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 123RF.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노동 윤리는 농경사회에는 잘 들어맞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농부 아버지가 잠만 자는 아들한테 “이놈아, 뭐라도 일을 해!”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들은 주섬주섬 산에 나무하러 가든 방에서 새끼를 꼬든 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노동은 자연을 직접적 대상으로 삼았고, 노동과 삶의 영역은 그다지 구분되지 않았다. 노동은 상당한 정도로 자기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노동 윤리의 맥락은 바뀐다. 아버지에게 꾸중 들은 백수 아들이 일하자고 마음먹어도 일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이 자연을 이용해 직접 생산하는 사회가 아니고 생산하려면 어딘가에 고용되어야 한다. 삶과 노동은 나뉘어졌다. 백수 아들이 노동할 수 있는지 여부는 고용주의 의사와 취업 시장의 경기에 달렸다.

  하지만 산업의 성장기에는 노동에 대한 수요도 꾸준히 늘었으므로, 원하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원하는 일자리’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 번 일자리를 얻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안정적으로 노동할 수 있었다. 예전 TV 드라마에는 ‘만년 과장’이 한 명씩은 꼭 등장했다. 나이가 쉰이 넘도록 승진을 못하고 과장 자리만 지키는 인물인데, 능력 차이가 있어도 일단 고용되면 그런대로 삶을 영위하던 시대가 그 배경에 있었다. 노동 윤리도 그 권위를 잃지는 않았다.

  오늘날은 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한편으론 노동할 기회가 없고, 한편으론 노동해도 먹고 살 수가 없다. 적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일을 하려면 ‘할 일이 너무 많다.’ 더 높은 학력과 스펙을 장착해야 하고 더 고된 인턴과 봉사활동을 해야 하며 더 감동적인 자기 소개서를 써야 한다. 20년 전에는 직원의 숙련은 취업 후 노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취업 준비자가 꽤 큰 비용을 들여 스스로 갖춰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금수저 아닌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급히 일을 구해야 하지만 그 일은 대개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다. 취업 전 임시직이라 여기지만, 임금이 적으니 오래 일해야 하고 오래 일하니 취업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고 취업에 실패하니 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한다. 취업 시장은 이중 구조화되고 소수의 질 좋은 일자리와 여기저기 널린 질 낮은 일자리 사이에 벽은 더 높이 올라간다.

  정보기술을 활용한 ‘플랫폼 기업’이 속속 등장하면서, 불안정하나마 고용 계약의 보호를 받는 일자리마저 사라져간다. 일자리는 핸드폰으로 뿌려진 문자에 빨리 답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임금은 그가 일한 시간만큼 딱 맞춰서 지급된다. 근로 계약 없이 일하는 ‘0시간 계약 근로자’가 영국에서는 전체 근로자 가운데 15%~30%라고 추정된다. 이런 형태의 노동자는 매번 다른 내용의 작업을 다른 환경에서 수행하므로 숙련의 기회가 없고 따라서 점점 더 자존감을 낮추는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2013년에 미국의 온라인 구인구직 기업 태스크래빗이 ‘최고의 알바’로 뽑은 청년은 신상 아이폰 구매자를 대신해 매장 앞에서 100시간 줄을 서고 1500달러를 받았다. ‘대신 줄 서기(line-sitter)’를 돈 주고 시켜도 되는지 논란이 일었다. 문제는 이런 일자리라도 절박하게 원하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는 점이다.

  자립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노동은 운과 조건과 능력을 갖춘 소수에게만 돌아간다. 반면 대다수에게 노동은 자립과 부양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되지 못한다. 일을 하고 싶어도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일을 해도 원하는 삶을 얻을 수 없다. 청년들이 인생의 지도를 펼치고 아무리 따져 봐도 ‘견적이 안 나온다.’ 결혼, 출산, 희망의 포기가 뒤따른다.

  노동은 어떤 시대든 인간의 삶과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인간을 노동하게끔 규율하기 위해 노동 윤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하기 위해 삶이 착취당하고 노동을 해도 삶이 불안정하다. 오늘날 필요한 건 노동 윤리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노동과 사회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 일을 노동사회의 재구성이라고 부르자. 그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

  과거의 노동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답이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한국에서 2020년까지 41%의 노동력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다. 실업의 공포를 잠시 제쳐두고 보자면 이러한 기술 혁신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자연과 씨름하거나 풀타임 노동자를 표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기술은 오랫동안 인간이 협동하여 축적한 지식, 정보, 빅데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 협동이 인공지능 진화의 원천이라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수익에 대해 개발자나 인공지능 소유 기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동 생산자의 자격으로 배분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사회의 재구성은, 시민을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민주적 원칙에 따라, 혁신의 성과는 공유하고 사회의 부는 재분배하여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또 하나, 오늘날 생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라는 산업 시대의 가치는 더 이상 선(善)이 될 수 없다.

  노동사회 재구성의 방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개인의 생계와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을 대폭 줄이고 동시에 공정히 배분해야 한다. 1930년에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예상했고 최근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란 책에서 뤼트허르 브레흐만도 제안하듯이, 현재의 기술과 경제 수준으로 적어도 선진국에서부터 주 15시간 노동제를 실행할 수 있다. 하루 3시간만 일하는 세상은 꿈이 아니다. 필요한 노동의 공정한 배분은 여러 의미를 포함한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면 일자리 나누기가 쉬워진다. 또 원하는 직무나 일자리를 갖기 위한 기회가 실질적으로 균등해야 한다.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에 매인 사람은 숙련과 자기 계발의 기회가 부족해 선망하는 일자리로 올라갈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공정한 경쟁을 위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덜 쾌적하고 더 위험한 노동을 저임금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떠맡기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자동화하든지 일반적인 작업보다 높은 수당과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둘째, 노동 대신 삶의 영역을 확대해야 하고,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삶의 영역이 확대된다는 건 단순히 여가시간만이 아니라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 완결적인 활동을 늘리는 것을 뜻한다. 최근 유튜브 열풍이 불면서 신변잡기 동영상을 찍는 일조차도 ‘유튜브로 1억 벌기’ 같은 모델을 좇아가고 있다. 잘 팔리는 영상을 만드는 법칙들이 통용되는데, 선정성은 그 하나일 뿐이다. DIY는 획일적인 소비에서 벗어나 직접 만들자는 것인데, 신종 알바로 ‘DIY 대행 알바’가 뜨는 건 ‘웃픈’ 일이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각자가 자기의 목적과 가치를 좇아 살 수 있어야 진정 자유로운 사회다. 영화 ‘스타트렉’의 주인공들은 로봇과 인공지능에게 생산을 맡기고 자신들은 머나먼 우주로 모험(trek)을 떠난다. 노동의 압박에서 벗어날수록 모든 사회 영역에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이 일어날 것이고, 이는 혁신으로 이어지며 혁신의 성과는 다시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노동사회를 재구성하려면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정기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현금으로, 개개인에게, 자격심사 없이, 취업이나 근로 같은 요구 조건 없이 제공한다. 기본소득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시민의 기본권으로 주어진다. 기본소득은 액수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만큼에 해당하는 노동을 시장에서 해방시키는데, 액수가 커질수록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의 탈상품화는 빨라진다. 기본소득을 보장받고 노동시간을 줄이면 다 같이 적게 일하면서 일자리를 나눌 수 있다. 예술 창작, 공익적 아이디어의 현실화, 시민의 정치 참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자발적인 돌봄 등 의미 있는 활동이 더 늘어난다. 기본소득은 도약의 발판이고 실패의 쿠션이다. 대다수 사람이 노동에 매여 있고 일부는 비참한 노동에 붙박혀 있거나 또는 노동할 기회가 없어 비참한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의 수단이다.

  노동은 그것이 필요한 한 공정하고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하고, 인간이 자유로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실현 가능하다. 기술과 부의 공유, 기본소득 도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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