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구봉 기자
▲권구봉 기자

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물어본 내 모습은 그런 식이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이런 모습은 비단 대화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사람은 글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난다. 따뜻하고 세밀한 감정도, 주인공의 대화 속 스쳐 가는 조연까지도 온전히 묘사하려 애쓴다.

소란스러운 사람은 그런 이유로-어쩌면 필연적으로-글을 좋아하게 된다. 글은 입체적이고 장황한 감정과 상황도 평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이란 감정을 머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생각했다. 불쾌한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보게 하는 건 글이 고유하게 가진 의미다. 이 의미가 소중해 나는 글을 좋아했다.

글을 좋아한다는 생각 하나로 학보사에 들어왔다. 큰 패기보단 소소하지만, 꾸준한 사랑을 가지고.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고요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회상한다.

내가 향유한 문화와 달리 동대신문에서는 감정적인 글보다는 실증적인 글, 장황한 글보다는 신랄한 글을 써야 했다. 나는 스스로 ‘고요한’ 글을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이곳의 글들은 고요하기보단 영혼이 없는 무언가 같았다. 화자가 느끼는 마음과 감정이 가장 뒤에 있는 글들에 느껴지는 게 없다 느꼈다.

그런 내게 수습기자 생활은 ‘선 찾기’의 과정이었다. 내 마음과 생각을 뒤로 젖히고, 흐르는 감정의 발산을 주저했다. 어디까지가 ‘기사글’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선을 밟아보는 느낌이었다.

학생들의 불만을 전하고, 상황을 알리고, 가끔은 학교 관계자들과 부딪히면서 생각했던 건, 내가 기사글을 오해했다는 거다. 실증적인 글을 쓴다는 사실에 집착하느라 기사글을 죽은 셈 쳤던 과거가 떨떠름하다. 내가 쓴 문장에 담긴 투박한 진실 뒤에는 그 사람의 삶이 있었다. 특정 성과를 위한 행운, 능력, 친구의 응원 같은 것들이. 기사글은 그 모든 걸 종합해 담아내는 것이다. 나보다 남들이 중요한 글. 그렇지만 나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글들.

시간이 지나서 나이를 먹는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듯 자연스레 떼게 될 이 타이틀을 ‘이제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보내주며 마냥 기뻐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그렇듯 그저 경험만으로 귀감이 될 만한 일들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지난 경험과, 또 성장과 함께 이 단어를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쓰는 글 속에서 숨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소란스러운 모습으로 빛나길 바라며. 그리고 그 모습을 기록하는 내가 후련한 표정이길 바라며. 마침.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