 바다의 포식자답게 작은 물고기들을 몰고 다니며 날
이전부터 이어져오긴 했지만 특히 올해 여름을 맞이하기 직전 몇 달간, 나는 데리다의 사유에 천착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왜 데리다인가? 아마도 제기될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끌림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데리다의 사유가 요청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대답일 것이다. 소위 포스트-모던이라는 무한한 개방성의 표제 아래 ‘이론’적 사유를 상실하고 있는 지금. 아직 생존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용되는 현대 사상가가
『스스로를 달빛삼다』는 법정스님의 대를 잇는 불교계 대표 문장가로 알려진 원철스님의 산문집이다. 한때 ‘커피 잘 내리는 스님’으로 통하기도 했던 원철스님은 산에서 머물던 마음을 도시로 실어 나르고 도시의 화두를 다시 암자에 전하며, 수행과 속세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도를 닦는다고 할 지라도 의식주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더불어 대중 생활을 하면서 의리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29쪽)는 담담한 문장은 원철스님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흔다섯 개의 삽화들은 ‘걸음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라는 헤겔의 말처럼, 분명 우리는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고귀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정동이 저열하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저 먼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는, 우리는 존재한다. 용납할 수 있든 없든,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냥 그렇게 있다. 세계는 주관에게 자기를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만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헤겔은 정신의 성숙과 발전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의식과 세계 사이의 괴리와 간극 앞에서 자기 자신에
『노자』에는 비철학적인 언변과 비논리적인 발상 등이 등장한다.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어 체계적인 이해와 연구가 어렵다. 신양섭의 논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매체론의 관점에서 본 노자의 道」는 『노자』를 ‘언어적 재현’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해석한다. 이때 크라카우어의 매체적 사유는 언어적 재현이 가능한 통찰들의 발견을 용이하게 한다. 매체(媒體)란 무엇일까? 글자그대로 ‘媒’(연결)과 ‘體’(몸)으로, 즉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는 대상으로서 특정한 물질성 또는 형식을 지닌”다고 풀이된다. 크라카우어의 매체론에서 기본적인 개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참모들과 머리, 어깨를 맞대고 토론하겠습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 광장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연설에서 청와대와 광화문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의 대비를 이루고
오늘 고른 이 책은,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예술이란 것이 서 있는 토대 혹은 지평을 조망하게 해 준다. 형이상학과 미학의 지평이 그것인데, 우선 아방가르드한 운동의 영향 아래 현대의 예술이 ‘예술의 삶 되기’라는 파르헤지아를 주장하는 한 그것은 삶, 즉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어떤 식으로든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과의 접점을 갖는다. 그리고 사실 이 접점을 사유하는 방식의 차별성이야말로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의 특수성을 온전히 지탱하며 그런 미학적 사유의 고유한 힘으로부터 예술은 자신의 존재론적 권리를 보장받는다.
역사는 늘 폭력과 함께 해왔으며, 현재에도 폭력은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 대학살, 인종주의, 테러리즘, 공권력 등이 그것이며, 우리는 언제든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폭력’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는 철학으로써 폭력을 향한 저항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 책의 논의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과 ‘1960년대’로, 두 시기 모두 폭력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 역시 이 시기들을 지나쳐 왔기에, 폭력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폭력을 향한 철학자들의
‘내 인생의 책’을 추천하는 글을 쓰기 앞서, 사실 내게는 내 인생의 책이 따로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수전 손택은 독서가 ‘여흥이자 휴식이며, 작은 자살’이라고 했다(『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작은 자살이란 표현은, 그만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각한 채 책 속의 인물에 빙의되어 독서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 역시 ‘작은 자살’과 다를 바 없는 독서를 추구하고 사랑한다. 독서를 하는 매순간이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자 타인이 되어보는 연습이라면, 나를 사로잡은 그 모든 책들이 내게는 ‘내 인생의 책’인 것이다. 그
현대에는 우울증 및 정서적 불안 환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그 최초 발현 연령 또한 낮아지고 있다. 변승현의 논문 「가상현실 콘텐츠 심리치료의 법제화를 위한 헌법적 연구」는 우울증에 있어서 ‘약물치료’ 방법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하며, ‘심리치료’를 대체방안으로 삼고 있다. 또한 과학의 발달이라는 현재의 추세에 맞게, ‘가상현실 콘텐츠 360˚ VR’을 이용한 심리치료의 가능성을 입증하고, 나아가 그에 대한 법제화 마련까지 논의한다. ‘가상현실 콘텐츠 심리치료’란 무엇일까? 논문에서는 “현실과 유사한 가상공간에서 내담자의 감정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