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관용으로 民主化(민주화) 이뤄야

  어제의 조국근대화의 神話(신화)가 오늘은 조국의 민주화로 Inflation을 전제한 고도의 경제성장이 脫(탈)Inflation을 열망하는 안정으로, 그리고 획일화가 다양화로 국론분열방지의 총회만능이 여론의 함박꽃으로.. 참으로 많은 신화와 가치체계가 근저로부터 변화하고 있다. 뿌리까지 뽑혀버린 것 같던 理性(이성), 信念(신념), 正義(정의), 民主(민주), 지금은 너무 많이 쓰여 일반화된 단어들이 二次大戰(이차대전) 終戰(종전)으로 주어졌던 解放(해방)처럼 그렇게 주어진 民主化(민주화)의 동산에서 연약하게나마 싹을 돋우는 때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純白(순백)은 못되지만 어쨌든 착색된 채로나마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변화를 추진하는 근저는 행동하는 양심의 表象(표상)이며, 나라와 겨레를 아끼는 知性(지성)이 正義(정의)를 구현하려는 마음의 결정체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가, 이 들끓는 움직임이, 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一章(일장)이 사랑의 단비로 촉촉이 젖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항시 큰 변동은 변동전 상황의 反動性(반동성)을 行動化(행동화)하여 말 그대로 과도의 의미를 띤 채 反動(반동)으로 靜化(정화)된 어떤 제도나 체제나 정치양상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사랑의 장막, 관용의 가랑비가, 위기를 극복했다기보다는 모면한 사람들에게는, 미움보다 이루기 어려운 높은 경지인 것이며, 차라리 폭력의 숙청이 當爲(당위)임을 갈파하고, 변동전에 당했던 ‘다른 생각’에 대한 철저한 압제의 덫을 이제는 씌워가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중요하던 思考(사고)의 경직화를 두 손 내밀어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돌이켜 볼 것도 없이 우리의 政治史(정치사)는 압제자와 피압제자의 피나는 투쟁사였으며 이 불행이 언제라야 西歐(서구)가 지불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획득했던 적당량의 피가 될는지를 현상황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 중대한 轉換期(전환기)에서 우리는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의 실현보다는 사랑으로 굴절된 民主化(민주화)를 이룩해야겠으며 ‘다른 것’을 ‘현재의 통념’에 흡수할 수 있는 관용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작금의 신문을 대하면 논리를 거두절미해버린 感(감)이 있지만, 몇몇 大學(대학)의 민주화행동, 일컬어 폭력행위를 읽고 나서 한 가지 뚜렷하게 일어나는 생각은 ‘이런 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한 달 전쯤 모대학교 총장의 일간신문 투고문중에서 ‘죄가 있다면 민족에 장래에 대한 걱정과 옳다고 믿는 民主(민주)에 대한 속박을 반대한 제자들이 용기 있는 동료들이, 찬 감옥에 영어되어 그 속에서도 초지를 일괄하여 民主(민주)의 信念(신념)을 다지고 있을 때 자가용을 타고 대학을 오르내리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침묵을 했던 부끄러움이 있음’을 고백하며 ‘...그러나 제자들아 다시 이러한 속박의 날이 온다면, 다시 또 양심이 行動化(행동화)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생활을 할 것 같은 나를 채찍질 해 달라’고 하던 구절을 읽고서 이런 글을 꼭 써야 하는 이 땅의 사회풍토가 역겨웠습니다.
  그들은 천박한 정치, 사회풍토에 던지는 가변함수일 수밖에 없는 학자의 큰 울음소리인 것입니다. 정말,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사회가 지금으로서 끝이 아니라면, 부존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총동원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자신에게 채찍질을 요구하는 자숙의 커다란 울음소리와 사랑과 존경과 신뢰의 회복이 만나는 점에서 生成(생성)되는 化合物(화합물)은 퇴임이나 축출이 아닌 관용과 그에 따른 힘의 보탬이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모든 것이 정방위를 향해서 변화하는 현재 올바른 大學知性(대학지성)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랜 세월을 종합적 사고의 一般個性(일반개성)을 파괴당한 채, 不信(불신)과 증오와 몰합리의 질병으로 시달려온 국민의 마음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일이며, 큰 힘으로 뭉쳐진 知性(지성)의 소리가 그 行動(행동)이 학도호국단문제에서부터 어용교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열매 없는 내부분열의 함몰을 중단하고 지성만이 추정할 수 있는 모든 非民主(비민주)의 덫을 부수고 새로운 神話(신화), 사랑으로 굴절된 조국민주화에의 선구자적인 투신을 보여 주어야겠다.
  2·29 복권조치후 복학한 여러 학생들이 그 투쟁경력 때문이기보다는 어려운 시기를 고난 받으면서 지내온 시대사적 증인으로서 교수·학생들의 갈채를 받으며 학원으로 돌아온 명예로움이 있다면, 의지가 굳지 못해 잘못된 행동을 하고 냉철히 생각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지난 시대의 지배논리에 묵시적 동조를 했던 또 한편의 피해자들이 일컬어 ‘어용’매카시즘의 열풍에서 매도와 굴욕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연한 현실이 있는 것이다.
  최근 모신문 컬럼난에서 ‘어용’을 장황하게 예를 들고난 뒤 ‘이런 사람들은 마땅히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서슬 퍼런 논리를 전개 해 놓은 글을 대하고 문득 생각 키우는 것은 70년대초 동아일보 광고게재 기피사태 당시 같은 배를 타야했을 他(타)신문의, 존립을 위한 침묵이었겠지만, 그 긴 침묵은 지금은 그들이 그렇게 치를 떨며 배척하는 ‘어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 와서 그렇게 쉽게 소리 내는 신문도 大學知性(대학지성)에 그 맥락이 닿고 있는 것이며, 지금의 신문 지성을 있게 한 이정표며, 지식의 探針(탐침)이었던 은사를 향해서 자숙의 요구도 어려운 것일텐데,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 사회풍토만이 갖을 수 있는 편승의 일면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知性(지성)이 경계하고 규탄해야 하는것은 함께 호흡한 사람들을 매도함으로써 자기의 설 땅을 확보하려는, 현 사회에 이미 만연되고 있는 기회주의가 아닐런지요?
  결국, 道德的(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法律的(법률적) 책임의 문제로 연결지어 그것도 정상참작의 감형과 선고유예의 항목을 삭제한 최근 2~30여년을 몸바쳐온 학계에서 추방을 강요당하는 것은 결코 재삼재사 반복되어서는 안될 비극적인 것이며 이 강요는 그 분들의 각개 분야의 탁월한 知識(지식)을 死藏(사장)시키는 지난 70年代(년대)가 범해온 오류를 그 형태만을 달리해 재범하려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君(군)은 사라졌으나 師父一體(사부일체)의 옛 가르침이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전통다운 전통이라면 억압받았던 아픔을, 이젠 아픔을 동반할 억압으로 들려주는 論理(논리)의 실천보다는, 또한 民族(민족)의 장래를 위해 근본적인 원인제거의 커다란 명분에 입각하기 보다는, 사제의 사랑과, 서로의 과오를 사회와 같이 매장과 징벌로 몰고 가지 않고 용서와 회개의 대화를 통한 관용의 德(덕)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大學(대학)에서, 작금의 진리, 자유의 구현을 사랑으로 굴절시킨 가운데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제 소견을 요약하면은 大學街(대학가)의 정풍운동은 이른바 (어용)교수들이 차지해온 보직의 자진 사임과 자숙의 뜻을 밝혀야 한다고 봅니다.
  대학사회에 엄존해야하는 征衣(정의), 眞理(진리) 구현에 원칙적 동의를 하는 ‘로고스’와 또한 대학사회만은 반드시 부둥켜안고 감싸지지 않으면 안되는 관용과 사랑과 대학의 ‘파토스’가 닿을 듯 말 듯한 쌍곡선을 그리면서 생각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