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중요한 公演(공연)들

□ 6·25전후의 東大演劇(동대연극)
 
  6·25직전인 1949년 말부터는 혼자 어디를 다니다간 언제 어디서 봉변을 당할지 몰라 대개 밖을 나다닐 땐 집단으로 다니거나 또는 포켓에 재크·나이프를 두어 개쯤 지니고 다녀야 했다. 때문에 이때의 연극은 사상의 싸움을 위한 도장이 되다시피 하였다. 좌익에서 스타니슬랍스키의 이론을 들고 나오는데 반해 우익에선 그릇된 이론인줄 알면서 꼬끄랑의 이론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東大(동대)는 안톤 체흡의 ‘櫻花園(앵화원)’을 공연하여 좌익으로 착각되어 공연 때는 백색의 테러도 있었고 후엔 좌익으로 착각해서 좌익 측에서는 조용한 편이었으나, 곧 右翼(우익)임이 밝혀지자 더 큰 적색테러를 당하고 돌멩이 세례에 칼부림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1950년 초에 그들은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을 다음 레퍼토리로 선정하고 韓在壽(한재수), 孟厚彬(맹후빈)씨 공동연출로 趙誠夏(조성하), 趙恒(조항), 朴永民(박영민), 李惠璟(이혜경)씨 등이 출연하여 연습을 진행해 나갔는데 6월 15일 동작에 대한 토론 후 24일 동작이 1막 진행되었을 때 6·25가 발발했다.
  1950년은 연극계가 한껏 부풀렸던 꿈의 國立劇場(국립극장)이 개설되고 그 개관 공연을 가졌던 해이며 東大演劇(동대연극)도 이에 편승하듯 어려운 시련을 이기고 겨우 체계가 잡혀갈 즈음이었다. 그러나 민족상잔의 비극 6·25로 연습하던 이들 극예술연구회 회원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학교도 부산에 임시 가교사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동안 활동을 벌이던 會員(회원)의 얼굴도 많이 바뀌었다. 鬼才(귀재)며 天才(천재)인 趙 誠夏(조성하)씨를 잃게 된 것도 6·25 때문이다. 부산의 임시가교사에 피난 온 연극부원들은 朴永民(박영민), 姜信卓(강신탁)(嗚(오)) 趙恒(조항)씨 등이 있으며 그들은 新入生(신입생)을 1951년 규합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주축을 이룬 이는 朴永民(박영민)씨였다.
  朴永民(박영민)씨는 싸르트르作(작) ‘더러운 손’을 번역·연출하여 1952년 봄 釜山(부산) 東亞劇場(동아극장)에서 공연했는데, 의외로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그 후 회원들은 전쟁의 북새통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작가의 ‘무덤 없는 死者(사자)’를 朴永民(박영민)역·연출로 같은 해 12월에 부산의 부산극장에서 또 상연하여 전쟁에 시달린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때 기획은 姜信卓(강신탁)(嗚(오)), 미술은 趙恒(조항)씨가 담당했으며, 출연엔 朴永民(박영민) 李載昌(이재창) 姜嗚(강오) 全琫文(전봉문) 崔成浩(최성호) 金圭泰(김규태) 鄭駿鉉(정준현) 趙炳洙(조병수) 李義忠(이의충) 姜淑子(강숙자)(由禎(유정))씨, 그리고 Mrs. Bacon이 참여했다.
  이때의 공연자금은 Mrs. Bacon으로 하여금 언커크의 지원을 받아 무리 없이 치르게 되었고 이어 地方巡廻公演(지방순회공연)으로 大邱文化劇場(대구문화극장), 馬山(마산)의 國際劇場(국제극장)까지 상영하게 되었다. 극단 新協(신협)과는 이때부터 교류를 갖게 되어 趙恒(조항) 朴永民(박영민) 姜淑子(강숙자)씨 등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의 學生(학생)들은 학업도 학업이었지만 연극 공연만이 그들 회원들의 유일한 오락이며 취미며 생활의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는 전시였기에 연습 중에 별안간 영장이 발급되어 입대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길거리에서까지 직접 영장발급 입대하는 등으로 연습의 차질이 자주 생기게도 되었다.
  그러므로 배역이 숱하게 바뀌게 되었고 연습은 자꾸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난관에 봉착하자 한때는 학교에서 기숙하며 연습에도 임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기성극단도 마찬가지여서 극단 新協(신협)의 경우 몇몇이 단체를 이끌어 갔을 뿐 단원의 신진대사가 가장 컸던 시기가 1952년이었다. 이때 新協(신협)은 대구에 본거지를 두고 부산을 왕래하면서 공연했는데 東大演劇(동대연극)은 이 新協(신협)의 영향이 크게 회원의 인적지원을 많이 받았다.
  1953년 부산에서의 東大演劇(동대연극)은 그동안 활동하던 재학생들이 졸업, 또는 군 입대, 그리고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는 등 흩어져 지지부진해지게 되고 만다.
  그럼 우선 여기서 제2의 동대연극의 공연을 순서별로 정리하고 당시의 공연 방법 및 활동상황, 그리고 그들의 현황을 정리하고자 한다.


□ 第(제)2期(기) 公演目錄(공연목록)
(제1기의 계속)
 
○제14회 공연(1947년 11월)
 
  베나벤테작 ‘假裝人生(가장인생)’(原題(원제)—理解(이해)) 朴春明(박춘명)연출, 趙城夏(조성하) 李綱鉉(이강현) 韓在壽(한재수) 趙孝慶(조효경) 姜嗚(강오)(信卓(신탁)) 출연, 中央劇場(중앙극장) 상연.

 
○제15회 공연(1948년 4월)
 
  안톤․체흡작 李綱鉉(이강현)역 ‘櫻花園(앵화원)’(전4막) 枯岩仙(고암선)강사 연출, 孟厚彬(맹후빈) 조연출 겸 무감, 趙城夏(조성하) 李綱鉉(이강현) 韓在壽(한재수) 李惠璟(이혜경) 등 출연, 市公館(시공관) 상연.


○제16회 공연(1948년 5월)

  안톤․체흡작 李綱鉉(이강현) 역 ‘櫻花園(앵화원)’ 再構成(재구성) 연습 공연, 東都(동도)극장 상연
  (본 작품은 ‘靑年藝術劇場(청년예술극장)’이란 명칭으로 再演(재연)됨.)


○제17회 공연(1949년 10월)

  趙城夏(조성하)작 ‘密告(밀고)’, 韓在壽(한재수)․孟厚彬(맹후빈) 공동 연출, 朴永民(박영민) 趙恒(조항) 趙孝經(조효경) 韓在壽(한재수) 등 출연, 市民館(시민관) 상연
  (본 작품은 한국연극학회 주최 제1회 전국남녀대학극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한 작품임.


○제18회 공연(1950년 6월)

  유진․오닐작 趙城夏(조성하)역 ‘느릅나무 밑의 욕망’ 韓在壽(한재수) 孟厚彬(맹후빈) 공동 연출로 공연을 앞두고 6.25사변이 남, 市公館(시공관) 상연 예정.


○제19회 공연(1952년 5월)

  싸르트르작 朴永民(박영민)역․연출, ‘더러운 손’, 朴永民(박영민) 姜嗚(강오) 趙恒(조항) 姜淑子(강숙자) 출연, 釜山(부산) 東西劇場(동서극장) 상연.


○제20회 공연(1952년 12월)

  싸르트르작 朴永民(박영민)역․연출, ‘무덤 없는 死者(사자)’ 기획․姜嗚(강오), 장치․趙恒(조항), 朴永民(박영민) 李載昌(이재창) 姜嗚(강오) 全琫文(전봉문) 崔成浩(최성호) 金圭泰(김규태) 鄭駿鉉(정준현) 趙炳珠(조병주) 李義忠(이의충) 姜淑子(강숙자) Mrs. Bacon 등 출연, 釜山(부산)의 釜山劇場(부산극장) 상연 후 大邱文化劇場(대구문화극장), 馬山(마산) 國際劇場(국제극장) 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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