身分差別(신분차별) 후천적 道德性(도덕성)으로 결정돼야

本稿(본고)에서는 栗谷(율곡)의 사회개혁내용과 더불어 그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있으며 한편 그의 改革思想(개혁사상)이 그 時代(시대)의 신분계층 이동에 직ㆍ간접으로 얼마나 영향을 끼쳤나를 살펴보고 사회계층 형성조건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했다.
<편집자 註>


  社會思想(사회사상)이라 함은 보통 社會觀(사회관)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의 대상으로서는 社會(사회)의 樣態(양태), 社會(사회)와 人間의 關聯(관련), 그 進路(진로) 등에 관한 考察(고찰)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古代(고대)로부터 발견되지만 특히 근대에서는 社會改革(사회개혁)을 志向(지향)하는 思想一般(사상일반)을 뜻하고 있다. 이런 뜻에서 그것은 社會主義(사회주의)와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으나 社會主義(사회주의)는 그가 실현해야 할 일정한 목표와 그것에 적응할 구체적인 방침, 강령, 조직형태를 요청하는데 반해 사회사상은 반드시 그러한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社會主義(사회주의)보다 넓은 뜻을 가진 것이 社會思想(사회사상)이라 볼 수 있다.
  栗谷(율곡)의 經世的(경세적) 側面(측면)은 이러한 뜻에서 그의 여러 施策(시책)들이 일정한 조직형태를 갖고 강령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대의 사회주의사상으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넓은 의미의 社會思想(사회사상), 또는 社會改革思想(사회개혁사상)이라고 칭함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本稿(본고)에서는 율곡의 사회개혁내용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한편 그의 개혁사상이 그 시대의 신분계층이동에 직접, 간접으로 얼마나 영향을 끼쳤나를 살펴보고 끝으로 그가 보는 사회계층의 形成條件(형성조건)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율곡의 생존시를 前後(전후)한 朝鮮朝社會(조선조사회)는 모순이 격화되었던 시대이다. 예를 들면 율곡이 탄생하기 30년을 전후하여 甲子士禍(갑자사화)(1504年) 등이 일어났고, 연산군의 暴政(폭정), 勳舊士林派(훈구사림파)의 勢力(세력)싸움으로 國家社會(국가사회)가 혼란해 있었으며 더구나 1545年의 乙巳士禍(을사사화)는 당파와 政爭(정쟁)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를 목격한 栗谷(율곡)은 이 時代(시대)를 朝鮮朝(조선조) 中衰期(중쇠기)라 진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士禍(사화)로 인한 파쟁은 士林(사림)들이 出仕(출사)하여 國家(국가)를 위한 경륜을 실현하려는 의욕보다 오히려 山林(산림)에 은둔하여 개인의 道德性(도덕성) 완성인 修己(수기)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栗谷(율곡)에 있어서는 그러한 은둔만이 國家(국가)를 위한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性理學(성리학)이 지향하는바 修己治人(수기치인)이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의 先後(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기와 치인은 一而二(일이이)요 二而一(이이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적으로 出仕(출사)하여 經世(경세)에 관한 여러 개혁책을 건의하여 당시의 침체된 士林精神(사림정신)을 得興(득흥)시키고 時葬(시장)를 革正(혁정)하려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社會改革意志(사회개혁의지)가 뚜렷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그의 사회개혁사상이 朝鮮朝社會(조선조사회)의 신분계층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朝鮮朝社會(조선조사회)의 특징을 身分階層社會(신분계층사회)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신분계층사회의 형성을 생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더욱 합리화되었고 강행되었다. 그러나 性理學(성리학)의 理想(이상)은 佛敎(불교)가 지향하는바 ‘天人合一’의 聖人(성인)의 實現(실현)에 있으며, 그것은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으로 요약될 수 있다. 修己(수기)는 居敬(거경), 窮理(궁리), 力行(역행)으로 格物致知(격물치지), 誠意正心(성의정심)으로 대표되고 治人(치인)은 安人(안인), 利用厚生(이용후생)의 經世的(경세적)측면이다. 그러나 비록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을 이와 같이 나눈다 하더라도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一而二(일이이)요 二而一(이이일)의 관계로 修己(수기)는 治人(치인)의 근거이요 治人(치인)은 修己(수기)의 功效(공효)이다. 栗谷(율곡)은 말하기를 ‘窮理(궁리)는 格物致知(격물치지)이고 居敬(거경)과 力行(역행)은 誠意正心(성의정심)과 修身(수신)이다.
  이 세 가지를 같이 닦고 아울러 나아가면 理致(이치)가 밝아서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고, 속이 곧아 義(의)가 밖에 나타나고 私欲(사욕)을 克服(극복)하여 그 본성을 회복할 것이오니 誠意正心(성의정심)의 功效(공효)가 몸에 쌓이면 一身(일신)이 화창하고 윤택하여 집을 다스리면 형제가 족히 본받게 되고 나라에 통하면 敎化(교화)가 行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진다’(萬言封事(만언봉사))라고 했다.
  이와 같이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治人(치인)은 修己(수기)의 完成(완성)을 通(통)하여 더욱 理想的(이상적)인 곳을 向(향)해 擴充(확충)해 나가게 된다. 따라서 性理學(성리학)은 이미 修己(수기)의 目的(목적)에 治人(치인)인 安人(안인)으로서 利用厚生(이용후생)의 側面(측면)이 內充(내충)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儒者觀(유자관)이 뚜렷이 부각된다.
  ‘(진유란) 벼슬자리에 나가면 一家의 道(도)를 行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太平(태평)을 누리게 하고 관직에서 물러서면 온 세상에 敎化(교화)를 베풀어 學者(학자)로 하여금 잠을 깨운다’(東湖問答(동호문답))라고 하였다.
  眞儒(진유)란 은둔하여 세상을 모르는 체 하는 士林(사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하여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安人(안인)의 經世(경세)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性理學(성리학)의 이러한 安人(안인)으로서의 利用厚生(이용후생)은 곧 性理學(성리학)의 人間觀(인간관)을 民本(민본)에 두고 있으며 그의 經世觀(경세관)은 爲民(위민)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民本爲民(민본위민)을 실현하려고 하고 있는 朝鮮朝(조선조) 性理學(성리학)의 內聖外王(내성외왕)의 理想(이상)이 어떻게 해서 人間의 身分的(신분적) 差別(차별)을 極大化(극대화)하고 있는 身分階層社會(신분계층사회)를 形成(형성)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栗谷(율곡)은 이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
  身分階層社會(신분계층사회)는 朝鮮朝(조선조)에 와서 身分變動(신분변동)에 依하여 形成(형성)된 것은 아니다. 이미 高麗時代(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사회적인 전통 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制度(제도)로서 조선조의 건국을 통하여 집권적인 정치체제의 확립 및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점점 굳어졌다.
  즉 조선조의 신흥귀족들이 고려의 귀족에 대신하여 지배계급으로 성장하면서 兩班(양반)계급을 형성한 반면, 被(피)지배계급으로는 여전히 常人(상인), 賤人(천인)이 있었으며 兩班(양반)과 이를 사이에 일정한 세습적인 직업을 가짐으로써 하나의 계층으로 고정된 中人(중인)이라는 계급이 생겼다. 고려에 있어서의 신분계층은 貴族(귀족), 常人(상인), 賤人(천인)으로 三民(삼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朝鮮(조선)조에서는 中人(중인)이 형성되어 四民(사민)으로 階層化(계층화)된 것이 다른 것이다.
  그러면 과연 性理學的(성리학적) 理念(이념)이 이러한 신분계층을 어떻게 합리화시킬 수 있는가? 더구나 性理學(성리학)은 民本主義(민본주의)에 입각하고 모든 人間은 누구나 聖人(성인)이 될 수 있고 또한 그 本性(본성)이 ‘善(선)하다’고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여 신분세습이 용인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도 人間은 차별이 될 수 없지만 신분은 차별이 될 수 있다는 二重構造(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는가?
  더구나 社會倫理(사회윤리)인 三綱五倫(삼강오륜)은 君臣(군신), 上下(상하), 貴賤(귀천)이 모두 지켜야할 德目(덕목)이다. 따라서 삼강오륜 위에서 人間은 또한 평등하다는 단지 삼강오륜의 사회적 윤리를 잘 지키고 지키지 않는데 도덕적 차이가 나올 뿐이다. 여기에서 身分(신분)의 定礎(정초)가 先天的(선천적)인 것이 아님도 自明(자명)하다.
  그리하여 栗谷(율곡)은 말하기를 ‘賢者(현자)는 반드시 上에 위치하고, 不肖者(불초자)는 반드시 下에 있어야한다.’(聖學輯要(성학집요))라고 했다.
  즉 賢(현), 不肖(불초)를 기준으로 上下, 貴賤(귀천), 尊卑(존비)의 계급이 나눠진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賢(현), 不肖(불초)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林林總總(림림총총)하여 진실한 主人이 없었다. 聖人(성인)이 出現(출현)한 이후에 천하가 잘 가꾸어져 이것을 따랐다. 그러므로 德(덕)이 큰 사람이 임금이 되고 덕이 작은 자는 신하가 되었다. 성인이 이제 돌아가셨으니 天下가 大亂(대란)하고 약육강식하여 勢力(세력)이 큰 자는 군이 되고 勢力(세력)이 적은 者는 신하가 되었다.’(拾遺(습유), 天道人事策(천도인사책))라고 하였다.
  君臣(군신), 上下의 신분이 나뉘는 기준은 勢力(세력)이 아니라 德(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가 혼란할 당시는 德(덕)보다 勢力(세력)이 판을 치고 君臣(군신)이 그 힘에 의해 定(정)하여 진다고 말한다. 栗谷(율곡)은 이미 德(덕)이든 勢力(세력)이든 天下에는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 身分(신분)의 差別(차별)이 오직 德(덕)에 依(의)해 이루어져야 하지 그것이 强制的(강제적) 勢力(세력)에 의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身分區別(신분구별)은 根本的(근본적)인 面(면)에서 世襲化(세습화)될 수 없으며 또한 先天的(선천적)이 아니라 後天的(후천적)인 道德的(도덕적) 人格(인격)에 依(의)해서 決定(결정)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栗谷(율곡)은 그의 性論(성론)에서 本然之性(본연지성)과 氣質之性(기질지성)은 兼理氣(겸리기)라고 하여 氣質之性(기질지성) 속에 本然之性(본연지성)을 純善(순선)이라 할 때 氣質之性(기질지성)은 善惡(선악)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氣質(기질)을 변화시켜 本然(본연)을 善(선)으로 갈 수 있다 하여 ‘矯氣質(교기질)’을 강조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立志(입지)에 있다고 하였다.
  人間은 누구나 本然之性(본연지성)이 그 근본이다. 이 本性(본성)인 本然(본연)의 善(선)을 실리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人間이 그 욕심의 過(과), 不及(불급) 때문이다. 따라서 중용을 통하여 本然(본연)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聖人(성인)이 되겠다는 뚜렷한 立志(입지)가 서야 한다는 것이다.
  立志(입지)가 선 사람은 기질의 隱蔽(은폐)를 開明(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賢(현), 不肖德(불초덕), 不德(부덕)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누구나 本性(본성)이 善(선)하기 때문에 그 선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수양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구원적으로 율곡은 신분의 형성도 선천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세습화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끼고 있었음이 그의 善(선)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내가 科學(과학)을 보는 것은 마지못하여 한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산업이 없으므로 곤궁하여 생계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장마다 품팔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나는 천한 일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겠지만, 다만 나라의 풍속이 정해진 법이 있어서 선비와 서민의 직업이 달라서 진실로 억제하여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과거 보는 길이 있어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는 밑천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버이를 위해 몸을 굽힌 것이고 감히 祿(녹)을 구한 것이 가난한 때문이란 것으로써 孔孟(공맹)의 正統(정통)을 삼으려는 것은 아닙니다.‘(書一(서일), 答成浩原甲寅(답성호원갑인))라고 했다.
  이를 보면 栗谷(율곡)이 職業(직업)에 의한 身分(신분)의 階層化(계층화)가 나라의 法(법)에 의하여 정하여져 있기 때문에 그를 따를 뿐이지 그의 本心(본심)은 職業(직업)에 의한 身分階層(신분계층)의 구분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그의 人間에 관한 人本平等主義的 思考(인본평등주의적 사고)는 佛敎(불교)의 本領(본령)에 해당하지만 栗谷(율곡)에 있어서는 더욱 뚜렷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이러한 국가의 제도도 변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신분계층의 근본적인 변화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시폐나 시책은 변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율곡은 말하기를 ‘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은 法制(법제)이요, 고금을 걸쳐 변치 못할 것은 王道(왕도)와 三綱五倫(삼강오륜)의 윤리는 변할 수 없지만 그 밖의 王道(왕도)의 實現(실현)과 三綱五倫(삼강오륜)의 社會的(사회적) 實現(실현)을 위한 制度(제도)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變通變法思想(변통변법사상)의 理氣論的(이기론적) 근거는 그의 독창적 性理(성리)·理論(이론)인 理通氣局(이통기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여진다.
  ‘하늘이라는 것은 理(이)와 氣(기)뿐이다. 理(이)는 아주 작은 틈도 없으나 氣(기)는 流通(유통)하는 質(질)이 있어서 사람이 하는 일에 얻고 잃는 것이 있으면 재앙과 상서가 각각 類(류)를 따라 상응하는 것이다.’ 萬言封事(만언봉사)라고 하였다. 理(이)는 不變(불변)이지만 氣(기)는 局限(국한)이 되기 때문에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栗谷(율곡)의 사상 속에는 근본적으로 사회신분계층에 있어서 세습이라는 절대적 고정성을 옹호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신분계층 制度(제도)의 法的(법적) 현실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도 變法制度(변법제도)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율곡의 사회사상은 첫째 경제안정주의 둘째 변법혁구주의 셋째 조제화평주의 넷째 도덕교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제안정주의라 함은 그가 모든 疏(소)에서 언급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안정되어야 民生(민생)의 안정이 된다고 강조하고 동시에 나라의 부강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國防(국방)이 튼튼하여 진다고 보고 있다.
  둘째 變法革舊主義(변법혁구주의)란 그 당시의 시대를 조선조에 있어서 中衰期(중쇠기)라 보고 종래 2백 년 동안 실시한 모든 시책을 개혁하여 更張(경장)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곧 革舊更張(혁구경장)사상이다. 그가 주장한 사회개혁의 대상은 ①責案制(책안제) (稅政(세정))의 개혁 ②능력사회의 구현 ③노비의 해방 ④庶孼(서얼)의 許通(허통) ⑤男尊(남존)여비의 개선 ⑥四民(사민)의 세분화 ⑦차별윤리의 해소 ⑧국방의식의 고취 ⑨連坐制(연좌제)의 폐지 ⑩公論(공론)의 실현 ⑪祭禮(제례)번쇠의 개선 ⑫특권의식의 배제 ⑬상부상조의 鄭約(정약)실천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調濟和平主義(조제화평주의)라 함은 兩非兩是(양비양시)를 인정함으로써 상호조절을 통하여 화평하자는 것이다. 이는 당시 당쟁의 씨앗인 沈義謙(심의겸)과 金孝元(김효원)의 싸움이 어느 한편만을 옳다고 하고 또 어느 한편을 그르다고 함으로 더욱 치열하여지고 있으니 이는 양쪽의 是(시)·非(비)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나오게 되는 것으로 兩非(양비), 兩是(양시)로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道德敎化主義(도덕교화주의)란 그가 도덕을 통하여 민생을 敎化(교화)하려는 구체적인 방법을 鄕約(향약)을 실천하여 상부상조의 기틀을 진작하려는 시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의 學校規範(학교규범)이나 격몽요결 등의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사회개혁사상은 그 당시로 보아서는 혁신적이라고 보여진다. 더구나 庶孼(서얼)의 許通(허통)이나 賤人(천인)을 국방에 투입하여 무예를 익힌 다음 등급에 의하여 公賤(공천)은 賤人(천인)의 신분을 해방시켜 준다는 施策(시책)은 부분적이나마 신분계층의 機動(기동)을 가져올 수 있는 간접적인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독창적 사회개혁사상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①社會(사회)의 신분계층의 形成(형성)은 勢力(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한 先天的(선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德(덕)을 쌓아, 賢(현), 不肖(불초)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의 세습이나 고정성에 회의적인 태도이다. ②制度(제도)는 時代(시대)에 따라 變法變道(변법변도)해야 한다. ③백성의 경제적 안정과 國防(국방)과는 밀접한 관계이다. ④모든 施策(시책)은 公論(공론)을 중심해야 한다. ⑤삼강오륜에 의한 社會敎化(사회교화) 等(등)으로 집약 할 수 있다.
  栗谷(율곡)의 이러한 社會思想(사회사상)은 그 시대성에 비추어 진보적이며 前進的(전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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