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假裝人生(가장인생)’ 히트, 劇會(극회) 회생

Ⅲ. 중요한 公演(공연)들 ④

  2. 第(제)2期(기)의 演劇(연극)

  8․15의 감격을 알던 해에는 이렇다 할 연극활동은 없었다. 제2기는 1946년 東國大學(동국대학)으로 승격하던 해부터 1950년 6․25사변을 맞고 피난지 부산에서의 연극활동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기는 그런 의미에서 喜悲(희비)가 가장 많이 엇갈리던 시기이다. 광복의 감격을 알았지만 사회적 혼란과 좌우익의 충돌, 남북 양단, 사회가 안정을 찾을만하니까 또 6․25동란 民族相殘(민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南(남)으로 부산까지 피난해야만 했던 슬픈 시대였다.

□ 劇藝術硏究會(극예술연구회)의 發足(발족)

  1947년 주로 國文科(국문과)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東國大學劇藝術硏究會(동국대학극예술연구회)가 조직되었는데 첫 해엔 당시 敎授(교수)였던 梁柱東(양주동), 皮千得(피천득), 金起林(김기림), 그리고 당시 ‘藝術論(예술론)’ 강좌를 담당했던 講師(강사) 枯岩伷(고암주)(씨의 성은 그 당시도 얘기가 많았는데 高(고)씨가 아니고 만들어서 쓴 枯(고)씨였다)씨가 참여한 가운데 연극에 관한 ‘세미나’와 토론회를 매주 일회씩 가졌다. 이때 주로 논의된 것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 연기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 드라마 트루기와 연극현상에 관한 문제 등이었으며 주로 학생들이 연구하여 발표하고 토론 후 뒷마무리는 교수들에 의해 결론을 짓고는 했었다.

  한편 같은 해 劇藝術硏究會(극예술연구회) 會員(회원)들은 베나벤테(Jacinto Benavente, 1866~1954)의 <理解(이해)>(Los intereses creados, 1907)를 그 첫 ‘레퍼토리’로 선정하고 연습에 들었으나 공연자금(學生會費(학생회비))이 없었다. 회원들은 앞길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해냈고 몇몇 선배들을 찾아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후의 희망을 안고 해방 후 첫 우리말 방송을 하기 시작한 당시 貞洞(정동)소재 中央放送局(중앙방송국)의 金俊浩(김준호)선배를 찾아갔다. 씨는 이미 앞에서도 밝힌바 東大(동대) 최초의 방송인으로 동대劇藝術(극예술)연구회의 門(문)을 열게 해 준 공적도 있지만 그들에게 후원해주기 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 대학최초의 방송국을 제작 방송하게된 것도 큰 의의를 지닌다. 이 일의 추진을 위해서 趙誠夏(조성하)씨와 趙孝慶(조효경)씨가 수고했으며 작품은 애란의 작품 <완 달라>였다.

  放送劇(방송극) 출연료를 받은 이들은 힘을 얻었고 회원들의 입에선 ‘하면 된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방송극 출연으로 일시 중단했던 연습은 前記(전기) ‘베나벤테’의 <理解(이해)>를 <假裝人生(가장인생)>이라 改題(개제)하여 劇界(극계)에서 당시 활동을 하던 演出家(연출가) 朴善明(박선명)씨를 초빙하여 본격연습에 들어갔다. 이때의 출연자는 趙誠夏(조성하), 李綱鉉(이강현), 韓在壽(한재수), 趙孝慶(조효경), 姜信卓(강신탁)(鳴(명))씨 등이었으며 中央劇場(중앙극장)에서 11월에 공연을 가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의 제작비는 방송출연으로 기틀이 되기는 했어도 어림도 없었다. 까닭에 회원 4,50여명으로부터 회비를 거출했고 모자라는 것은 지도교수 金起林(김기림)씨가 月給(월급)을 털어 상연준비의 마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이 오르고 난 후엔 관객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고 한 차례의 공연으로 거의 제작비를 뺐다는 것이다. 성황리에 공연을 끝낸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은 다음 공연할 기본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사기는 더욱 충천해 갔다. <假裝人生(가장인생)> 다음으로 채택한 ‘레퍼토리’가 안톤․체홉의 <櫻花園(앵화원)>(全4幕(전4막))이다.

  <櫻花園(앵화원)>은 李綱鉉(이강현), 趙誠夏(조성하)씨가 공동 번역하고 枯岩仙(고암선) 연출, 孟厚彬(맹후빈)씨 조연출 겸 무감으로 趙誠夏(조성하), 李綱鉉(이강현), 韓在壽(한재수), 金亨杰(김형걸), 李惠璟(이혜경)씨 등이 출연하여 市公館(시공관)에서 상연했는데 가이에프역의 한재수, 르빠아힌역의 이강현, 히로인의 李惠璟(이혜경)씨 등의 열연은 당시 기성연극인들까지 감탄케 했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4월에 끝나고 다시 개작하여 <靑年藝術劇場(청년예술극장)>이란 명칭으로 돈암교에 있는 동도극장에서 상연하였는데 어떤 좌익연극인들의 압력도 있었고 좌익계의 학생들이 극장까지 뛰어들어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

  1948년까지는 惠專(혜전)후기의 趙誠夏(조성하), 李綱鉉(이강현), 金亨杰(김형걸)(당시 劇藝術硏究會(극예술연구회) 회장)이 주축을 이루었고 이어 趙誠夏(조성하)씨가 1949년 한국연극학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남녀대학극 경연대회를 도맡다시피 ‘리-드’해 갔는데 씨는 <密告(밀고)>라는 처녀희곡을 냄으로 鬼才(귀재)로 부각되었다. 당시 함께 운동하던 韓在壽(한재수), 兪賢穆(유현목), 孟厚彬(맹후빈), 李惠璟(이혜경)씨 등은, 모두 趙誠夏(조성하)씨는 天才(천재), 鬼才(귀재)라고 하고 있다.

柳致眞(유치진)씨도 (생존시 청취한 바로는) <그가 그냥 있다면 동대연극은 물론, 한국연극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密告(밀고)>는 韓在壽(한재수), 孟厚彬(맹후빈)씨가 공동연출하고 朴永民(박영민), 趙愃(조선), 趙孝慶(조효경), 韓在壽(한재수)씨 등이 출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일등상을 선언한 작품으로 당시의 연합신문은 <동국학생극은 이 나라 학생극의 新紀元(신기원)을 이룬 것이다>할 만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도하의 신문들도 경연대회가 끝날 무렵 평을 실었는데 대개 종합하면 <한국연극 발전상 최소한 30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동대연극의 예를 들어 쓰고 있다.

  이때 경연에 출전한 학교는 東國大學(동국대학)의 <密告(밀고)를 비롯하여 世富蘭偲瞖大(세부란시예대)의 <春香傳(춘향전)>, 정치대학의 <正直(정직)한 사기한>, 고려대학의 <천치>, 연희대학의 오이디푸스王(왕)>, 치과대학의 <흔들리는 地軸(지축)> 서울대학의 <베니스의 商人(상인)> 등 9개 대학이었다. 이 大學劇(대학극)경연은 극계로 보아서는 新人(신인)발굴의 좋은 계기가 되었고 大學劇(대학극)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학생연합 ‘써클’인<學幕(학막)>이란 집단까지 형성케 하는 불씨도 되었다.

  이 <學幕(학막)>이란 ‘써클’을 처음엔 연극토론 및 발표의 장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한두 달 후엔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양분되어 선혈을 흘리며 싸웠기에 사상투쟁의 수라장으로 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엔 연극이론연구발표회에도 韓在壽(한재수), 趙誠夏(조성하)씨 등이 참가했었으나 서울大(대)(金起泳(김기영)), 고대(左翼(좌익)/金京鈺(김경옥)) 동국대학은 그곳에서 탈퇴하고 사범대, 상과대, 고대(좌익)만이 중심으로 지속되다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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