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중요한 公演(공연)들

  第2期(기)의 公演方式(공연방식)

  제2기에선 도합 7편의 작품을 상연하였는데 1기와는 전혀 다른 공연방식을 택하였다. 제1기의 연극이 거의가 기성극단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던데 반해 제2기는 작품선택부터 공연에 이르는 연습 및 상연방법까지 모두가 달라졌다. 제1기의 작품이 불탄절이나 개교기념축제의 일환으로 공연하였기에 작품의 성격이 불교색채가 짙은 것이었다면 제2기의 작품은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생이 지녀야 할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그런 작품들이었다.

  그러므로 한편의 작품을 택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경제적인 조건이 해당 작품을 극화할 수 있느냐? 둘째, 예술성이 있는가? 셋째, 이로 인해 어떤 점을 얻겠는가? 넷째, 해당 작품을 해당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가? 다섯째 계절과 작품의 성격과는 어울릴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작품 선택의 여건>은 생각지 않았다. 오로지 회원들의 관심은 공연보다는 연구(작가와 작품)에 더 집착했던 것이다.

  제1회 작품 ‘假裝人生(가장인생)’만 하더라도 이 작품을 선정하기는 5월인데 공연은 11월에 중앙극장에서 있었던 것만 보아도 그 당시 극예술연구회원들이 작품연구와 작가연구, 그리고 연습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경제적 여건(작품선택의 여건)을 생각지 않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밀고 간 투지는 요즈음 대학극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假裝人生(가장인생)’의 큰 성공으로 활기를 찾은 후 체홉의 ‘櫻花園(앵화원)’을 선택했는데 이것 역시 4,5개월이란 긴 연습을 통해 상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역 선정에 있어서도 회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했는데 ‘假裝人生(가장인생)’이 시스템 전체의 의결에서 결정하였는데 ‘櫻花園(앵화원)’에서는 배우자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배우를 각자가 자기의 실력과 역량과 자질과 기능여하를 생각하여 스스로 배역을 정하도록 자유의사에 일임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다음 작품 ‘密告(밀고)’에서는 특히 육체적 조건과 언어적 조건 등에 의한 이른바 용자에 의한 배역을 했다.

  그리고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는 위에 선정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배우재질과는 정반대로 줌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용자를 무시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櫻花園(앵화원)’에서는 히로인에 沈玉澤(심옥택)씨가 맡았으나 후에 사정에 의해 李惠璟(이혜경)씨로 바뀌었고 趙誠夏(조성하)씨가 늑막염에 걸려 자리에 눕는 바람에 급히 대역을 金鎭福(김진복)씨로 바꾸었으나 이 사정을 늦게 안 金鎭福(김진복)씨는 중간에 그만두어 趙誠夏(조성하)씨가 완쾌될 때까지 기다려서 상연하기도 하는 의리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연습은 수업이 끝난 오후, 현재 코오롱고속 터미널이 있는 곳(이곳에는 옛 모습을 갖춘 건물이 있었으며 60년 말까지 동대기숙사로 이용되었다.)에서 밤늦게까지 진행하였고 하나의 문제점이 대두되면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처음 연습에 들기 전엔 한 달여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를 했고 작품분석은 테마를 추출하고 나서 했으며 구성에 대한 분석은 며칠을 두고 논의했다. 그 다음, 작품독회에 들어갔는데 작품독회는 무려 두 달 정도, 하다못해 문법까지 따져가며 파고들었다.

  보통 한 작품이 동작에 들기 전까지는 1백 번 이상 작품을 읽게 되었고 동작에 들면 소품이나 의상은 거의 갖추어진 가운데, 진행되었다. 동작도 보통 한두 달쯤 밀고 나가는 게 예사이었는데 그 당시 극계의 사정과 견주어 생각해 보면 연극에 임하는 태도가 얼마나 진지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처음 ‘假裝人生(가장인생)’의 무대장치는 당시 극계의 미술가 蔡南仁(채남인)씨가 초빙되어 제작하였고 음향효과는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에 의존하여 그곳의 효과 담당자 某(모)씨가 도왔고 의상은 여자회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제2의 작품 ‘櫻花園(앵화원)’도 역시 처음엔 그들에게 의탁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밤을 새워 장치를 제작해냈고 의상·소품까지도 제작했다는 것이다.

  ‘櫻花園(앵화원)’에서 재주를 익힌 회원들은 다음 작품 ‘密告(밀고)’에서는 작품부터 연출, 연기, 무대장치 무대구성 전체를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이러한 방법은 제2기의 마지막 공연인 싸르트르의 ‘무덤 없는 死者(사자)’까지 전쟁의 북새통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져갔다.

  東大(동대)극예술회원들은 공연이 끝나는 날은 늘 ‘종파티’를 가졌고 종파티에는 지도교수를 비롯하여 각 대학 연극부에서 참여해 합평회를 겸하기도 하였다. 이 합평회는 전국 대학 가운데 東大劇藝術硏究會(동대극예술연구회)에서 처음 시도하였고 그 후 각 대학에 유행처럼 퍼졌다.

  이러한 공연방법은 어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세계 각국의 연극이론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한창 범람하던 新派劇團(신파극단) 운영자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더구나 東大劇藝術硏究會(동대극예술연구회)가 창립되던 1947년 거의 같은 때에 東大門(동대문)에는 영화예술연구회가 창립을 보게 되었고 兪賢穆(유현목)씨에 의해 국내 최초로 대학생의 힘으로 영화 ‘海風(해풍)’을 제작해내 대학 내에서나 각 대학 학생회를 비롯, 극계, 영화계의 시선을 모두 모으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東大(동대)에는 文學藝術(문학예술)부문에 가장 뛰어난 교수들이 모두 운집해 있는데다 劇藝術(극예술)연구회가 쌍벽을 이루듯이 활동을 전개하였고 또 발표되는 연극이나 영화가 모두 수준급 이상의 작품들만 제작하였던 까닭이다.

  그 후 東大(동대)에는 문예부문에 관심이 있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 들어 일마다 모두 관심사였고 동대에 입학하는 걸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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