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年엔 映畵硏究會(영화연구회)도 창립

Ⅲ. 중요한 公演(공연)들 ⑦

  동대연극의 명예를 올려놓는데 크게 도움을 준 것은 연극공연 외에도 이미 소개한 한국최초의 학생방송극 ‘완 딸라’를 비롯, 兪賢穆(유현목)씨의 영화 ‘海風(해풍)’을 간과할 수 없다.

  1. 兪賢穆(유현목)씨와 映畵(영화)<海風(해풍)>

  극예술연구회를 1947년 趙誠夏(조성하), 韓在壽(한재수), 李綱鉉(이강현)씨 등 4․50여명이 모여 창단하였는데 이해에 이미 兪賢穆(유현목)씨는 영화사에서 조감독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앞에서 밝힌바 있듯이 兪賢穆(유현목)씨도 처음엔 극예술연구회 회원이었고 그곳에서 영화 ‘운명의 만하탄’ ‘제인 에어’ 등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교외에서 기성영화인들과 ‘審判者(심판자)’ ‘전위대’ 등의 조감독을 했던 兪賢穆(유현목)씨는 1947년 교내에서 ‘에레이지’(elegy)를 제작 준비 중 본격적으로 영화만 하려는 사람만 모였으면 하고 생각, 몇몇 극예술 연구회 회원들과 상의하여 결국 1947년 9월 초순 東大映畵藝術硏究會(동대영화예술연구회)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총회에는 약 100여명의 학생들과 선배들, 그리고 金起林(김기림), 梁在東(양재동), 皮天得(피천득)씨 등의 지도교수들이 참석했으며 회장에 兪賢穆(유현목), 총무부장에 金泰均(김태균), 씨나리오 문예부장에 金亨杰(김형걸), 세미나 연구부장에 李亨根(이형근), 제작부장에 申弼均(신필균) 섭외부장에 沈明翊(심명익)씨 등이 선출되었다.
  학도호국단 문화반(반장에 시인 鄭雲三(정운삼)씨)에 예속, 등록을 마치고 책임지도 교수로는 金起林(김기림)(拉北(납북))교수, 故(고) 安夕影(안석영), 金聖眠(김성면)씨 등 기성영화감독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兪賢穆(유현목)씨의 回顧談(회고담)에 의하면 초기사업에는 갑부들의 주머니를 털어 외부영화인을 초청해서 강의를 여러 차례 들었고 우수영화합평회, 이론 및 씨나리오작품을 돌려 읽기, 명화를 대상으로 해서 전교생 중 희망자를 단체 입장시켜 일종의 명화관객동원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창립초기부터 이렇게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다보니 호기심만으로 엿보던 회원의 많은 이탈이 있었고 李亨根(이형근), 金龍煥(김용환), 申弼均(신필균), 金亨杰(김형걸), 金泰均(김태균), 申申悟(신신오), 沈明翊(심명익), 白信子(백신자), 孫興周(손흥주), 韓圭卨(한규설), 金根培(김근배), 姜信卓(강신탁)(鳴(명)) 兪賢穆(유현목), 郭某(곽모), 梁某(양모), 崔鷲獅(최취사)(특수회원)씨 등 20여명만 남게 되었다.
  전국 대학 중에서 동대만 영화에 술연구회가 있었던 때문에 회원들의 사기는 충전해있었고 학교 측의 관심도 컸다.
  兪賢穆(유현목)씨의 설로는 처음에는 극영화 씨나리오 ‘悲歌(비가)’(마쓰네曲(곡))를 첫째 작품으로 선택하였는데 당시 지도교수 金起林(김기림)씨에 의해 <이것은 너무 인상파적 경향의 조잡성이 깃들여 학생영화로서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제작에 들지도 못하고 그만 두었으며 그 후 金起林(김기림)씨와 ‘바다와 나비’ 李箱(이상)의 ‘날개’를 채택하기로 했었으나 회원들의 중론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후에 채택된 작품이 李樹嶺(이수영)작 ‘海風(해풍)’이다.
  ‘海風(해풍)’은 한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아들 3대에 걸친 얘기를 그린 순극영화인데, 1949년 9월 상순에 숱한 어려움을 거친 후 크랑크․인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토키 16미리 흑백으로 45분짜리인데 기술적인 문제로 金聖眠(김성면)감독과 촬영기사 元容一(원용일)씨를 초청하여 해결해갔다. 촬영은 仁川(인천) 永宗島(영종도)에서 合宿(합숙)을 하며 계속되었는데 풍랑으로 인해 아들이 미치자 학교 못 보내는 노인의 고민과 썩은 생선토막을 들고 바다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미친 아들의 절규가 이 영화의 명 씬인데 미친 아들 역엔 兪賢穆(유현목)씨가 직접 출연하면서 감독까지 겸했다.
  약 1개월여 촬영이 계속되었는데 이미 학교에서 지급한 團費(단비)는 모두 없어지고 회원들의 부담으로 겨우 촬영만 끝내놓았을 뿐 현상, 편집, 녹음비가 없어 몇 번씩 중단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어려움이 崔鷲獅(최취사)씨의 협조와 그 다음 영화예술연구회 회장직을 맡은 李亨根(이형근)씨에 의해 거의 완성단계까지 다달았다.
  1950년 5월 東國文化祭(동국문화제)가 국립극장(명동 예술극장)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 ‘海風(해풍)’이 공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영화인 이 ‘海風(해풍)’은 채 녹음이 끝나지도 않은 채 무성영화로 영사되기는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주목꺼리가 아닐 수 없었다.
  각 대학에서는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발표된 영화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흠을 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韓在壽(한재수)씨의 說(설))
  이 바람에 득을 본 것은 동대 극예술연구회이기도 했다. 동대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이 기성인을 능가하는 작품을 내서 주의를 모은 터에 영화까지 초점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발표 전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선 극예술연구회에서 연쇄극정도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高大出身 金京鈺(고대출신 김경옥)씨 설)
  그 후 이 ‘海風(해풍)’은 文化祭(문화제)의 音樂班(음악반) 四重唱(사중창)에 출연했던 崔在曜(최재요)씨가 음악을 담당하여 녹음했고 이어 명동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USIS시사실을 빌어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다음 작품에 착수하려던 때에 6․25동란이 일어났고 동란으로 인하여 다음 작품의 제작은 펼쳐보지도 못했고 ‘海風(해풍)’의 원판 필름도 불타버리고 마는 애석함을 안기도 했다. 兪賢穆(유현목)씨의 설로는 영사용 필름은 李亨根(이형근)씨가 채무 때문에 某(모)씨에게 압수당했다고 전해 들었으며 후문에 의하면 이 ‘海風(해풍)’은 개명되어 산간벽지 순회흥행사의 손에 넘어가 영업의 길에서 필름이 낡아 없어졌다고 한다.
  이 영화 ‘海風(해풍)’으로 각계로부터 격찬을 받던 시기가 없었던들 동대영화는 崔琴銅(최금동)씨에서 시작해 끝을 냈을 것이나, 兪賢穆(유현목)씨로 계속 이어져 金泰洙(김태수)씨와 같은 제작자와 姜信卓(강신탁)(鳴(명)), 崔春芝(최춘지), 廉相敏(염상민), 金甲毅(김갑의)씨 등의 명기획자, 金在明(김재명), 河漢洙(하한수), 鄭一宅(정일탁), 李星究(이성구), 金宣慶(김선경)(善慶(선경)), 黃學奉(황학봉)씨 등의 감독이 아직도 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 ‘海風(해풍)’이야말로 한국영화사는 물론, 동대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현재도 크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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