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話的(신화적)인물의 詩的(시적)형상화는 본능적 몸부림

‘83 경향신문 新春文藝(신춘문예)’ 평론부문에 가작으로 入選(입선)한 宋喜復(송희복)君의 作品 ‘精話的(정화적) 想像力(상상력) 그 超越(초월)과 內在(내재)’와 君의 당선소감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註>


I. 실마리

  詩(시)가 神話的(신화적)내용을 가지고 표현될 때는 항상 ‘비현실적인 幻想(환상)’에 사로 잡혀 있다는 일종의 비판적 思考方式(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 진술은 神話(신화)가 ‘모순된 眞實(진실)’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科學的(과학적)이해가 선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인생과 宇宙(우주)의 전체적인 모습을 단편으로나마 해석하려는 人間(인간)의 願望(원망)의 대상으로 고찰되고 있다. 신화는 自然(자연)을 감정이입화 시키기 때문에 이성적인 질서체계가 아닌 비논리적인 상징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사물을 고정적으로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多義的(다의적)인 方法(방법)으로 현실을 해석하거나 구체화시키고자 한다. 신화를 두고 우리는 ‘原初的(원초적)’이라는 말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汎人類的(범인류적)인 心性(심성)의 밑바닥에 깔려진 모든 가치나 행동양식이 선험적으로 存在(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神話(신화)는 가장 순수한 언어인 詩(시)와 만나서 외경스러운 彼岸(피안)의 세계를 동행하고자 한다. 그 때 詩(시)는 허구와 논리적 배경을 초월하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언어인 詩(시)의 형태로 人間(인간)의 원초적인 경험세계에 內在(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詩人(시인)들 중에서는 드물게 詩(시)와 神話(신화)의 세계를 接合(접합)시키려는 사람이 徐廷柱(서정주)와 金春洙(김춘수)이다. 이 두 사람은 인간의 꿈과 가치관이 숨어 있는 모순된 約想(약상) 世界(세계)속에서 인간의 발가벗은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 말을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그의 인생과 세계와 宇宙(우주)에 관해서 무척 알기를 원한 사람들이다. 곧 그의 世界觀(세계관)이 개념들의 論理的(논리적) 체계로서 이루어지기보다는 가장 경험 현실이 각인된 은유적 체계로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후자를 선택하게 될 때 비로소 시를 신화와 언어의 변증법적 상관물이라는 특수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本考(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특히 착안하여 다루어 보려고 한다. 徐廷柱(서정주)는 (娑蘇(사소))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金春洙(김춘수)는 (處容(처용))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Ⅱ. 徐廷柱(서정주)의 경우

  ― <娑蘇(사소)>에 관한 批評的(비평적) 斷想(단상)

  시인 서정주가 다루었던 神話的 人物(신화적 인물)인 娑蘇(사소)는 三國遺事(삼국유사) 感通(감통) 第七(제7)<仙桃聖母隨喜佛事(선도성모수희불사)>에 단편적이나마 잘 설명되어 있다. 그녀는 원래 中國(중국)황실의 공주였으나 신선술을 얻어 우리나라에 와 돌아가지 않고 新羅(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를 처녀 잉태한 후 山神母(산신모)가 되어 후에 나라와 佛事(불사)를 도왔다 한다. 三國遺事(삼국유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이 娑蘇(사소)라는 여인은 나라를 세운 여러 개국시조들의 신령한 태생과 구조적으로 연결된 聖子(성자)―聖母(성모) 관계의 한 패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신화적 인물이다.
  여러 신화의 도처에 깔린 이러한 聖子(성자)―聖母(성모)관계의 神話的(신화적)패턴은 가령 단군신화에서도 볼 수 있고 강의 神(신)으로 짐작되는 河伯(하백)의 딸인 柳花(유화)와 그녀의 聖子(성자) 주몽의 이야기에서도, 그리고 東海(동해) 龍女(용녀)가 그의 祖母(조모)인 고려 태조왕건의 이야기에서도 공통된 神話素(신화소)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例(예)들은 어느 특정한 영웅의 모태를 자연으로 귀속시켜 유한한 인간적 능력에 무한한 超自然的(초자연적)인 現象(현상)을 부여하게 하려는 원시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開國(개국)시조신화에 등장하는 聖母(성모)는 거의 토템(Totem)과 연결되었거나 神格化(신격화)되어 등장한 경우가 많다. 娑蘇(사소) 역시 인간의 딸로 장생 術(술)을 배워 神(신)으로 化(화)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예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詩人(시인) 徐廷柱(서정주)가 포착한 神話的(신화적)인 想像力(상상력)의 촉수도 거기에 닿았던 것이라고 짐작되어 지는데 이것은 인간적 한계를 넘어 영원한 세계에 도달하려는 원시적이며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神話的(신화적) 人物(인물)로 통한 시적 형상화를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의도는 시와 神話(신화)라는 상관물이 인간의 근원적 충동과 꿈과 본능을 포함한 原型(원형)(arche type)이란 개념 속에 융화되어 졌을 때 더욱 이해하기 쉽다. 원형이란 개념은 카알·융(Karl Jung)의 심층심리학적 공헌으로 이루어진 批評的(비평적) 産物(산물)로서 集團的(집단적) 無意識(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한 部分(부분)인 원초적 이지미 중의 많은 유사체험 가운데 심리적 잉여를 가지고 보편적이면서도 자주적인 <想像力(상상력)의 힘>에로 접근하려는 태도의 소산이다. 인간 精神活動(정신활동)의 근본을 지배하는 가장 원초적인 집단무의식의 발굴인 이것은 삶의 窮極性(궁극성)을 인간 속에 깊이 포함되어 이성이라든가 論理(논리)보다도 선험적으로 표출고자 한다.
  시인 서정주가 굳이 娑蘇(사소)라는 神話的(신화적) 人物(인물)을 선택한 것도 인간 박혁거세의 人格的(인격적) 모순과 한계를 聖母(성모) 娑蘇(사소)라는 원형을 통해 神格적(신격적)인 초월을 완성하게 하려는 신화적 요소와 진기의 정신적 근저가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娑蘇(사소)라는 인물을 통해 神(신)들의 공간으로 의식되고 있는 바다너머와 하늘 위로 彼岸(피안)의 공간과 영원, 그리고 時空(시공)을 넘어서 인간에게 제약된 삶의 一回性(일회성)을 초극하려는 몸부림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 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開關(개관)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門에 기대 섰을 뿐이다.
  門열어라 꽃아, 門 열어라 꽃아
  벼락과 海港(해항)만이 길일지라도
  門열어라 길아 門열어라 꽃아.
― ‘꽃밭의 獨自(독자) (娑蘇斷章(사소단장))’의 全文(전문)
 
  이 詩(시)는 娑蘇(사소)가 처녀로 잉태하여 神仙修行(신선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그녀가 떠나기 전 그녀의 집 꽃밭에서 한 독백 내용이다. 외형적으로는 개인의 自己告白的(자기고백적)인 독백체 文章(문장)인 것 같으나 原始言語(원시언어)의 속성이라고 일컫는 은유와 反復的(반복적) 리듬이 강하게 노출되어 있어 상당히 呪術的(주술적)인 무드를 자아내고 있다. 原始言語(원시언어)는 세련된 言語(언어)보다는 集團心性(집단심성)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리듬은 개인의식보다는 집단심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연히 주술적인 기능을 내포하지 않을 수밖에 없으며, 은유적 성격은 표현하려는 원천적 神秘(신비)가 이성적이고 論理的(논리적)으로 좁힐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다양하고 암시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原初的(원초적)인 神話的(신화적) 상상력에 이어 시를 접하게 될 때 가장 문제되는 것이 신화와 신화적 의식이 말로 표현되는 특수한 형태의 言語(언어)와의 관계이다. 이 때 신화와 신화적 의식이라는 두 가지 범주의 경제선상에 서는 것이 바로 리듬과 은유이며 이것이 현대적 감각으로 치료될 때 얻어지는 공간이 삶에 대한 강한 意志(의지)가 표출된 言語(언어)의 세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시되게 사용하는 포에틱·딕션(poetic diction)이 <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꽃>은 아주 은유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呪術的(주술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꽃>은 그 자체로서 충족되고 있고 靜的(정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詩的(시적) 오브제이다. 그것은 삶이 극도로 高掦原(고척원)된 최고 경지를 표상하는 동시에 가장 완벽한 藝術的(예술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門열어라 꽃아>는 김수로왕의 하강을 기다리는 원시 집단 의례에서 불렀던 ‘영신군가’의 <고개를 내놓아라, 거북아>에 연상되고 있다. 이 詩는 세속적인 人間 行爲(행위)의 차원인 <노래>와 <입맛>에 탐닉하지 않고 그것의 한계성을 발견하여 永遠回歸(영원회귀)라는 求心點(구심점)을 向(향)해 삶을 인식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作品(작품)이다. 모순과 不安(불안)이 지배하는 비극적인 宇宙(우주)의 人間 條件(조건) 속에서 만물의 한계성 生命(생명)의 한계성을 초월하려는 集團心性的(집단심성적) 의지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은 고대인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장 완벽한 삶의 現象(현상)으로 向해 現實(현실)의 고난과 역경인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인간적 유한성의 극복을 시도하려는 娑蘇(사소)의 獨白(독백)은, 독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선언이며 운명에 대한 지역 내지는 도전이며 또한 프로에테우스的 결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기적인 原型反復(원형반복)의 형식인 통과제의의 <격리→입사→귀환>이라는 과정을 겪음으로써 현실 운명과 고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①
  門을 밀고서 房으로 들어가듯
  門을 밀고서 神房을 들어가듯
  門을 열고 나와서 여기 좀 보아
  門을 열고 나와서 여기 좀 보아


  보아, 보아, 와 살며보아,
  門을 밀고서 방으로 들어가듯
  門을 열고 나와서 여기 좀 보아

  ― ‘娑蘇(사소)의 편지’ 中에서

  ②
  피가 잉잉 거리던 病을 이제는 다 낳았습니다.
  올 봄에
  매(鷹)는
  건 갈매(葛梅)의 香水(향수)의 강물과 같은
  한섬지기 남짓한 이내 (嵐(남))의 밭을 찾아내서
  대여섯달 가꾸어지낸 오늘엔
  홍싸리의 수풀마냥 피는 서걱이다가
  翡翠(비취)의 별빛 불들을 켜고
  요즈막엔 다시 生金(생금)의 鑛服(광복)을 하늘에 폅니다.

― ‘娑蘇(사소)의 두 번쨰 편지 斷爿(단장)’에서

  위 두 작품은 ‘꽃밭의 獨白(독백)’과 더불어 <娑蘇(사소) 3部作(부작)>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이미지와 구조의 연관성이 일치되고 있다. 작품에서는 앞서 원시 언어의 특징이라고 말한 반복적 리듬이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융(Jung)의 심리학적 분석에 의하면, 시적 대상이 반복된 리듬 속에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균형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균형은 대상을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성격보다는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얻어지는 개념이다. 부정은 균형을 파괴하는 큰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형 감각이 우주적 질서를 존중하는 집단적 무의식이 세계에 존재하는 원형이라는 문화적 콤플렉스(complex)의 한 형태이다. 이것이 이 시에 있어서는 강력한 초월에의 의지에다 종교적 기능을 깔면서 주술적 형식으로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발굴된 리듬이 가지는 균형감각은 개인적인 주관성을 거부하는 자리에 서서 우주적 차원 승화된 신화적 이미지의 절대성을 추구하는데 있다.
  그래서 詩人(시인) 徐廷柱(서정주)는 작품①을 통해서 내적 움직임의 기본선율을 발견하고 詩的(시적) 이미지의 나타남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꽃밭의 獨白(독백)’과 作品(작품)이 통과제의 중 격리와 임신에 각각 해당되는 것이라면 作品(작품)②는 귀판에 해당될 것이다. 이 作品(작품)은 目的(목적)을 달성한 최고조의 경지,
娑蘇(사소)가 山神(산신) 修行(수행)하여 神(신)으로 사한 후 완전 초월했음을 도취한 엑스타시(신비적 황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하고 있다. 세속적 고뇌를 의미하는 <피가 잉잉거리던 病(병)>이 극복되었음을 강하게 詩(시) 全體(전체)에 올려주고 있는 이 作品(작품)은 그의 특유의 목소리인 呪術(주술)에 크게 지배 받고 있다. <香水(향수)의 강물> <이내 (崗 (강))의 발> <翡翠(비취)의 별빛불> <生金(생금)의 鑛脈(광맥))> 등과 같은 현란한 詩語(시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얼마나 이 作品(작품)이 도취와 초월의 기쁨을 향유하고 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서정주의 娑蘇(사소) 三部作(삼부작)은 주스·베네딕트(Ruth Benedict)가 대별한 <文化(문화)의 類型(유형)> 中에서 祭儀(제의)에 대한 복종에 근거를 둔 <아폴로的 文化>이기보다는 顯現(현현)에 대한 예언적 精神(정신)의 강력한 노출에 근거한 <디오니스的 文化>에 가깝게 해당되고 있다.


Ⅲ. 金春洙(김춘수)의 경우
― 추억, 바다, 식물 그리고 <處容(처용)>의 이미지

  서정주는 娑蘇(사소)라는 神話的(신화적) 人物(인물)에 關(관)하여 集團心性(집단심성)의 原型(원형)을 추구해 왔듯이 金春洙(김춘수)는 處容(처용)이라는 人物(인물)에 끈질기게 집착해 왔다. 金春洙(김춘수)는 徐廷柱(서정주)의 의도와는 달리 集團心性(집단심성)의 원초적 체험에 관하여 詩的(시적) 형상화 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處容(처용)을 자기 자신의 分身(분신)임을 깨닫고 줄기차게 개인 무의식의 심층 속으로 자신을 투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점은 그의 초기 시작(詩作) 태도인 시 정신과 대상, 사물간의 거리를 완전히 격리시키고 다음에 얻어지는 자기 발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自己 發現(발현)이라 함은 어떤 범주 속에 존재하는 自我(자아)의 意識化(의식화) 과정이 아니라 모든 外界(외계)와 절연된 自我의 强(강)한 表出(표출)을 의미하는 心理的(심리적) 욕구를 말하고 있다. 비교적 그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에 해당되는 ‘꽃’이나 ‘꽃을 위한 序詩(서시)’ 등과 같은 作品에서 보여준 넌센스(nonsense)의 世界, 즉 대상을 인식하는 主體(주체)와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無想(무상)의 觀念(관념) 世界> (註(주)1)가 處容(처용)에 관계있는 그의 적지 않은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詩의 대상이 되는 모든 事物(사물) 自體(자체)에 일방적으로 소멸을 要求(요구)해 버리는 초기의 詩作태도가,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主體者間(주체자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병립하는 徐廷柱(서정주)식의 <자연 의탁적 문학관> (註(주)2)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데아와 現象(현상)과의 치열한 갈등을 겪은 다음에 보여주는 自由聯想(자유연상)(free-association)의 수법 역시 서정주의 直觀的(직관적)인 시작 방법과도 괴리의 폭을 느낄 수가 있다.
  다소 서정주의 정신 배후를 지배한 자연 의탁적이며 직관적인 형태의 文學觀(문학관)이 심리학자 융과 같은 이들에게 끈덕지게 추구되어 온 原型(원형)(arche type)이라는 궁극적인 진리와 일치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金春洙(김춘수)의 處容(처용)에의 關心(관심)은 그·프라이가 지적한 <神話(신화)는 상실과 동일시 획득>이라는 명제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명제는 융과 전혀 배치되는 프로이드(Freud)流(류)의 개인 무의식의 世界와도 상통한다.
  金春洙(김춘수)의 發想(발상)에 依(의)하면 대상의 제거를 통한 개인 무의식의 원천적 경험세계가 주체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대상이 우선 존재한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 된다. 이데아와 現象(현상)이 共存(공존)하는 徐廷柱(서정주)的 플라토니즘(Platonism)을 거부한 후 대상이 결국 주체적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칸트(kant)의 思考(사고)를 거쳐 그는 대상을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하는 <言語(언어)와 象徵(상징) 形態(형태)>의 잠재적인 힘을 긍정한 나머지 新칸트주의라는 건물 속에 들어가는 경우가 된다. 新칸트학파의 카시러(Cassirer)는 인간 통제력에 핵심이 된다고 보는 정신적 이미지를 (상징 형태)라 보고 神話(신화)에 나오는 원초적 언어를 전형적인 보기로 들었다. 카시러(Cassirer)에 있어서 象徵(상징)이란 순수한 과학적 사유의 인식에서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어에 제약되는 사유와 예술적이고 신화적인 사유의 대상, 즉 人間心性(인간심성)의 감성적인 경험의 强勢(강세)함에 닿아지는 世界이다. 그의 方法(방법)에 의하면 神話的(신화적) 象徵(상징)은 人間의 수요와 욕망에 남는 部分(부분)을 획득하는 것. 幻想(환상)과 꿈과 所望(소망)의 世界에 存在(존재)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神秘(신비)나 眞實(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現實(현실)해석을 위한 말 없는 형태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神話(신화)는 現實(현실)과 理想(이상), 즉 現想(현상)과 이데아의 구분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가 곧 사물이며 따라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理想(이상)의 범주가 없이 대상을 대상으로서만 포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金春洙(김춘수)에게 있어서도 處容(처용)은 주체적 인식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대상이 소멸된 자리에서 자기 자신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金春洙(김춘수)의 分身이 바로 處容(처용)이며 處容(처용)은 다시 양자가 合一된 상태에까지, 다시 말해 主體(주체)도 對象(대상)분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경지에 까지 詩人 개인의 原初的(원초적)인 경험과 더불어 육박하고 있다.

  그대는 받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저 純潔(순결)은
  型(형)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대는 나의 노래 나의 춤이다.
  ……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 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純潔(순결)이다. 시원한 눈을 뜬다.

― ‘處容三章(처용삼장)’에서

  이 作品은 <순결을 잃은 자와 순결을 빼앗은 자>를 함께 놓고 비교하는 입장이 아니라 서로 경험적인 합일의 경지에 나아가려고 한다. 말하자면 處容自身(처용자신)이 숨결을 빼앗을 수도 있을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때 處容(처용)은 祭斷(제단)의 주체자로서 神이나 惡魔(악마)로 변형될 수 있으면서도 그의 魔性(마성)을 숨긴 까닭은 아내의 배신과 추행이라는 육체적 사건에 기인된 정신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극복하려는 고도의 관용에 있다. 처용을 제재로 선택한 많은 작품 ―자전적 소설 ‘處容(처용)’ 단시 ‘處容(처용)’ ‘處容三章(처용삼장)’, 장시 ‘處容斷章(처용단장) (第一部(제1부)), 연작시 8편 ’들리는 소리‘ 등― 중에도 共通的(공통적)으로 일관된 내용이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상실감이란 心理(심리) 경향에 있을 것이다. 이 상실감은 詩人 자신도 <나의 願望(원망)과 나의 實相(실상)>이 잘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했듯이 시인 자신이 유년 시절 때 겪은 경험 現實(현실)에서 비추어진 여러 가지 심리·복합 감정(complex)에서 비롯되어 진다.
  그의 추억의 세계는 <바다>라는 이미지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그의 유년 시절 때의 정신적 상처―열등감, 피해 의식, 암울과 불안―과 같은 心理的 世界를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아르(Bachelavd)는 그의 상상력논에서 자연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물질적 상상력의 가치를 크게 인정하면서 물체를 가지고서는 깊게 꿈꾸지 못하므로 깊게 꿈꾸기 위해서는 물질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物體(물체)의 表面性(표면성)은 다른 대상으로 그 이미지가 떠나 버리지만 물질의 내면성은 물질적인 모습으로 여러 형태의 일반 想像力(상상력)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상상력에 관련된 하나의 체계가 바로 그의 유명한 <4原素論(원소론)>이다. 불, 물, 空氣(공기), 大地(대지)라는 4가지 기본 원소 중 물에 해당하는 <바다> 그 자체가 갖는 원형적 상상력은 相異(상이)한 작가들에게도 공통된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心性형태의 하나인 <상실과 죽음>의 世界로 지향하고 있다. <바다>라는 이미지가 갖는 <상실과 죽음>의 세계는 시인 개인의 원초적인 경험 現實(현실)을 反映(반영)한 詩的 오브제이며 또한 이것은 프로이드 관점에서 보면 콤플렉스의 한 형태로 수용되어 유년기의 갈등, 태도, 적응행위 등 모든 심리적인 차원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재현된 기억의 총체, 즉 그것들 결합 경험을 반영하게 된다.
  金春洙(김춘수)의 열등의식은 두 가지 형태의 <부끄러움>으로 대체된다. 하나는 새로운 文物(문물)과 外界(외계)에 대한 유년시절의 배타적 자기 학대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운 성장과 관계있는 막연한 불안감이라면 후자는 63년 자전적 소설 형태로 발표된 ‘處容(처용)’이란 作品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는 오디푸스·콜플렉스(odipus complex)的인 心理的(심리적)경향이다.

  ① 濠洲(호주) 宣敎師(선교사)네 집
  廻廊(회랑)의 壁(벽)에 걸린 靑銅時計(청동시계)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은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
  濠洲(호주) 宣敎師(선교사)네 집에는
  濠洲(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 ‘處容(처용) 斷章(단장)I’의 Ⅲ에서


  ② 濠洲(호주) 아이가
  韓國의 참외를 먹고 있다.
  濠洲(호주) 宣敎師(선교사)네 집에는
  濠洲(호주)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 만의
  여름 하늘이 따로 또 있는데
 
― ‘幼年時(유년시)’에서


  ③팔다리를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 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Ⅸ에서


  ④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의 피를 조금 흘리고 그 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Ⅻ에서

  위에서 인용된 4편의 詩는 그의 幼年(유년) 시절의 劣等意識(열등의식)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두 가지 형태의 <부끄러움> 중 전자에 해당되는 것이 ①,②이라면 후자는 ③과 ④에 해당된다. ①②에서는 <濠洲(호주) 宣敎師(선교사)>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끌어들임으로써 보여주는 경이로운 세계에 대한 이질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보여줌>은 묘하게도 그의 자기 비화하는 열등감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유아적인 心理的 要求(요구)를 더욱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장차 다가올 未知(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作品 ③,④에서 나타난 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 갈등이 더욱 무거운 詩的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③과 ④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소설 處容(처용)에 나오는 다음의 事件(사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I…<입술이 불같이 붉은 계집애가 게가 거품을 뿜는 것이 더럽다고 그것을 발로 밟거나 다리를 뽑아 버리는 행위
  사건Ⅱ…남자 동무<그 녀석>이 구렁이를 꼬챙이 끝으로 눈깔을 푹 쑤셨다는 행위


  위 두 사건은 오디푸스·콤플렉스를 지향하는 <순결·거세·콤플렉스>(註(주)3)이다. 프로이드 심층 심리학에 의하면 자기중심적인 世界觀(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년기에는 반드시 異性(이성)에 대해 모멸감과 배타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理性的(이성적) 對象(대상)이 남아에게는 반드시 母性(모성)쪽에 있다. (그리고 위 小說(소설)에서 보면 할머니에게 아랫도리를 벗긴 일이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심층 심리학을 비추어 보면 <계집애>가 발정한 여성을 표상하는 거품 품는 게를 더럽다고 밟는 사건 I이나 <남자애>가 남성적 욕망을 象徵(상징)하는 구렁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사건Ⅱ는 <純潔(순결)에 대한 本能的(본능적)인 집념이자 거세에 대한 막연한, 동경>(註4)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건I과 사건Ⅱ는 性(혹은 異性(이성)이라고 표현해도 부분적으로 무방)에 대한 심각한 자기 학대이다.
  이러한 경험은 바다라는 靜的(정적)인 이미지가 던져주는 <상실과 죽음>의 世界와도 일관된 이미지의 구조로 연결되고 있다. 바다는 바다(mer)가 바로 어머니(mere)라고 하듯이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며 精神的(정신적)인 모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生命의 근원을 原型心像(원형심상)으로 하는데 많이 善引(선인)되기도 하는 詩的 對象(대상)이다.

①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Ⅲ에서


②바다는 가라 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해안선)을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Ⅳ에서


③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 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가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Ⅷ에서

  그러나 그의 바다는 영원한 안식의 바다가 아니라 <상실과 죽음>의 바다이며 상처 입은 바다이다. 삶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 난파. 귀환, 혹은 투쟁과 투쟁의 結果(결과)인 개선을 要求(요구)하는 동적인 이미지로서의 바다가 아닌 어머니가 어린 새끼를 잠재우는 죽은 듯이 고요한 바다인 것이다. 바다의 이러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만족하지 않고 그의 또 다른 독특한 상상력의 근저인 植物(식물)과 손을 잡으면서 處容(처용)이란 神話的(신화적) 人物(인물)의 原型的(원형적) 모델에 接近(접근)하여 간다. 여성적(혹은 모성적)인 이미지로서의 바다를 파악하고 관조한 그는 동물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으면서 식물에 대해서는 조용히 가라앉는 내적인 천부적 바탕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에 대한 그의 개인적 취향은 추억과 영감의 천재라는 詩人의 人情(인정)에서 배타되었다고 할까. ‘處容斷章(처용단장)I’의 全體(전체) 시행이 2백4行이나 진행되는 동안 14種(종)의 植物(식물)이 登場(등장)되는 例(예)가 그러한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식물에 대한 이러한 집요한 관심은 <바다>의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켜주는 가장 내면적인 문제의 해결에 확실히 도움을 주고 있다. 식물의 가지는 창공으로 비상하려고하는 성질을 갖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 나오는 식물의 이미지는 창공으로 비상하려는 초원 의지가 거세되고 무의식적인 욕망의 세계에 뿌리내리는데 특징을 갖고 있다. 식물이 열리는 열매나 잎은 대지에 떨어져 결국 바다의 의미인(바슬라르의 이론에서) <죽음과 상심>의 세계 속에 빠져 들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의 식물은 엄격하게 바다라는 동질적 이미지와 바다, 이 두 가지 사물이 갖는 동질적 이미지는 죽음의 세계로 모아지기 때문에 가령 초기 작동에서도 <바다/시들어 낙엽이 진다.> (‘四村(사촌)마을)’에서라고 표현한다든가 <스름나무 그늘에서 숨은 돌리고/ 죽음을 죽이는/ 바다> (‘금송아지’에서)를 노래한다든가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處容斷章(처용단장)I’에서도 그러한 점이 더욱 극명하게 표현되어 지고 있다.


①라일락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山菜花(산채화)를 적시고 있었다.
(Ⅱ에서)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된 山菜花(산채화) 한 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Ⅴ에서)

캐다람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람 바다의 가장 살찍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Ⅶ에서)

  結局(결국) 金春洙(김춘수)가 만난 神話的 人物 <處容(처용)>은 바람과 햇빛의 조화로움 속에 그 무한한 生命力을 발산하는 植物的(식물적)인 인간형이며 유년기의 추억, 감동, 부끄러움, 꿈, 바다와 식물, 상실과 음이라는 유사 미지의 結合(결합)을 추구해 온 후 만나는 그의 自己 分身의 한 모습이 대립과 투쟁이 아닌 관용과 인고 속에서 살고 있는 자기의 그림자이다.


Ⅳ. 마무리

  이상과 같이 필자는 2名의 詩人을 通(통)해 集團(집단)과 個人(개인)의 心理的 기초 위에 시적 이미지를 추적해 보았다. 서정주는 娑蘇(사소)라는 人物을 通해 時空(시공)은 초월한 영원의 世界로 向(향)하고 있으며, 金春洙(김춘수)는 處容이라는 人物을 通해 무의식적인 욕망의 세계 속에 自己의 참모습을 內在(내재)하려고 노력하였다. 전자는 인간의 근본 욕망과 意志(의지)가 集團的人間(집단적인간) 心性의 보편성에 기인하였으나 후자는 대상의 소멸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自己와 對象을 等質化(등질화)시켜 그 유사한 이미지를 結合(결합)하고자 했다. 그래서 전자는 당연히 리듬과 은유의 方法(방법)을 선택하였고 후자는 자유연상의 수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떠한 방법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神話的 人物을 시적 상상력의 매체로 파악하는데 는 서로 그 의도가 一致(일치)하고 있다.
  다만 徐廷柱(서정주)는 집단적 무의식 속에 金春洙(김춘수)는 個人(개인) 無意識(무의식) 속에 원형적 이미지를 추출해 내어 그들의 의도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方向(방향)의 무의식의 世界는 심층 심리학적 업적을 이루어 놓은 융과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서로 친연성을 맺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批評的(비평적) 가능성이 엿보이며 앞으로 이 方面(방면)에 그런 期待(기대)에 부응되는 작품이 나오기를 바란다.

  註 1, 2―金柱實(김주실) 교수의 用語(용어)를 빌렸음.
  註 3, 4―김현 교수의 ‘金春洙論(김춘수론)’에서 引用(인용)했음.

 

《‘新春文藝(신춘문예) 가작’ 당선소감》

- 宋喜復(송희복)

可能性(가능성)인정해준 스승께 거듭 감사
新春文藝(신춘문예)입선은 과한 영광

  글 쓰는 行爲(행위)는 일종의 마조히즘(masochism)이다.
  부단히 자기를 부정하고 학대한 뒤에 밀려오는 성적쾌감이거나 혹은 종교적 고행과 시련을 극복한 후에 느껴지는 구도자의 법열(法悅)일 것이다.
  아마 글 쓰는 도중에 누리는 기쁨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적어도 활자화된 자기 작품을 본 순간까지는…. <아픔>을 <기쁨>으로 역전시키는 힘이 글 쓰는 사람들의 능력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그런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성취후의 空虛感(공허감)…. <기쁨>없는 <아픔>의 연속…. 나는 왜 마조히스트가 되지 못하고 니힐리스트가 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나의 얇은 능력을 내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은 하고 싶다. 이번의 과분한 영광은 나의 존재의 무미한 日常性(일상성)으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준 계기가 되었다. 공허감은 느끼지만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다.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우선 5년 전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신 홍기삼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게 가르침을 준 많은 교수님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同門(동문)선배문인에게도. 萬海(만해)이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東國大學(동국대학)의 전통 속에 내 자신을 던지고 싶다.
  나는 진정으로 苦行(고행)을 法悅(법열)로 역전시키는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다.
<약력>
1957 부산 출생
1978 진주교육대학 졸업
1978 본교 문리대국문과 편입학(2年)
현재 교직 의무복무로 휴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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